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허어. 이거 정말 장관이로군.”
“그러게 말입니다. 전하. 그동안 회의를 통해서 알고 있긴 했습니다만...이렇게 직접 보게 되자 감회가 새롭군요.”
정성국은 겨울의 쌀쌀한 바람을 쐬면서 선착장에서 함대를 구성하고 있는 전선들을 바라보고 감탄사를 토했다.
정성국의 눈앞에는 개조가 완료된 지급 전선 8척과 인급 전선 9척이 선착장 바로 앞바다에 포진하고 있었다.
이를 보고 감탄하는 연구청장의 말에 정성국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전선들을 두 눈으로 직접 바라보니 확실히 감회가 새로웠다.
정성국의 걱정과는 달리 연구청에서는 기간 내에 예정된 모든 선박을 개조하고 건조하는 것에 성공했다.
그것도 기간을 단축해가면서.
이는 조선소에서 일하는 일꾼들의 숙련도가 늘어나서 가능해진 결과였다.
이들의 노력 덕분에 그동안 선박이 부족해서 배를 교대해가며 지내왔던 해군 훈련대 소속의 병사들이 모두 배치될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해군을 임시 개편하기로 하고 해군 전투대를 신설하고 해군 훈련대 소속의 지급 전선과 인급 전선 모두를 해군 전투대로 배속시켰다.
덕분에 해군 훈련대는 100톤급의 기선 한 척만 남게 되어 무척 초라해졌고.
다만 해군 훈련대에 속해있던 대부분의 병사 모두가 해군 전투대로 옮겨갔기에 조그마한 기선 한 척으로도 당분간은 병사들을 훈련하는 것은 충분했다.
아무튼, 해군 전투대가 신설된 이후 대규모 함대를 구성하고 합동 훈련을 계획한 군사청장이었고 이를 참관하기로 한 정성국이 일에 치여 바쁜 청장들을 모두 대동하고 선착장에 나왔다.
처음엔 바쁘다면서 슬쩍 투덜거렸지만 직접 함대를 본 후로는 청장들도 함대의 위용에 감탄하기 바빴다.
또한, 묘하게 에스파냐와의 전쟁이 다가오면서 겉으로는 에스파냐를 상대로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이야기하면서도 내심 전쟁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던 몇몇 청장들도 표정이 밝아지는 것이 보였다.
그런 청장들의 반응에 만족한 정성국이 연구청장을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고생했네. 연구청장. 이 광경은 연구청 소속 장인들의 노력 덕분에 탄생한 것이니 말일세.”
“송구하옵니다. 전하.”
말로는 그렇게 이야기하면서도 굉장히 뿌듯한 표정을 짓고 어깨가 올라가는 연구청장이었다.
“그래. 그럼 지금 조선소는 놀고 있는 상황인가?”
웃으면서 이야기한 정성국이었지만 이를 듣던 연구청장은 괜히 움찔하고는 슬쩍 그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게...그동안은 건조 일정을 앞당기느라 무척 고생했기에 적당히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연구청장의 답변에 일단 고개를 끄덕인 정성국이 슬쩍 입을 열었다.
“잘했네. 고생했으면 조금은 쉬어야지. 헌데 언제까지 쉴 셈인가?”
이에 마음속으로 장인들에게 사죄한 연구청장이 포기한 표정으로 정성국을 바라보았다.
“계속해서 쉴 수야 있겠습니까. 다만 어떤 선박을 건조해야 할지 고민 중이라...”
연구청장의 말에 정성국은 별다른 고민 없이 바로 지시했다.
“고민하게 뭐 있나? 인급 전선을 더 늘리도록 하게. 익숙할 테니 더욱 빠르게 건조할 수도 있을 테고.”
이에 연구청장이 의아한 표정으로 정성국을 바라보았다.
“인급 전선을 말입니까? 저 정도 함대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나도 충분할 거로 생각하네. 하지만 만약의 사태를 대비할 필요가 있네. 바하칼리포르니아 반도 최남단에 건설할 임시 선착장의 방어를 생각해보면 전선은 많을수록 좋지. 거기에 전선의 수에 여유가 생기면 일부를 보급품을 나르는 데 써먹을 수도 있고.”
아직 북미왕국 내해에서 물자를 운송하는 선박들은 대부분 인급 전선보다 작은 크기의 기선들이었기에 이를 언급하자 연구청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그렇겠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곧바로 인급 전선을 최대한 추가 건조하라고 지시하겠습니다.”
“그래. 부탁하네.”
그리고 정성국은 군사청장을 바라보았다.
“이대로 외해까지 나가서 2주간 훈련을 한다고? 병사들의 반응은 어떤가?”
“오히려 사기가 굉장히 높습니다. 전하.”
해군이 이 정도로 본격적으로 훈련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까지는 기껏해야 새남포를 오가는 정기선의 호위를 맡는 것이 전부였고 그러다가 에스파냐의 교역 선단과 교전한 것이 전부였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이번 훈련에 대한 병사들의 사기는 무척이나 높았다.
“그래?”
“그리고 저번에 에스파냐와의 교전도 있었고 아직 병사들에게까지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해군 전투대를 신설하고 그곳으로 소속을 옮겼을뿐더러 전선을 건조하고 전선까지 동원해서 남쪽으로 여러 물자를 운송하자 전쟁을 짐작하는 병사들도 꽤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번 훈련에 임하는 병사들의 마음가짐 자체가 다르더군요.”
“그렇단 말이지?”
애당초 사전작업으로 군사청 소속의 병사들에게는 에스파냐에 관한 여러 교육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북미왕국 남쪽에 누에바 에스파냐가 있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었고.
거기에 벌써 두 번이나 북미왕국을 공격했기에 에스파냐에 대한 반감이 꽤 컸고 군사청에서 실시한 교육으로 인해 병사들은 은근히 에스파냐에 복수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특히 원주민 출신의 병사들이 꽤 호전적인 경향을 보이면서 에스파냐를 적대하고 있었고.
어찌 보면 당연하기는 했다.
얼굴도 보지 못한 자들이 멀리서 이 땅을 발견했다면서 자신들이 대대로 살아가던 땅을 자신의 소유라고 예전부터 주장했다고 하니 에스파냐를 도저히 우호적으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거기에 자신들과는 다르게 남쪽에 사는 원주민들은 에스파냐에게 이미 지배당하고 있었으니.
물론 그들과는 아무런 유대관계도 없었기에 그들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만약 정성국과 이주민들이 없었다면 나중에는 자신들도 저들처럼 노예로 살아갈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이러한 교육은 조금은 의도적으로 정성국이 개입한 결과이기는 했다.
물론 정성국이 원한것은 원주민들이 에스파냐를 무조건 적대하는 것이 아니었다.
분명 정성국이 하얀 들꽃과 혼인한 이후로 이주민과 원주민의 갈등이 어느 정도 봉합한 모양새이긴 했지만 언제 또 문제가 불거질지 몰랐다.
이 때문에 교육청에서 더욱 신경 써서 교육하고 있었지만 이미 머리가 굵어진 어른들이 얼마나 생각이 변할까 싶기도 하고.
그래서 철도를 이용해 생각이 굳은 어른들을 흔들었고.
에스파냐를 이용해 북미왕국 내부의 통합을 시도했다.
북미왕국 외부에 호시탐탐 신대륙을 노리고 있는 적이 있는데 서로를 차별하고 배척하는 행위는 북미왕국의 역량을 낮추는 무척이나 매국적인 행위라고 말이다.
그리고 이것을 군사청의 병사들에게 반복적으로 가르쳤다.
북미왕국은 모병제였고 그렇기에 이들은 무조건 병영에서만 지내지는 않았다.
거기에 각자의 가정이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출퇴근하는 병사들이 많았고.
그렇기에 이들만 제대로 교육하더라도 이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그러한 경향이 주변으로 퍼져나갈 테니.
이 때문에 정성국은 이번 훈련이 끝나면 이들에게 대대적으로 휴가를 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군사청장의 말처럼 병사들이 곧 있을 전쟁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다면 당연히 휴가 중에 주변에 여러 이야기를 퍼트릴 테고.
그러면 원주민들을 배척했던 사람들의 태도도 변하거나 최소한 자신의 속마음은 감출 것으로 생각했다.
정성국은 그러한 의도로 군사청장에게 말했다.
“이번 훈련이 끝나면 해군 전투대에 속한 병사들 모두와 바하칼리포르니아 반도의 임시 보급항에 파견될 경비대 소속 병사들에게 장기 휴가를 주도록 하게. 그 이후에는 꽤 바빠질 테니 말일세.”
임시 보급항의 방어 역시 무엇보다 중요한 만큼 이를 지키기 위해 경비대 소속 병사 2천이 함께 이동해 임시 보급항을 방어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들 역시 이런저런 훈련으로 무척이나 바빴고.
이에 군사청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전하.”
* * *
오랜만에 휴가를 얻어 가족을 만나기 위해 새나주에서 이곳 새김포까지 올라온 굳건한 바위, 음흉한 여우, 게으른 곰은 새김포에 도착하자마자 수많은 인파가 선착장에 몰린 것을 보고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 발걸음을 옮겨 선착장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수많은 커다란 선박이 열을 맞추어 이동하는 모습을 보고 다들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리면서 바라만 보다가 함대가 멀어지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게으른 곰이 감탄사를 토해냈다.
“와...저거 장관인데?”
이에 음흉한 여우도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저 광경을 보니 의외로 해군도 괜찮아 보이는데? 꽤 멋있어 보여.”
게으른 곰은 홀린 듯 멀어지는 함대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말도 멋있긴 했는데 저런 커다란 배를 타는 것도 괜찮아 보이네.”
그때 주변에서 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던 굳건한 바위가 입을 열었다.
“저게 해군 전투대 소속의 함대라는군.”
“아. 최근에 생겼다는 그?”
“해군 전투대 창설 기념으로 통합 훈련을 하러 나가는 거라는군. 헌데 어째 병사들의 분위기가...”
그러면서 굳건한 바위가 말을 흐렸지만 이를 음흉한 여우가 받았다.
“아아. 멀리서 본거지만 분위기가 좀...단순한 훈련 같지는 않던데?”
이에 게으른 곰이 슬쩍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정말 에스파냐와 한판 붙을 작정인가 본데?”
조장으로서 이런저런 교육을 받고 또 병사들을 교육하는 위치에 있는 세 사람이었기에 어느 정도 분위기를 파악하고 있었다.
특히 탐사대에서 최근 공을 들이고 있는 푸에블로 부족은 에스파냐의 지배를 받는 상황이었는데 이들과 접촉하기 시작하면서 군사청 병사 전체에게 에스파냐에 대한 적나라한 사실들을 교육하고 있었으니.
이에 굳건한 바위와 음흉한 여우는 침음성을 삼켰다.
“흐음...”
그때 게으른 곰이 다행이라는 듯 투덜거렸다.
“해군의 커다란 배가 멋지긴 한데...어째 해군 전투대라는 이름도 그렇고 죽어라 싸우기만 할 것 같네. 역시 탐사대가 최고인가? 우리는 딱히 에스파냐와 싸울 것 같지는 않던데.”
이에 음흉한 여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이라도 해군으로 소속을 옮겨야 하나? 말을 타고 전투를 벌이며 공을 세울 수 있을 것 같아서 선택한 탐사대였는데 어째...”
음흉한 여우의 말에 게으른 곰은 질색했지만 굳건한 바위는 신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확실히 이름을 생각해보면 탐사대와 해군 전투대는 성격이 많이 다를 것 같긴 해. 하지만 해군 전투대는 임시라고 들었으니 일단 좀 지켜보자고.”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음흉한 여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런 음흉한 여우를 보며 게으른 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거참...이해가 안 가네. 싸우는 게 뭐가 좋다고 소속까지 옮길 생각을 해?”
이에 굳건한 바위가 발걸음을 옮기면서 말했다.
“전사로 살아가고 싶어서 군사청에 소속된 거니까.”
음흉한 여우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굳건한 바위를 따라갔고 혼자 남게 된 게으른 곰이 투덜거리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난 그저 말을 타는 게 멋있어서 들어온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