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을 탈출하라-98화 (98/850)

98화

정성국은 자신을 찾아온 정평국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야. 누가 뭐라 해도 난 이번 원정에 참여할 거다. 그러니 나를 설득할 생각은 접어라.”

정성국은 새해를 맞이해 처음 열린 회의에서 슬쩍 자신이 원정에 참여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리고 청장들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북미왕국에서 정성국은 무엇보다 중요하고 대체 불가능한 인물이었다.

만약 정성국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긴다면 북미왕국은 그대로 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아무런 후계도 없는 정성국이 전장에 나서겠다고 했으니 당연히 반대할 수밖에.

거세게 반발하는 청장들을 설득하기 위해 정성국이 무척이나 애썼지만, 청장들의 태도에는 변화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평국이 자신에게 할 말이 있다면서 집무실로 들어오자 정성국이 먼저 선수를 친 것이다.

정평국 역시 원정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생각했으니까.

정평국은 그런 정성국의 발언에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누가 뭐랍니까? 안 말립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그런 동생의 말에 정성국은 무척이나 의외라 그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응? 안 말린다고?”

이에 정평국은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제가 말린다고 형님이 들을 리가 없잖습니까. 특히 이미 형님이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린 문제라면요.”

정곡을 찔린 정성국이 괜히 헛기침했다.

“크흠.”

“그리고 아이누 해전 당시에는 그저 왜선이 약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작년 에스파냐와의 교전의 결과를 보니 우리의 전선이 생각보다 대단하더군요. 보아하니 형님께서 전선에만 머문다면 크게 위험할 것 같지는 않더라고요.”

정성국은 정평국의 말에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자신의 말에 동의해준 정평국이 새삼 고맙게 느껴지기도 했고.

정성국이라고 안전을 생각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다 생각하고 충분히 안전하다는 판단이 들었기에 원정에 참여한다고 했던 것이지 아니었다면 원정 참여를 고민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를 잘 알아듣게 설명했고 첫 교전 이후에는 후방의 임시 보급항에서만 머물겠다고 이야기했지만, 청장들은 정성국이 자리를 비운다는 것 자체를 몹시 불안하게 여겨 결사반대했고.

이를 설득하다 진이 다 빠진 정성국이었다.

헌데 마찬가지로 결사반대할 거라 여겼던 동생이 이렇게 말해주다니.

“그렇지! 안전하다니까!”

정평국은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피식 웃으면서 덧붙였다.

“물론 전장에서는 어떤 일이 발생할지 예측할 수 없는 만큼 후방에 머무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만...”

“크흠.”

“아. 대신 전투가 벌어지면 안전을 위해 갑판 안쪽으로 피신하겠다고 약조해주시지요.”

“응? 갑판 안쪽?”

갑자기 무슨 소리냐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짓는 정성국을 보고 정평국이 입을 열었다.

“이번 원정에서 지급 전선을 타고 움직이실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아무래도 지급 전선이 더 큰 만큼 공간에 여유가 있었고 그 때문에 정성국은 지급 전선을 타고 움직일 생각이었다.

“지급 전선은 전투 시 갑판 위에 방어판을 설치하기는 하나 총탄은 막을지언정 저들의 화포를 막지는 못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만큼 오히려 인급 전선이 더 안전할 것 같긴 합니다만...”

“아...”

정성국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로 안전을 생각한다면 차라리 작은 인급 전선에 타는 것이 나았다.

갑판 위에 머문다고 가정했을 때 지급 전선의 방어판은 서양 선박에 장착된 함포를 버티지 못하지만 인급 전선의 상부 구조물은 충분히 버틸 수 있었으니까.

다만 정성국이 움직인다면 기본적으로 따라붙는 호위대의 숫자 때문에라도 지급 전선에 탑승하는 편이 여러 사람에게 편했다.

“그리고 절대로 누에바 에스파냐의 영토에 상륙하지는 않을 거라고 믿습니다.”

정평국이 덧붙인 말에 정성국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성국 역시 누에바 에스파냐의 서해안을 공격하기는 해도 상륙해 그 안쪽으로 들어갈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야 물론이지. 나도 절대로 저들의 영토에 상륙할 마음은 없으니까.”

정성국의 확답에 정평국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시다면 뭐...”

“휴우. 다행이군.”

그것만 지킨다면 정평국은 굳이 반대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밝혔고 이를 듣고 정성국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문득 정성국은 바쁜 와중에도 자신의 집무실을 들른 정평국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근데 그럼 넌 왜 온 거냐? 이 바쁜 시기에?”

이에 정평국은 들고 있던 보고서를 정성국에게 건네주면서 말했다.

“화폐 발행에 대한 최종 보고서입니다.”

“아.”

정평국은 관리청의 일을 돕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화폐를 발행하는 일을 총책임지고 있었다.

이미 화폐를 발행하는 것은 예전부터 이미 결정한 사항이었기에 계획은 어느 정도 짜여 있었다.

문제라면 당장 화폐를 발행할 귀금속이 부족하다는 점이었고 이 때문에 지난 1년간 금과 은을 열심히 캐서 새김포에 보관하고 있었다.

헌데 정평국이 이렇게 찾아왔다는 뜻은 화폐를 발행할 정도의 금과 은을 모았다는 뜻이었기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여는 정성국이었다.

“벌써 화폐를 발행할 정도로 금과 은이 쌓인 건가?”

이에 정평국은 묘한 표정으로 정성국을 잠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형님. 형님이 찍어준 지역에 금과 은이 엄청나게 나오더군요.”

“크흠. 뭐 운이 좋았지.”

전생에 골드러시를 불러일으켰던 캘리포니아 금광지대 중의 한 곳과 은으로 가득한 산이라는 캘리코 은광지대였으니 꽤 많은 금은이 나오긴 할 것이다.

이에 정성국은 괜스레 헛기침하며 시선을 보고서로 돌려 잠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결국, 주화로 가는 건가?”

금속화폐의 시작은 칭량화폐였다.

칭량화폐는 가치를 확인하기 위해 무게를 쟀기에 칭량(稱量)화폐라고 불렸던 것인데 이 칭량화폐의 단점은 가치를 확인할 때마다 무게를 재야 했기에 아무래도 거래에 사용하는 것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나온 것이 바로 주화였고 주화는 금속의 순도와 중량까지 확증할 수 있어 칭량화폐처럼 거래할 때마다 무게를 잴 필요 없이 단순히 개수만으로도 거래가 가능해졌다.

이러한 주화에도 여러 단점은 존재했기에 훗날 태환화폐가 생겨났고 정성국은 이에 대해서도 정평국에게 슬쩍 설명을 해주긴 했었다.

하지만 정평국은 아직 지폐를 사용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입장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아직 저화(楮貨), 아니 형님이 이야기 한 지폐(紙幣)를 발행하자면 지폐의 신뢰성을 위해 먼저 북미왕국 곳곳에 은행을 설치해야 하는데 당장은 그럴 여력이 없으니까요.”

지폐를 사용하려면 무엇보다 지폐를 실제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신뢰할 수 있는 보장이 필요했고 그렇기에 은행은 필수였다.

지폐는 단순히 종이쪼가리에 불과하지만, 이 종이쪼가리를 은행에 가져가면 지폐에 적힌 액면가를 계산해서 귀금속으로 바꾸어주니 사람들이 지폐를 신뢰하고 사용할 수 있을 테니까.

다만 현재 북미왕국의 사정상 곳곳에 은행을 만드는 것은 어려웠기에 이를 이야기하는 정평국이었고 정성국은 납득했다.

“뭐 그렇기야 하지. 금 한 냥, 은 한 냥과 한 돈의 무게를 가진 총 3종류의 주화를 발행하는 건 괜찮은데...동전이 빠진 것은 아쉽네. 은 한 돈짜리 주화가 가장 가치가 낮은 주화라니.”

이 보고서에 따르면 은 한 돈짜리 주화가 가장 가치가 낮은 주화인데 실제 사용할 것을 생각해보면 가치가 꽤 높았다.

은 한 돈짜리 주화의 가치가 쌀 한 섬에 조금 못 미쳤으니 말이다.

그런 만큼 실제 북미왕국 백성들이 사용하기에는 그보다 더 낮은 주화가 필요하지 않은가 싶었다.

이에 정평국이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저었다.

“저도 만들고야 싶습니다만...당장 북미왕국에는 구리가 부족하니까요. 이를 해결하려면 구리가 풍부한 왜국에서 구리를 가져와야 합니다. 다만 지금처럼 원상이 하는 밀무역으로는 어렵고...북미왕국의 이름으로 왜국과 정식으로 교역을 해야겠지요. 다만 정식으로 우리 북미왕국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면 막부에서도 아이누 부족 연합 뒤에 있는 세력이 우리라는 것을 알게될테니 과연 정식으로 교역하는 것을 용인할지는 의문입니다만...”

그러면서 정평국은 말을 흐렸고 정성국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구리는 애리조나 지역에 꽤 많이 묻혀있는 거로 아는데...거기에 유타나 뉴멕시코 지역도 그렇고. 문제라면 역시 그 광물을 캐낼 사람이 없다는 거지.’

지금도 수많은 광부가 북미왕국에 존재하는 철광, 탄광, 금광, 은광 등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일손이 부족한 상황이었으니 막상 구리가 가득 묻혀있는 지역을 얻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다.

결국, 정평국의 말대로 외국에서 구리를 사와야 했고 그 대상은 구리가 많은 일본이 될 수밖에 없었다.

‘평국이 말대로 아이누 부족 연합을 뒤에서 지원한 게 우리 북미왕국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정식으로 교역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 같은데...잠깐. 남미에도 구리가 많았던 거로 기억하는데...지금은 페루 부왕령인가? 흐음...’

대안을 떠올린 정성국은 일단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건 그때 가서 고민해보도록 하고...그것보다 원래는 금 한 돈짜리 주화도 있지 않았어? 그걸 뺀 것은 역시 금과 은의 교환 비율 때문인가?”

정평국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렇습니다. 형님. 일단 금과 은의 교환 비율을 1:10으로 잡았고 그렇게 되면 금 한 돈과 은 한 냥의 가치가 같은지라 굳이 만들 필요가 없어 보여 결국 제외했습니다.”

“흐음...”

“그리고 이렇게 하면 은 한 돈을 1원으로 잡고 은 한 냥이 10원, 금 한 냥이 100원이 될 테니 실제 사용하기도 편할 테고요.”

이에 정성국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초기에 금과 은의 교환 비율은 1:10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1500년대 이후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은광이 개발되면서 교환 비율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명나라에서는 일조편법을 실시하면서 중국의 귀금속 교환 비율은 전혀 다르게 흘러갔고.

그리고 청나라 역시 현재는 명나라가 시행했던 일조편법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었고 훗날에도 지정은제를 시행하는 만큼 중국에서만큼은 은값이 다른 곳에 비해 무척 높을 수밖에 없었다.

현재 청의 금은 교환 비율은 1:6 수준이었고 유럽에서는 보통 1:12 정도였다.

이 때문에 에스파냐는 신대륙에서 캐낸 은을 모조리 동양으로 가져가서 자신들이 구매하고 싶은 도자기, 차, 비단 등을 사 가는 것이다.

중국의 은값이 유럽과 비교하면 2배나 비싼 만큼 은을 바리바리 싸 들고 중국으로 가면 같은 양의 은으로 2배의 물품을 살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북미왕국이 금은의 교환 비율을 1:10으로 잡고 이를 고정해버린다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에스파냐의 경우 금은의 교환 비율이 1:12였기에 후에 에스파냐와 정식으로 교역을 하게 되고 에스파냐가 마음만 먹는다면 별다른 어려움 없이 재정거래로 인한 이득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 지금껏 열심히 캐내는 금을 털릴 수밖에 없었고.

이를 지적하자 정평국은 크게 상관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알고 있습니다만 크게 상관이 없지 않습니까? 어차피 에스파냐와 교역할 시기에는 청과도 정식으로 교역을 청할 예정이니...그렇게 되면 우리 역시 재정거래로 인해 이득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 형님 말씀대로 저들의 은이 우리 북미왕국으로 들어온다면 저들이 청과 교역하면서 취해왔던 이득을 우리가 대신 취할 수 있게 되는 만큼 장기적으로 보면 나쁠 것은 없다고 봅니다만...”

“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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