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을 탈출하라-97화 (97/850)

97화

정성국은 새해를 맞아 전아라와 하얀 들꽃과 함께 떡국을 먹고 있었다.

북미왕국에서는 공식적으로는 태양태음력, 즉 흔히 말하는 양력을 채택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역법에 대해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고 덕분에 이주민들은 조선에서 사용해오던 음력을, 원주민들은 자신들이 사용하던 역법을 계속 사용하다 보니 자연히 문제가 생겼다.

뒤늦게 이를 인지한 정성국은 고민 끝에 그레고리력, 즉 양력을 채택했다.

조선에서 사용하는 태음태양력, 즉 흔히 말하는 음력은 달의 삭망월 주기를 기준으로 한 달을 삼기에 1년을 354일로 규정하는 만큼 실제 공전주기와 비교하면 오차가 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원주민들이 사용하는 역법은 부족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었고 대부분 자연의 변화에 따른 역법이었기에 오차가 더욱 컸고.

이 때문에 그나마 오차가 적은 그레고리력을 선택한 정성국이었다.

그리고 전생의 기억이 있는 정성국으로서는 양력이 더 편하기도 했고.

다만 정확한 계산을 위해 원상에서 서양 상인에게 직접 달력을 구해 최근에야 비로소 양력을 채택할 수 있었다.

‘근데 분위기는 영...뭐 어쩔 수 없나?’

북미왕국에서 공식적으로 채택한 양력은 아직 북미왕국의 백성들에게는 익숙한 역법은 아니었다.

대부분은 자신들이 사용해왔던 역법을 사용하고 있었으니.

그렇기에 정성국이 기대했던 떠들썩한 새해 분위기는 전무했다.

다만 조만간 달력을 만들어 관공서에 배포할 예정인 만큼 점차 바뀌리라고 생각한 정성국이었다.

‘종이 수급만 원활하면 아예 백성들에게 달력을 배포하는 것도 괜찮은데...아.’

마침 떠오른 생각에 정성국은 옆에서 조신하게 떡국을 먹고 있는 전아라를 바라보았다.

조선에서는 기본적으로 부부간에 겸상하지는 않았지만, 이곳은 북미왕국이라는 이유로 정성국은 매번 함께 식사하곤 했다.

처음에는 조금 어색해하던 전아라도 이제는 익숙해졌고.

그리고 정성국의 말마따나 워낙 서로가 바쁜 만큼 아침이라도 함께 먹지 않으면 얼굴 보기가 힘들기도 했고.

이 때문에 간혹 전아라는 하얀 들꽃을 부러워하곤 했다.

다른 곳에서 근무하는 전아라와는 달리 하얀 들꽃은 주로 정성국과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으니까.

“일은 좀 어때? 아직도 많이 바빠?”

정성국이 묻자 전아라가 먹고 있던 떡을 삼킨 후 슬며시 정성국을 째려보면서 말했다.

“당분간은 바쁠 수밖에 없지 않나요? 사람도 부족하고 거기에 에스파냐와 전쟁을 앞두고 있으니...”

“크흠.”

그러면서 전아라는 슬쩍 투덜거렸다.

북미왕국에서 가장 보안이 철저한 곳 중의 한 곳이 바로 화약 제조 공방이었다.

그러다 보니 함부로 인력을 충원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거기에 곧 에스파냐와의 전쟁 때문에 막대한 물량을 생산해야 하니 바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전아라는 모든 연구도 접어두고 화약 제조 공방에 모든 신경을 쏟을 수밖에 없는 처지이긴 했다.

개척촌에서야 일이 많으면 자신의 밥인 강평화에게 어느 정도 일을 떠넘길 수라도 있었지 이곳에는 강평화도 없었으니까.

문득 평화가 생각난 전아라는 이를 물어보았다.

“헌데 평화는 대체 언제 북미왕국으로 온다고 하던가요? 왜국과 아이누인들 간의 분쟁도 모두 끝났는데 굳이 평화가 개척촌에 남아있을 이유라도 있나요?”

전아라의 물음에 정성국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강평화가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개척촌에 남아있었던 이유는 바로 왜국과 아이누인들간의 분쟁으로 인해 개척촌에서 계속 포탄과 총탄을 제작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아라의 말처럼 이미 상황이 끝났으니 굳이 평화가 개척촌에 남아있을 이유는 없었다.

지금까지는 그동안 소모했던 물자들을 보충하고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사용할 물자들을 비축해두기 위해 강평화가 개척촌에 남아서 화약 제조 공방을 운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작년에 보내온 보고서를 통해 어느 정도의 물자를 개척촌과 포로나이에 비축해두었다는 보고를 이미 받았기에 슬슬 그들을 북미왕국으로 불러올 타이밍이라고 생각하긴 했었다.

또한, 이곳 북미왕국에 세운 화약 제조 공방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 만큼 나중에는 이곳에서 만들어 보급하면 그만이니까.

‘북방항로를 쓰지 못하는 겨울에 전쟁이 터지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큰 문제는 없겠지. 그리고 포로나이에도 꽤 많은 물자를 비축해두었다고 들었으니.’

그런 생각을 하며 정성국은 전아라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평화를 불러올 생각이었어. 그리고 개척촌에 남아있는 화약 제조 공방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모두 이주시킬 생각이었고. 그들이 오면 상황이 조금 나아질 거야.”

정성국의 말에 반색하던 전아라는 당장은 의미없다는 생각에 다시 울상을 했다.

“...올해 첫 이주 선단을 통해 도착한다고 해도 빨라야 5월 이후 아닌가요? 당장 사람이 너무 부족한데...”

전아라의 예리한 지적에 잠시 움찔한 정성국이 이내 그녀를 달래기 시작했다.

“내가 관리청장에게 이야기해둘게. 화약 제조 공방에 충원할 인력을 최대한 만들어보라고. 그럼 좀 나아지겠지.”

이에 전아라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 필요한 건 관리급의 인사인데...뭐 없는 것보다는 낫겠네요.”

그러면서도 표정에는 살짝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기에 정성국은 괜히 미안해져서 덧붙였다.

“미안한데 평화가 올 때까지만 조금 버텨줘. 그 이후엔 평화에게 맞기고 아라 너는 조금 쉬자. 그러면서 다른 연구를 조금 하면 되겠지.”

이에 전아라는 피곤한 기색을 지우며 눈을 활짝 뜨고 정성국을 바라보았다.

“정말요?”

그런 전아라를 보고 너무 부려먹지 않았나 잠시 반성한 정성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정성국의 확답에 다시 한번 다짐을 받는 전아라였다.

“약속했어요? 평화가 오면 전 화약 제조 공방에선 손 뗄 거에요?”

“그래. 약속할게.”

다시 한번 확답을 해주는 정성국을 보고 활짝 웃은 전아라가 하얀 들꽃에게 강평화가 오면 당분간은 쉬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연구를 하겠다고 잔뜩 들뜬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정성국은 그런 전아라를 보고 속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분명 약속대로 지금껏 맡아왔던 화약 제조 공방의 일에는 손을 떼겠지만 대신 다른 연구에 투입될 테니 말이다.

‘...북미왕국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지...미안하다.’

그렇게 속으로 전아라에게 미안해하고 있을 때 전아라가 문득 정성국을 보았다.

“아. 그래서 오라버니가 맡기고 싶은 연구는 뭐에요?”

“응?”

정성국이 당황하자 전아라는 그를 보고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따로 맡기고 싶은 연구가 있어서 그렇게 약속한 거 아닌가요?”

“하.하.하.”

이미 전아라는 정성국의 속내를 파악하고 있었다.

다만 화약 제조 공방의 일보다는 다른 연구를 하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하에 기뻐했던 것뿐이었달까.

이에 정성국은 전아라를 무척이나 감격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완전 모범적인 공돌이...아니. 공순이구나.’

“말해요. 궁금하니까.”

이에 정성국은 새로운 종이 개발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새남포에 풍부한 목재 자원을 이용해서 새로운 종이를 만들었으면 한다고.

이를 흥미롭게 듣던 전아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하긴...언제까지 조선에서 한지를 들여올 수는 없지요. 헌데 새남포의 커다란 나무로 종이를 만들 수 있을까요?”

“아마도?”

그러면서 정성국이 알고 있는 목재를 이용해 종이를 만드는 과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설명이 끝나자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하얀 들꽃의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끼어들었다.

“...근데 전하의 설명을 들어보니 오히려 기계장치를 만드는 장인이 맡아야 하는 연구 아닌가요?”

하얀 들꽃의 의문에 전아라 역시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정성국은 잠시 자신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가 기억하기로는 종이를 만들기 위해서 사용되는 원료가 바로 펄프인데 이 펄프의 종류에 따라 종이의 성질이 달라졌다.

그리고 이 펄프는 목재를 기계적 또는 화학적인 처리를 통해 만들었고.

정성국이 빠삭하게 종이 제조에 대한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종이의 원료로 사용되는 펄프의 이름 정도는 몇 가지 기억하고 있었다.

쇄목펄프와 아황산 펄프 등등.

쇄목펄프가 기계식 펄프라면 아황산 펄프는 화학식 펄프일 테고 정성국의 생각에는 펄프의 이름처럼 아황산을 이용해 비 섬유질을 제거해 종이 품질을 올린 것이 아닌가 추측했다.

그렇기에 전아라의 도움이 필요했고 말이다.

이를 자세히 설명하자 하얀 들꽃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고 전아라는 꽤 흥미로운 눈초리로 정성국을 바라보았다.

“종이의 품질을 올리기 위해 비 섬유질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비 섬유질을 제거하기 위해 화학적인 처리가 필요하다는 거군요? 아황산을 사용해서?”

“그렇지. 다만 아라 네 연구와는 별개로 종이 제조에 관한 연구는 따로 진행할 생각이야. 그러니 너무 조바심을 갖고 매달리지는 말고.”

“하지만...종이 문제는 꽤 시급한 상황이지 않나요?”

“그렇지. 다만 말했잖아? 화학적인 처리를 통해 종이의 품질을 올리는 거라고. 그 말은 굳이 화학적인 처리를 하지 않아도 종이는 만들 수 있다는 거니까. 비록 품질은 떨어지겠지만...”

정성국이 알기로는 아무런 화학 처리를 거치지 않은 쇄목펄프를 사용해서 만든 종이가 바로 신문 용지로 사용된다고 알고 있었다.

그 정도만 되어도 못 쓸 물건은 아니었다.

아니. 북미왕국의 상황에선 오히려 딱 맞는 종이였다.

싸게 대량으로 제조가 가능할 테니 말이다.

‘신문 용지로 만든 달력이나 교과서라니...조금 깨긴 하는데 어쩌겠어. 근데 이걸 누구한테 맡기지? 상돈이한테 맡겨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전아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해했어요. 그럼 급하게 연구할 필요는 없겠군요.”

“그렇지.”

“알겠어요. 일단 평화가 오면 모든 업무를 넘기고 천천히 연구해볼게요.”

“그래. 당분간만 좀 고생해줘. 아라도 그렇지만 하얀 들꽃도.”

그러면서 정성국은 어느새 떡국을 싹싹 비운 하얀 들꽃을 바라보고 말했다.

“아니에요. 전 그저 전하의 업무를 도울 뿐인걸요.”

“아니야. 업무를 맡겨봤더니 생각보다 일을 잘하던걸? 그러니 내가 원정을 떠나도 하얀 들꽃이 이곳에 남아 내 업무를 좀 맡아줬으면 좋겠는데.”

정성국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화기애애했던 아침 식사 시간의 분위기가 냉각되었다.

“예?”

“오라버니?”

“응?”

갑작스러운 분위기 반전에 어리둥절하고 있는 정성국을 향해 전아라가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소리죠? 오라버니가 원정을 떠난다고요?”

이에 정성국은 오히려 왜 그러냐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에스파냐와의 전쟁은 예정되어 있잖아? 왜 새삼스럽게?”

정성국의 대답에 전아라는 답답한 표정을 지으면서 언성을 높였다.

“아니.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요. 왜 오라버니가 원정을 함께 떠난다는 거죠?”

“아.”

정성국은 당연히 이번 원정에 따라갈 생각이었는데 전아라나 하얀 들꽃은 정성국이 당연히 이곳 새김포에 남아있을 것으로 생각한 듯싶었다.

물론 굳이 정성국이 원정에 따라갈 필요는 없긴 했다.

북미왕국의 왕이 직접 친정함으로써 병사들의 사기를 조금이나마 올릴 수 있다는 것 외에는.

다만 이번 원정은 북미왕국의 앞날에 무척이나 중요한 만큼 정성국은 꼭 따라가고 싶었다.

만약 이번 원정에 실패한다면 정성국이 생각한 북미왕국의 미래가 어그러져 버릴 테니까.

그렇기에 정성국이 직접 원정에 참여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원정군을 보내고 새김포에서 보고만 듣기에는 이곳 새김포에서 누에바 에스파냐의 가장 중요한 목표인 아카풀코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었으니까.

이를 차분하게 설명했지만 전아라는 이를 납득하지 않았다.

“이번 원정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오라버니의 안전이에요. 헌데 전쟁터로 떠나겠다니요!”

정성국은 차분한 목소리로 전아라를 설득하기 위해 애를 썼다.

“너무 걱정하지 말라니까? 지급 전선이 얼마나 튼튼한데. 저들의 포탄은 쇳덩이라 별다른 타격도 없다고.”

그러면서 정성국은 작년 에스파냐의 교역 선단과 교전했던 일을 자세하게 설명하면서 자신이 지급 전선에 타고 있다면 절대로 안전하다고 강조했다.

그 설명이 끝나자 옆에서 차분히 듣던 하얀 들꽃이 글썽이는 눈망울로 정성국을 바라보았다.

“전하. 꼭 가셔야 하나요?”

하얀 들꽃의 눈빛 공격에 움찔한 정성국은 이내 마음을 다잡고 조심스럽게 하얀 들꽃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이번 원정은 무척이나 중요해. 북미왕국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내가 직접 가야 해.”

그러면서 정성국은 무척이나 반발하는 전아라와 하얀 들꽃을 설득하느라 진땀을 뺐다.

정성국의 고집에 결국 전아라와 하얀 들꽃은 어쩔 수 없이 원정을 허락하는 대신 직접적인 교전을 피하고 후방의 바하칼리포르니아 반도에 건설할 임시 보급항에 머무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정성국은 새해를 맞아 간신히 만든 소중한 휴식 시간을 두 부인을 설득하느라 다 날리고 진이 빠진 표정으로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하아...이거 얘들이 이러는 것을 보면 신하들도 결사반대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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