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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95화 (95/850)

95화

광산촌에서 로하스는 맞은편에 앉아있는 푸른 안개를 보고 북미왕국의 말로 이야기했다.

“제발 전하를 설득할 기회를 주시지요. 아니. 그것이 어렵다면 최소한 이야기라도 전해주시지요. 푸른 안개.”

서로 간의 언어를 배우기 위해 마련한 시간인 만큼 상대방의 언어를 사용해서 대화하고 있었다.

로하스는 북미왕국 말로, 푸른 안개는 에스파냐어로 말이다.

그리고 로하스는 이 시간을 이용해서 푸른 안개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눈치와 분위기를 통해 눈앞의 푸른 안개가 외무청 소속 관리 중에선 꽤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짐작은 했었다.

다만 최근에 이 푸른 안개가 이 북미왕국을 지배하는 국왕의 장인이라는 사실을 외무청 관리들의 대화를 통해 알아채고 무척 놀라기도 했고 또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국왕의 장인 정도 되면 국왕과 직접 이야기를 전달해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때부터 로하스는 푸른 안개와 주로 이야기하며 친분을 다지며 그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글쎄올시다...”

살짝 난처한 표정을 짓는 푸른 안개를 보고 로하스는 기회다 싶어 더욱 열정적으로 설득하기 시작했다.

“우리도 그랬지만 최근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사태는 북미왕국의 존재와 영역을 몰랐기에 발생했던 문제입니다. 만약 이곳에 북미왕국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무의미한 충돌은 없었을 것 아니겠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푸른 안개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흐음...”

그런 반응을 보고 로하스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 에스파냐의 마닐라에서는 매년 교역 선단을 이 신대륙으로 보냅니다. 그리고 이 교역 선단은 매년 북미왕국의 영역을 침범하겠지요. 이런 불필요한 충돌은 우리 에스파냐뿐만 아니라 북미왕국에도 좋을 것이 없습니다.”

계속해서 에스파냐와 대립각을 세우는 것은 이제 막 발전하기 시작하는 북미왕국에도 좋을 것이 없었기에 푸른 안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로하스는 그런 푸른 안개의 반응을 무척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한 발짝 더 나아갔다.

“그리고 계속해서 교역 선단이 행방불명 된다면 분명 본국에서도 이상하게 생각하고 함대를 움직일 겁니다. 그건 우리 에스파냐나 북미왕국 모두에게 몹시 불행한 일이 될 테지요.”

“흠.”

그러면서 슬쩍 푸른 안개를 살피는 로하스였다.

하지만 로하스의 예상처럼 그의 말에도 별다른 걱정이 없어 보이는 푸른 안개를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북미왕국은 우리 에스파냐를 별로 겁내지 않는군. 그럼 아예 숙이는 게 맞겠어.’

“아. 방금 이야기한 것은 북미왕국을 위협하기 위해서 한 말이 아닙니다. 제 의도를 오해하지 마시지요.”

이에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이야기해보라는 푸른 안개의 표정을 보고 살짝 긴장해서 침을 삼킨 로하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캘리포니아 섬에 자리 잡은 북미왕국은 우리 에스파냐와 인접해 있는 이웃 국가라는 점입니다. 이러한 이웃 국가끼리 굳이 피를 흘리며 싸울 필요가 있겠습니까? 북미왕국은 잘 모르겠지만 이곳 신대륙에는 여러 유럽의 세력이 진출해 영역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 에스파냐와 북미왕국의 다툼은 하등 도움 될 것이 없습니다.”

푸른 안개는 담담한 표정으로 로하스를 잠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결국 협상을 위해 에스파냐의 포로들을 모두 풀어달라?”

이에 로하스는 움찔하다 이내 크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하하.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게 어렵다는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 중 일부를 먼저 풀어준다면 누에바 에스파냐로 돌아가 이곳 캘리포니아 섬을 북미왕국의 영토로 인정하도록 부왕을 설득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북미왕국을 모르고 선제공격한 것은 사실이니 그에 대한 사죄의 의미로 몸값을 충분히 지불하도록 하겠습니다.”

로하스는 분명 선제공격한 것은 사실이지만 의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오해로 인해 벌어진 사태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흐음...”

푸른 안개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잠시 생각에 빠진 듯 보였기에 로하스는 내심 초조한 기색을 감추며 앞에 놓여있는 잔을 들어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로하스가 물을 다 마시고 난 뒤에 푸른 안개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회화시간이 다 되었으니 오늘은 이만 일어나겠소.”

이에 로하스는 당황한 표정으로 잠시 바깥을 바라보다가 푸른 안개의 말대로 그새 시간이 끝났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내심 낙담했다.

“아. 그...그러십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더 이야기 하도록 하지요.”

푸른 안개는 방에서 나가기 직전 로하스를 보고 슬쩍 말했다.

“일단 로하스 그대가 한 말을 전하께 전하기는 하겠소.”

“오오!”

푸른 안개의 말에 로하스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고 푸른 안개는 그런 로하스를 보며 덧붙였다.

“하지만 너무 기대하지는 마시오.”

이에 로하스의 가슴은 철렁거렸지만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으음...하지만 북미왕국의 전하는 현명하기로 소문난 분이니만큼 제 의견을 무시하지는 않을 것이라 믿습니다.”

이는 어떻게 보면 도발이나 다름없었기에 푸른 안개는 피식 웃으며 나가려던 몸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분명 전하는 현명한 분이시지. 그러기에 내가 파악한 허점을 모를 리 없고.”

푸른 안개의 말에 움찔한 로하스가 이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물었다.

“허점이라니...갑자기 그게 무슨?”

이에 푸른 안개는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자네가 에스파냐의 고위 귀족이라면 모르겠네만...자네는 그저 함장일 뿐이지. 그것도 이미 죽은 사람 취급을 받는. 그런 자네가 돌아가서 부왕을 설득할 수 있겠는가? 정말로?”

“그건...”

그랬다.

분명 자신이 누에바 에스파냐로 돌아간다면 부왕을 만날 기회는 있을 것이다.

중요하게 보고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만날 수야 있겠지.

다만 부왕을 설득하는 것은 결코 장담할 수 없었다.

거기에 니콜라스의 말에 의하면 누에바 에스파냐의 부왕은 이미 두 번이나 바뀐 후라고 하고 지금의 부왕은 본국에서 새로 임명한 부왕이었기에 로하스와는 면식조차 없었으니.

분명 로하스는 부왕을 최대한 설득해볼 생각이었지만 과연 부왕이 이 원주민으로 이루어진 북미왕국을 인정하겠는가에 대해선 광산촌의 에스파냐인들조차 어렵지 않겠느냐고 생각했으니까.

분명 로하스는 최선을 다해 설득해볼 생각이지만 솔직히 확신은 없었다.

이를 정확하게 지적한 푸른 안개의 말에 망연자실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로하스를 남겨두고 푸른 안개가 광산촌을 빠져나왔다.

* * *

“로하스라고 했나? 광산촌 에스파냐인들의 대표가?”

회의실에서 정성국이 보고를 한 조용한 곰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예전 이주 선단을 공격했던 교역 선단 무리의 총 책임자였습니다.”

“흐음...”

정성국은 조용한 곰이 건네준 로하스에 대한 보고서를 쭉 읽어보면서 입을 열었다.

“북미왕국의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한 다라...그런데 제대로 파악하진 못한 모양이군? 우리가 에스파냐와 전쟁을 준비하는 것은 극비사항이라 그렇다 쳐도 우리 북미왕국의 영역을 캘리포니아 섬으로 생각한다니.”

광산촌의 에스파냐인들이 교류하는 북미왕국의 사람들은 보통 외무청 소속의 관리나 군사청의 병사들이었고 이들은 철저하게 보안 의식에 대해 교육받았었기 때문인지 북미왕국의 정보가 새나가는 것을 최소한으로 막았다.

그렇기에 에스파냐인들은 북미왕국의 현재 영역이 캘리포니아 섬 전역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이에 조용한 곰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전하. 분명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는 하나 아직도 저렇게 착각할 줄은 몰랐습니다.”

“아무래도 저들이 접할 수 있는 정보는 한정되어 있으니까. 흐음...북미왕국의 힘을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다라...그리고 북미왕국의 확장을 경계한다라...”

로하스를 관찰하면서 그에 대한 평가가 적힌 보고서 맨 뒷장을 모두 읽은 정성국이 혼잣말을 하자 조용한 곰이 이를 듣고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인지 로하스는 에스파냐와 우호적인 협상을 하자면서도 북미왕국의 영토를 캘리포니아 섬으로 한정 짓고 싶어 했답니다. 우리 북미왕국이 확장할까 봐 두려운 눈치였다고 푸른 안개가 이야기하더군요.”

이에 정성국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 친구로서는 북미왕국이 신대륙에서 새로운 경쟁자로 등장하는 것을 막고 싶었겠지. 그보다 이 친구는 나중에 써먹을 수 있겠군.”

조용한 곰은 정성국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 말씀은?”

“나중에 에스파냐와 협상할 때 이 친구를 통역으로 사용하는 것이 어떤가?”

이에 조용한 곰은 부정적인 표정을 짓으며 입을 열었다.

“로하스는 에스파냐에 충성스러운 인물입니다. 그렇게 되면 저들에게 어떻게 해서든 우리의 정보를 넘기려고 들 텐데요?”

“그렇지. 그리고 로하스가 알고 있는 정보는 대부분 부정확한 것들이고. 로하스는 우리를 두려워하지.”

그러면서 히죽 웃는 정성국이었고 조용한 곰은 그제야 그의 뜻을 눈치채고 알겠다는 듯 미소지었다.

“아. 그러면 저들이 우리의 힘을 오판할 수 있겠군요. 준비해두겠습니다.”

“그러도록 하게.”

정성국은 고개를 돌려 할 말이 있어 보이는 군사청장을 바라보았다.

“할 말이라도 있나? 군사청장?”

“내년 원정의 보급 문제 때문에 건의할 사항이 있습니다.”

누에바 에스파냐가 북미왕국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협상에 나설 때까지 꾸준하게 누에바 에스파냐의 서해안을 공격해야 하는 만큼 보급이 무엇보다 중요했고 이 때문에 내년에 바하칼리포르니아 반도 남쪽에 임시로 선착장과 요새를 건설할 예정이었다.

헌데 군사청장은 이곳 새김포에서 임시로 선착장을 건설할 지역까지 거리가 너무 멀기에 제대로 된 보급을 위해서는 중간에 미리 보급 물품을 가져다 둘 안전한 항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현재 우호적인 통바 족을 북미왕국에 합류시키고 그들의 영역에 일단 보급 항을 짓고 그곳에서 임시 선착장까지 물품을 옮기는 것이 어떻겠냐고 의견을 제시했다.

“흐음...”

이에 정성국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이곳에서 바하칼리포르니아 반도의 최남단까지는 거리가 꽤 있었기에 보급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럴 바에는 미리 새김포에 준비해둔 물자를 모두 통바 족의 영역에 옮겨두고 그곳에서 바하칼리포르니아 반도에 세울 임시 보급 항을 오가며 물자를 옮기는 것이 나았다.

그리고 스페인 때문에 통바 족을 내버려 두고 있었지만 통바 족이 자리 잡은 로스앤젤레스를 결코 포기할 마음이 없었기에 스페인과 다툼이 끝나면 어차피 항구를 만들 생각이었으니 조금 일찍 만든다고 생각하면 되고 말이다.

이에 정성국은 군사청장의 의견을 받아들여 바로 결정을 내렸다.

“그럼 그러도록 하지. 외무청장. 자네가 나서야겠네.”

정성국의 말에 조용한 곰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전하. 허면 이 기회에 통바 족뿐만 아니라 추마시 족도 북미왕국과의 합류를 권하겠습니다.”

“그러도록 하게. 그리고 개발청장. 자네는 협상이 완료되면 바로 선착장을 건설하도록 하고.”

이에 개발청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전하.”

그리고 정성국은 고개를 돌려 군사청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군사청장은 개발청장을 돕도록 하게. 현재 선박의 여유가 없는 편이니 전선으로 물자를 모조리 실어나르도록.”

이에 별다른 반발 없이 군사청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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