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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101화 (101/850)

101화

아직 바람이 쌀쌀할 무렵.

새김포의 선착장 주변은 몹시 혼잡스러웠다.

이번 원정에 동원되는 병사는 대략 6천.

다만 보급항을 경비할 예정인 1천의 병력은 이미 통바 족의 영역에 건설된 선착장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는 만큼 이번에 움직이는 병사는 약 5천에 가까웠다.

이 병사들과 병사들을 배웅하기 위해 선착장에 나온 가족들, 그리고 이미 전쟁이 났다는 소문이 파다했기에 원정 함대가 출항하는 모습을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모두 선착장으로 나왔으니 당연히 북적일 수밖에.

정성국은 혼란한 선착장을 보고 잠시 혀를 찼다.

“이거 이래서 오늘 출항할 수 있겠나 모르겠는데?”

정성국의 혼잣말에 옆에 있던 군사청장이 질책으로 알아듣고 머리를 조아렸다.

“송구합니다. 전하. 이리 붐빌 줄 미처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뭐...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으니...어쩔 수 없네. 일단 근처의 경비대원들을 모두 차출해서 혹시 모를 사고를 막고 질서를 유지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전하.”

정성국의 명령에 군사청장이 급히 이동했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정성국이 투덜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미리 다 승선시킬 것을 그랬어.”

꽤 긴 원정이 되지 않을까 싶었기에 마지막으로 가족들의 얼굴이라도 보라고 외출과 외박을 허락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나마 어제 물자들은 다 실어두었기에 병사들만 배에 탑승하면 출항할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정말 오늘 내로 출항은 어려웠을 것이라고 생각한 정성국이었다.

그런 정성국의 뒤편에서 전아라가 그를 달랬다.

“아무래도 처음 경험하는 일이니 많이 부족할 수밖에 없죠. 곧 질서가 잡힐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오라버니.”

“알았어.”

전아라의 말대로 시간이 지나면서 군사청장이 급히 차출한 경비대원들에 의해 혼잡한 선착장 주변에 질서가 잡혔고 병사들은 자신이 탈 선박에 오르기 시작했다.

정성국은 슬슬 떠날 시간이 다가왔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건 정성국을 바라보는 두 여인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애절하게 정성국을 바라보던 두 여인 중 전아라가 먼저 나서서 정성국에게 다가왔다.

“오라버니. 이번 전쟁이 중요하다는 것은 알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오라버니의 안전이에요. 함부로 나서지 않으리라 믿어요.”

“그럼. 절대 그런 일 없을 거다.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주변의 시선 때문인지 애써 담담한 모습을 보이려는 전아라였지만 출항할 시기가 다가오면서 몹시 불안해했었던 것을 기억하는 정성국은 먼저 전아라에게 다가가 그녀를 가볍게 껴안았다.

전아라는 정성국의 품속에서 파르르 떨면서 정성국의 가슴팍에 머리를 대고 잠시 그의 온기를 느꼈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정성국을 올려다보며 조용히 이야기했다.

“절 과부로 만드시진 않으리라 믿을게요. 오라버니.”

생각지도 못한 한마디에 정성국은 미소를 지으며 전아라의 등을 한번 쓸어내리면서 입을 열었다.

“그럼. 백년해로하기로 약속했잖아? 너무 걱정하지 마. 그리고 분명 보급이 중요하긴 하지만 너무 무리해서 일하지도 말고.”

“오라버니가 전장에 나가 계시는데 어찌 이곳에서 편히 쉴 수 있겠어요. 거기에 이번 전쟁은 무엇보다 보급이 중요하니 전 최대한 화약 제조 공방에서 머물며 일을 할거에요. 그러니 제가 과로사했다는 소식을 듣기 싫으시면 최대한 빠르게 돌아오셔야 해요.”

정성국은 이번 전쟁을 최소한의 피해로 승리하기 위해 최대한 멀리서 포탄을 퍼부어 에스파냐의 배와 항구를 초토화하는 작전을 구상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포탄의 소모가 극심해질 수밖에 없었고 이는 화약 제조 공방에서 일하는 전아라와 장인들이 갈려 나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이를 정성국의 품 안에서 입을 삐죽이며 이야기하는 전아라였고 이에 정성국은 그런 전아라의 투정이 귀엽게 느껴져 웃으면서 대답했다.

“알았어. 널 과부로 만들지도 않고 과로사시키지도 않으려면 최대한 강력하게 에스파냐를 공격해서 빠르게 승부를 내야겠구나.”

그 말을 끝으로 정성국은 전아라를 껴안고 있던 팔에 힘을 주면서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주변에서 탄성이 터져 나온 것 같았지만 정성국은 애써 무시하며 그녀의 등을 도닥이고 이내 포옹을 풀었다.

그리고 걸음을 옮겨 자신을 보고 눈물을 글썽이는 하얀 들꽃을 바라보았다.

“전하. 부디 몸 성히 다녀오시옵소서.”

“알았다.”

그러면서 정성국은 전아라에게 했던 것처럼 하얀 들꽃에게 다가가 그녀를 잠시 안아주었다.

품 안에서 정성국을 글썽이는 눈망울로 바라보는 하얀 들꽃을 보고 정성국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별일 없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괜히 나를 대신한다고 너무 무리하지 말고. 지금껏 해온 대로만 하면 충분하다. 알았니?”

“예. 전하.”

정성국은 이곳에 남아 그를 대신해 업무를 맡을 하얀 들꽃에게 당부하고 조금은 미안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지만 아라도 좀 챙겨주거라. 내가 없으면 화약 제조 공방에 틀어박혀 무리하다 건강을 해칠까 두렵구나.”

“제가 꼭 챙기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전하.”

“그래. 너만 믿는다.”

그러면서 정성국은 품 안에 들어온 하얀 들꽃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동시에 주변에서 아까와는 달리 더 큰 환호성과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애써 무시하면서 정성국의 입맞춤에 하얀 들꽃이 자연스럽게 눈을 감자 볼을 타고 흘러나온 눈물을 손으로 닦아준 후 포옹을 풀고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뒤쪽에서 흐뭇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청장들과 악수하면서 다시 한번 잔소리와 당부를 하고 곧바로 지급 전선에 올라탔다.

지급 전선 위에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정성국을 바라보던 김봉길이 그에게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승선을 환영합니다. 전하.”

그런 김봉길을 보고 정성국이 피식 웃었다.

“그래. 잘 부탁하네. 선장. 아니 함장.”

“그럼 바로 출항을 할까요?”

별다른 예정이 없었기에 묻는 김봉길이었고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러도록 하게. 아. 그 전에 일단 국기를 게양하도록 하게. 이 배에는 왕실기도 달고.”

“아. 알겠습니다.”

그러면서 김봉길이 선원들에게 깃발을 게양할 것을 명령하자 선원들은 미리 준비해두었던 왕실기와 국기를 조심스럽게 밧줄에 매달기 시작했다.

국기를 정했기에 굳이 미룰 필요 없이 바로 왕실기도 정했다.

어차피 왕실기야 정성국이 마음대로 정하면 그만이었기에 국기 후보로 생각했던 흰 바탕에 커다란 흰머리수리가 날개를 활짝 펴고 있는 모습을 그린 깃발을 왕실기로 선택해 미리 만들어두었다.

정성국은 훗날 흰머리수리 덕후로 불릴까 두려워 왕실기에는 흰머리수리뿐만 아니라 곰도 넣어볼까 했지만, 그의 그림 실력으로는 두 마리의 동물이 그럴싸하게 바라보는 모습을 그리기가 쉽지 않았기에 결국 기존의 생각대로 흰머리수리만 그려놓았다.

밧줄에 묶인 왕실기와 국기가 돛대 끝에 올라가 바람을 받고 펄럭이자 김봉길은 처음으로 게양된 깃발을 보고 감탄했다.

“국기인 삼태극 문양도 멋있지만, 독수리를 형상화한 왕실 문양도 참 멋있군요.”

“그런가? 다행이군.”

* * *

개똥이는 멀리서 선착장에 정박해있는 전선들을 보면서 감탄하고 있을 때 그와 함께 온 일행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이구. 장관은 장관이네. 고생해서 나온 보람이 있어.”

“그러게 말입니다.”

이에 이곳에 나오자고 우긴 개똥이가 내심 흐뭇해하면서 선착장에 정박해있는 선박들을 바라보다 정성국을 발견하고 가리켰다.

그러자 일행들이 일제히 목을 쭉 빼면서 정성국을 멀리서나마 구경하려고 했을 무렵 정성국이 곁에 있던 여성을 껴안자 일행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중년 사내가 놀라 소리쳤다.

“어이쿠. 남사시러워라.”

그러자 함께 온 젊은 사내가 그런 중년 사내를 보고 타박했다.

“남사스러울 것이 뭐 있소? 멀리서 보기에도 애틋해 보이니 오히려 보기 좋구만.”

이에 개똥이도 젊은 사내의 의견에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암. 멀리서 보기에도 금슬이 좋아보이니 기다리다 보면 후계 문제도 걱정 없어 보이고.”

그러면서 한참을 정성국과 두 왕비를 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무렵 중년 사내가 슬쩍 주변을 살피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헌데 정말 전쟁이 나는 건가?”

이에 일행 모두가 안색이 살짝 경직되었고 젊은 사내가 대답했다.

“그렇다고 하더군요.”

“으음...”

표정이 굳은 중년 사내를 보고 젊은 사내가 타박했다.

“아재. 뭘 그리 걱정합니까? 저 광경을 보고도 걱정이 됩니까?”

하지만 중년 사내는 전쟁이라는 말에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래도 전쟁이 나면 우리에게도 피해가 오는 것 아닌감?”

그런 중년 사내를 보고 젊은 사내가 혀를 차면서 거들먹거리기 시작했다.

“아재는 걱정도 팔자요. 그거 아시오? 작년에도 저들이 쳐들어와 전투가 벌어졌다는 사실을?”

“그게 무슨 소린감?”

처음 듣는 소리에 중년 사내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개똥이 역시 처음 듣는 소리였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 분위기를 파악한 젊은 사내가 히죽거리면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번에 저 원정 함대에 포함되는 병사 중의 하나가 내 친구 녀석이 있어서 들었소만 작년에 이미 에스파냐라는 놈들이 우리의 배를 공격했다고 하오.”

“그래? 작년에?”

개똥이와 중년 사내가 금시초문이라는 듯 어리둥절 하자 젊은 사내가 역시 몰랐냐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렇소. 저 에스파냐란 서양놈들이 비겁하게 우리를 공격했지만, 해군이 나서서 가볍게 물리쳤다고 하오.”

“허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고 이를 물리쳤다는 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는 중년 사내였다.

“그래서 오히려 백성들이 몰랐던 것이지. 아마 저기 있는 해군이 에스파냐 놈들을 물리치지 못했다면 아재 말처럼 우리가 피해를 보았겠지만, 저 든든한 해군이 우리를 지켜주었단 소리요.”

마치 자신이 직접 싸운 것처럼 어깨가 으쓱한 젊은 사내를 보고 개똥이가 눈을 크게 뜨며 낮게 소리쳤다.

“설마 그래서?”

이에 젊은 사내는 히죽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들었소. 이대로 내버려 뒀다간 왜구들처럼 계속 공격할지 모르니 아예 먼저 공격해서 저들의 싹을 뽑겠단 뜻이지. 이게 다 북미왕국이 에스파냐보다 강성하기 때문 아니겠소.”

“오오!”

젊은 사내의 말에 중년 사내는 살짝 감탄하면서 작년에 있었다는 전투에 대해 자세하게 묻기 시작했다.

이에 젊은 사내는 이 자리에서 다 이야기하다간 목이 쉰다며 슬쩍 뺐고 결국 중년 사내가 구경이 끝나고 술을 사면 그때 안줏거리로 이야기하겠다고 약속했다.

개똥이는 꼭 따라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시선을 돌려 전선을 바라보다가 문득 모든 전선에서 처음 보는 깃발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저게 무슨 깃발이지?”

개똥이의 말에 중년 사내와 젊은 사내는 대화를 멈추고 시선을 돌렸고 젊은 사내는 깃발을 아는 모양인지 감탄사를 토했다.

“아! 저게 바로 우리 북미왕국을 상징하는 깃발이라 들었소. 국기라고 하던가?”

“국기?”

“그렇소. 삼태극이라...정말 멋지군!”

그러면서 젊은 사내는 잔뜩 흥분해서 바람을 받고 휘날리는 국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개똥이는 잠시 흰 바탕에 삼태극이 그려진 국기라는 깃발을 바라보다가 문득 유일하게 두 개의 깃발이 올라간 함선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럼 저건 뭐요?”

이번엔 젊은 사내도 알지 못하는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정답에 가까운 추측을 내놓았다.

“저건...글세? 저 배 한 척만 저 깃발이 올라간 것을 보면...아마 왕을 상징하는 깃발 아니겠소?”

흰머리수리가 그려진 깃발을 보고 왕을 상징하는 깃발이라고 젊은 사내가 이야기하자 중년 사내와 개똥이는 동시에 감탄사를 토했다.

“오오!”

“저게!”

그때 모든 배에 국기가 올라가자 흰머리수리가 그려진 깃발을 달고 있던 배가 먼저 선착장을 나서기 시작했고 다른 전선들도 하나둘 그 배를 따라나서기 시작했다.

“아. 출항한다!”

“와아아아!”

* * *

정성국은 주변에 정박하고 있는 선박들을 바라보았다.

돛이 있는 지급 전선에는 돛대 끝에, 그리고 돛이 없는 납작한 인급 전선에는 상부 구조물 위쪽에 뒤늦게 깃발을 매달기 위해 부착한 봉에 국기가 매달려있었다.

‘확실히 화려하기는 기범선인 지급 전선이 더 화려하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김봉길이 주변을 살피고는 정성국에게 보고했다.

“전하. 다른 전선에도 모두 국기가 올라왔습니다.”

“그런가?”

정성국은 마지막으로 갑판 위에서 선착장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인파가 몰려있었지만, 정성국은 자신을 애절하게 바라보는 두 여인을 잠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출항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전하.”

김봉길은 곧장 부선장에게 명령을 내렸고 곧 정성국이 탄 지급 전선이 닻을 올리면서 선착장을 미끄러지듯 나섰다.

그렇게 1666년 2월 5일.

지급 전선 8척과 인급 전선 13척, 그리고 정기선으로 사용되던 기선 4척이 새김포를 떠나 남하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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