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여름이 끝나갈 무렵 김봉길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정성국은 바로 그를 집무실로 불렀다.
집무실에 들어온 김봉길이 정성국을 보고 웃으면서 인사했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오느라 고생했지? 그래. 가족들은 잘 데리고 왔고?”
정성국이 가족의 안부를 묻자 김봉길은 살짝 감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전하. 그리고 전하께서 제 가족들이 살 관사를 직접 챙겨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아.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군.”
그렇게 잠시 김봉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정성국이 문득 궁금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참. 자네 이곳에 올 때 아이누 섬에 들렀지?”
“그렇지요.”
“허면 혹시 잉글랜드의 사절과의 협상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알고 있나? 아직 자세한 보고가 올라오지 않아서 말일세.”
몇 달 전 김봉길은 북미왕국에 도착해서 홋카이도에 잉글랜드의 사절이 왔었다는 보고를 했었다.
아이누 부족 연합 뒤에 있는 우리와 접촉하기 위해 홋카이도로 직접 배를 몰고 왔었다고.
다만 그때는 협상 전이었기에 잉글랜드의 사절과 접촉할 거라는 보고만 해왔고 그 이후는 차후에 보고한다고 했었다.
그 이후 몇 차례 이주 선단이 새김포에 도착했지만, 그에 대한 보고서는 올라오지 않았기에 정성국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협상에 관해 물어보았다.
이에 김봉길은 무릎을 치면서 곧바로 대답했다.
“아. 이번에 제가 가져온 개척촌에서 보낸 보고서에 그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
이미 협상이 끝났다는 김봉길의 답변에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은 정성국이었고 김봉길은 그런 정성국의 표정을 보고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전하. 짧게 요약하자면 원상이 밀무역으로 풀던 도자기를 교역하고 싶어 왔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원상에서는 일단 시간을 끌 겸 그들이 커피 묘목을 구해오면 교역을 하기로 했답니다.”
정성국은 김봉길의 보고를 듣고 일단은 크게 웃었다.
누가 협상했는지는 몰라도 상황을 절묘하게 이용했기 때문이다.
화폐 발행을 위해 더 많은 귀금속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고 그 때문에 이곳에서도 도자기의 생산을 늘려 개척촌으로 보낼 예정이었는데 참 절묘한 시기에 잉글랜드에서 사절을 보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잘 이용해서 잉글랜드를 통해 커피 묘목을 구할 수 있게 되었고.
도자기가 걸려있으니 잉글랜드는 어떻게 해서든 커피 묘목을 구해오리라 믿었다.
“이거 참.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어차피 이곳에서도 도자기를 생산해 개척촌으로 가져갈 생각이었는데...때맞춰 그 물량을 감당해줄 친구들이 나타나다니.”
이에 김봉길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전하. 덕분에 내년부턴 이득이 더욱 커질 것 같습니다. 특히 하와이에 들르는 천급 함선과는 달리 지급 기범선으로 구성된 이주 선단은 북방항로를 이용하기에 마땅히 가져갈 것이 없어서 빈 배로 돌아가지 않습니까.”
현재 이주 선단 가운데 그나마 조금이나마 이득을 취하는 이주 선단은 천급 함선으로 구성된 이주 선단이었다.
이들은 하와이에 들러 개척촌으로 향했기에 이곳 새김포에서 하와이와 교역할 만한 물건들을 싣고 하와이에 들러 물건을 백단향으로 교환하고 이를 개척촌으로 가져가 이득을 취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북방항로를 이용하는 지급 기범선의 경우는 약간의 모피를 제외하면 거의 빈 배에 가까웠고.
“아아. 그렇지. 그럼 지급 기범선에 도자기를 꽉 채워 아이누 섬에 내려놓으면 되겠군?”
이 말에 김봉길이 자신이 훑어보았던 보고서의 내용을 떠올리고 덧붙였다.
“그렇습니다. 전하. 그리고 원상의 대방께선 아예 포로나이 인근에 만든 원상 전용의 선착장을 북미왕국 전용의 선착장으로 바꾸고 그곳에서 서양 상인들과 직접 교역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도 하더군요.”
이에 정성국은 잠시 안색을 찡그렸다.
“아예 아이누 섬을 공개하자?”
“그렇습니다.”
“흐음...”
잠시 생각해보던 정성국은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홋카이도의 아이누인들을 지원했던 이유가 바로 북방항로의 안전 때문이었다.
헌데 아이누 섬을 공개해 오호츠크해에 서양의 선박들이 드나드는 것은 썩 내키지 않았다.
거기에 서양인들이 해달을 발견하는 순간 눈이 뒤집힐 것이 뻔히 보였다.
현재 해달 모피는 원상에 의해 서양으로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지천으로 해달이 널려있는 섬을 발견하는 순간 서양인들은 눈이 뒤집혀 달려들 것이다.
서양인들이 보기에는 부드러운 금이 사방에 널려있으니 사냥해서 유럽으로 가져가는 순간 부자가 될 테니까.
그리고 아이누 부족 연합은 제대로 된 해군이 없기에 이를 막으려면 결국 북미왕국이 나서서 서양 세력과 싸워야 할 테고.
그건 정성국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건 썩 내키지 않는데? 항로의 안전도 위협받을 수 있고. 아이누 섬 주변에 서양 선박들이 드나드는 것도 내키지 않는군.”
꽤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는 정성국을 보고 고개를 갸웃하는 김봉길이었다.
“그렇습니까? 포로나이에 원상의 선박이 그렇게 많은데 아무리 무도한 서양 선박이라 한들 과연 우리에게 덤비겠습니까?”
이 말에 정성국은 고개를 저었다.
서양인들이 얼마나 탐욕적인가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이거 스페인과의 분쟁이 끝나면 해군 일부를 아이누 섬으로 보내야 할지도 모르겠군.’
그런 생각을 하며 정성국은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네만...일단 이건 원상의 대방에게 편지를 보내 상의를 좀 해봐야겠군.”
“그러시지요. 전하.”
어차피 김봉길은 더는 관계가 없는 이야기였기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주제를 돌렸다.
“전하. 혹시 제가 탈 전선은 정해졌습니까?”
이곳에 도착하면서 천급 함선의 선장 자리에서 물러난 김봉길이 궁금한 표정을 짓자 정성국은 고개를 저었다.
“자네가 탈 전선이 정해지긴 했는데 아직은 개조 중이라네.”
이에 김봉길은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아. 개조면 결국 지급 전선의 함장 자리를 맡게 되는군요?”
그런 김봉길의 반응에 정성국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지. 어찌 되었건 지급 전선이 해군 훈련대 소속 전선 중에선 가장 큰 전선이니 당분간은 지급 전선으로 만족하게나.”
김봉길은 정성국의 대답에서 더 커다란 전선을 만들 계획은 없다는 것을 재확인하고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겠죠. 알겠습니다. 전하. 아. 헌데 내년이면 에스파냐와 붙을 텐데 언제까지 해군 훈련대로 불리는 겁니까?”
김봉길의 의문은 타당했다.
지금이야 훈련만 하는 형편이라 해군 훈련대 소속으로 둔다 하더라도 스페인을 공격할 때도 해군 훈련대 소속으로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이에 정성국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아. 바꿔야지. 다만 당장은 배가 부족해 인원을 교대해가며 배를 타는 실정이라 그렇고...아마 내년쯤에 소속을 바꿀 생각이네.”
“그거 다행이군요. 나중에 역사서에 에스파냐를 공격한 함대가 해군 훈련대로 적힐까 걱정이었는데.”
그러면서 활짝 웃는 김봉길이었고 그런 김봉길을 보며 피식 웃으며 입을 여는 정성국이었다.
“그런 것은 걱정하지 말고 당분간은 가족들과 쉬도록 하게. 자네가 탈 전선이 개조되면 연락할 테니.”
“알겠습니다. 전하.”
* * *
“이제 떠날 생각인가?”
나가사키에 위치한 잉글랜드 상관에서 토마스가 제임스를 보고 묻자 제임스는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쉬었으니 그래야겠죠.”
제임스가 아이누 부족 연합의 섬에서 되돌아온 지도 벌써 한 달이 흘렀다.
제임스와 선원들은 나가사키에 도착한 이후 바람을 기다리며 충분한 휴식을 취했었다.
그리고 토마스는 이들이 편히 쉴 수 있게 도왔다.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좋은 성과를 거두고 돌아왔기 때문이다.
“바로 인도로 향할 생각인가?”
“그럴 생각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제임스를 보고 토마스가 슬쩍 그의 눈치를 살피면서 물어보았다.
“그래. 그럼 언제쯤 이곳으로 다시 올 생각인가?”
이에 제임스는 잠시 턱수염을 매만지면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일단 커피 묘목부터 구할 수 있을지 알아보고 내년 초에 출항하도록 하겠습니다.”
제임스의 대답에 토마스는 조급해지려는 자신의 마음을 가라앉혔다.
토마스가 전해준 북미왕국의 사정을 들어보니 어차피 내년은 되어야 도자기를 교역할 수 있을 거라고 했으니 말이다.
‘저지대 놈들에게 들어갈 물량을 뺏어왔으면 좋았을 텐데...뭐 어쩔 수 없나?’
“그런가? 알겠네.”
그러면서 토마스는 북미왕국의 협상 내용을 되새기면서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허나 조금은 아쉽군.”
갑작스러운 말에 제임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엇을 말입니까?”
“저들이 커피 묘목을 구한다는 것은 저들도 커피를 마시며 문화생활을 즐긴다는 뜻 아닌가?”
“그거야 그렇겠지요.”
제임스 역시 그렇게 생각했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북미왕국에서 커피 묘목을 교역의 조건으로 삼았을 때는 황당했지만 이곳에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이를 통해 북미왕국의 문화 수준이 꽤 높지 않을까 하고 추측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니 커피 묘목보다는 커피를 꾸준히 팔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일세. 중개 무역만 하더라도 꽤 짭짤할 것 같은데...”
이에 제임스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했다.
“흐음...그것도 그렇군요. 이거 제가 실수한 걸까요?”
제임스의 안색이 어두워지자 토마스는 걱정하지 말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니네. 도자기를 교역할 권리만 해도 충분해. 그냥 조금 아쉬웠을 뿐이지. 그리고 우리가 커피 묘목을 가져다준다고 해도 당장 그 커피 묘목에서 커피가 쏟아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다음에 저들과 교역할 때 슬쩍 떠보게.”
토마스의 대답에 제임스가 그나마 안색이 밝아지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생각해보니 일방적으로 도자기를 수입하는 것보다는 저들에게 필요한 것을 팔면서 꾸준하게 교역하는 것이 더 좋겠군요.”
이에 토마스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당연하지. 다만 서로 간의 신뢰가 없으니 일단은 꾸준하게 도자기를 사들이면서 저들에 대해 좀 더 파악하고 나서 교역을 빌미로 북미왕국에 상관을 열면 좋겠지.”
“그렇군요. 그러면 신뢰가 중요하겠군요. 아직 저들의 본거지도 모르니까요.”
“그렇긴 하지. 뭐 대충 어디에 있을지 짐작은 가지만.”
토마스가 덧붙인 말에 제임스는 눈을 크게 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북미왕국이 어디 있을지 짐작이 간다니.
그들과 직접 만난 자신도 저들의 본국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데 어찌 토마스가 짐작한단 말인가.
이에 다급히 토마스에게 묻는 제임스였다.
“짐작이 간다구요? 북미왕국이 어디 있는지?”
당황해서 자신을 바라보는 제임스를 보고 토마스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한쪽에 놓여있는 돌돌 말린 지도를 꺼내 탁자에 펼쳤다.
“자. 보게. 이미 대부분 지역은 탐사되었네. 그리고 북미왕국은 미지의 왕국이지. 그러니 아마 이곳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싶네만?”
그러면서 토마스는 지도에서 이번에 제임스가 다녀온 홋카이도부터 북아메리카의 북서쪽까지 포함하는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렸다.
이를 보고 제임스가 탄성을 내뱉었다.
“아. 생각해보니 그렇겠군요. 으음...그럼 지금처럼 아이누 부족 연합의 섬에서 거래하는 것이 그나마 나을까요? 저 지역에 북미왕국이 존재한다면 너무 먼 것 같은데?”
그러면서 토마스가 가리킨 지역을 손으로 집으며 말하는 제임스였다.
이에 토마스는 제임스를 보고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도 직접 저들의 항구에 상관을 내고 교역할 수 있다면 좋겠네만...그건 자네가 이번 교역을 성공적으로 이룬 후에나 가능한 일이니 부디 부탁하겠네.”
그러자 제임스는 자신 있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알겠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시지요. 내년이면 아마 충분히 공을 세웠다고 본국으로 불러들일지도 모르겠군요.”
“그랬으면 정말로 좋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