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정성국은 주변의 바글바글한 인파를 보고 새김포 인근에 이렇게 사람이 많았나 싶어서 살짝 놀랐다.
“와...이거 사람이 엄청 많은데? 이렇게 많이 몰릴줄은...”
정성국의 혼잣말에 뒤쪽에 서 있던 호위대장이 나서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불편하시다면 주변 사람들을 조금 물릴까요?”
이에 정성국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조금 시끄럽긴 하지만 오히려 북적거려서 보기 좋았다.
그리고 이들을 불러 모은 게 바로 정성국이었다.
아직 북미왕국에는 즐길 거리도, 구경거리도 마땅치 않았다.
그렇기에 구경거리를 찾아 선착장 주변에서 선박을 구경하는 원주민도 꽤 많았고.
그것을 알고 있었던 정성국이 새김포에 슬쩍 소문을 냈다.
오늘 새김포 외곽에서 정성국이 무척 관심을 두고 있는 새로운 기물을 시험 운행한다고.
꽤 볼만할 것이라고 말이다.
다만 정성국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몰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응? 아니. 그럴 필요는 없겠지. 다만 사고 날 수 있으니 경비대원들을 더 배치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전하.”
호위대장이 대답하고 뒤쪽의 호위대원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을 보면서 정성국은 잠시 생각했다.
‘오히려 최대한 많은 사람이 오늘의 광경을 보고 알렸으면 좋겠는데...’
그러면서 정성국은 시선을 철도로 돌렸다.
그랬다.
정성국이 바쁜 와중에 이곳까지 나온 이유가 바로 오늘이 증기기관차의 첫 시험운행을 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증기기관차의 제작은 완료했지만, 이제까지는 시험 노선조차 제대로 깔지 못해 운행해보지는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시험 노선을 다 설치했고 바로 시험운행을 해보겠다는 박기동의 보고에 정성국은 직접 방문해 그 광경을 지켜보는 것을 넘어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앞서 이야기했던 대로 북미왕국의 생활은 단조로웠기에 볼거리가 부족한 것도 있었고 거기에 이 역사적인 광경을 최대한 많은 사람이 보길 원했기 때문이다.
철도는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대표적인 상징 중의 하나였으니 말이다.
‘철도만큼 시대가 변화했다는 것을 확실히 알려주는 것도 없지. 이것을 보고 조선인들도 좀 변화했으면 좋겠는데...’
여기서 정성국이 생각하는 조선인은 현재 조선에서 사는 조선인이 아닌 북미왕국으로 이주한 조선인을 의미했다.
의외로 북미왕국의 구성원 중에 가장 보수적인 집단이 바로 조선인이었다.
물론 모든 조선인이 보수적인 것은 아니다.
조선인의 경우 크게 두 부류로 나뉘는데 하나는 개척촌에서 어느 정도 생활하다 이곳에 온 부류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의 유민으로 화전을 일구며 깊은 산속에서 살다가 원상에 의해 이곳으로 이주한 부류였다.
전자는 기존의 조선인과는 행동이나 생각이 달랐고 그렇기에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기에 원주민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렸고.
후자는 전형적인 조선 사람으로 굉장히 보수적인 편이었다.
처음에는 이들의 행동은 몹시 조심스러웠다.
거기에 이곳에 도착하고 나서 바로 상투를 자르고 복식도 바꾸었기에 정성국은 이들이 이곳으로 오는 동안 조선에서 보기 힘든 커다란 범선이나 기범선을 타고 바다를 건너면서 여러 가지를 깨달았나보다 싶었다.
그리고 배 안에서 이동하는 동안 실시한 기초교육이 이렇게 효과적인가 싶었고.
하지만 아니었다.
이들은 그저 눈치를 보느라, 그리고 이곳에서 배척받기 싫어서 다른 사람들처럼 상투를 자르고 복식을 바꾸었지만, 행동은 조선인 그 자체였다.
그것은 딱히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애당초 이들의 행동을 딱히 강제할 이유도 없었고 애당초 이민 1세대에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풍습을 유지하고 싶다고 해도 정성국은 충분히 이해할 의사가 있었다.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이 원주민을 야인으로 여기며 깔보기 시작하면서 발생했다.
물론 대놓고 원주민을 깔보는 이들은 소수였지만 이들의 전반적인 경향이 그랬다.
이곳을 새로운 조선이라고 생각하고 원주민을 야인으로 여겨 내심 무시하는.
이 때문에 개척단 자체적으로 이런저런 교육을 하곤 했지만 크게 소용이 없었다.
그나마 정성국이 하얀 들꽃과 정식으로 혼인을 올리면서 어느 정도 눈치를 보며 행동을 조심하는 분위기였지만 정성국은 이대로 그냥 내버려 둔다면 훗날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보았다.
이에 정성국은 이들이 가진 고정관념을 부수고 이들에게 시대가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이미 커다란 범선과 기범선을 타고 왔던 이들에게 충격을 줄 수 있는 것을 철도뿐이라고 생각했다.
육중한 몸체의 증기기관차가 하얀 증기를 내뿜으며 힘차게 철로를 달리는 모습을 본다면 이미 시대가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곳이 조선이 아닌 조선과는 전혀 다른 북미왕국이라는 것을 깨닫고 원주민이 북미왕국의 같은 백성이라는 사실을 깨닫기를 바랐다.
이 때문에 예정되었던 시험 노선을 더 길게 설치하고 짐을 싣는 화물 차량이 아니라 사람이 탈 수 있는 객차로 시험운행을 해보기로 했다.
“어? 문이 열립니다.”
호위대장의 말에 정성국이 고개를 돌렸다.
정성국이 바라보고 있던 철로는 꽤 크고 기다란 건물의 안쪽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이 건물의 문이 양옆으로 열리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안쪽에 증기기관차가 보였다.
이미 예열 중이었던지 기차는 굉음을 내뿜으며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아따. 사람 참 많네.”
무언가 볼거리가 있다길래 함께 일하는 동료들을 꼬드겨 이곳에 나온 개똥이는 이미 주변을 가득 메운 인파를 보고 혀를 내둘렀다.
이에 개똥이와 함께 이곳까지 나온 중년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오. 새김포에 있는 사람은 몽땅 나온 모양이오.”
“다들 할 일이 지지리도 없나 보구만.”
사람이 너무 많아 구경하기 쉽지 않겠다고 여긴 개똥이가 퉁명스럽게 이야기하자 중년 사내가 크게 웃었다.
“하하하. 그거야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겠소.”
이에 머쓱한 표정으로 잠시 머리를 긁던 개똥이가 아쉽다는 듯 말했다.
“뭐 전하가 기대하고 있는 기물이라서 한번 보고 싶었는데...이래서야 구경하기 쉽지 않겠네.”
그 말이 끝나자 개똥이와 함께 온 꽤 나이가 들어 보이는 사내가 끼어들었다.
“그러게 말이여. 근데 그게 뭔지는 알려졌나?”
이에 개똥이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저런 말이 있긴 한데 정확히는 모르지. 그게 궁금해서 오자고 했던 건데...”
그때 중년 사내가 손을 들어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 저기 보시오. 전하도 오셨구려.”
이에 개똥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목을 쭉 빼면서 중년 사내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어디요? 어디?”
나이 든 사내가 개똥이를 툭툭 치면서 외쳤다.
“오! 저기 단상 위에 계신다.”
이에 개똥이도 마침내 정성국의 위치를 파악했는지 잠시 바라보다가 의아한 듯 중얼거렸다.
“먼 놈의 단상이 저리 낮고 길쭉하지?”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굉음이 들려왔다.
이에 개똥이뿐만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이 다들 놀라 움찔거리며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이구야.”
“이게 대체 무슨 소리여?”
주변에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잠시 다들 무언가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개똥이 역시 그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개똥이의 시선에는 거대하고도 묵직해 보이는 커다란 물체가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개똥이는 그 광경을 그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같이 온 나이든 사내와 중년 사내의 반응은 달랐다.
“히익! 저게 대체 뭐야?!”
“커다란 쇳덩이가 움직인다?!”
잠시 이동하던 거대한 쇳덩이는 끼익하며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멈췄다.
“윽!”
“저게 대체...”
* * *
정성국은 임시로 만든 승강장에 멈춰선 기차를 바라보았다.
기차는 맨 앞의 증기기관차와 뒤에 객차 12량, 마지막으로 증기기관차가 역방향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 노선은 시험 노선이기에 단선이었고 이 시험 노선 끝부분에도 증기기관차의 방향을 바꿀만한 선로가 없었기에 이런 방식을 채택했다.
“소리가 좀 심하네.”
정성국은 증기기관차가 멈추면서 나는 소리를 듣고 혼잣말을 했다.
“그...그렇군요. 아까의 굉음도 그렇고...정말 시끄러운 녀석이군요.”
호위대장은 찡그린 인상을 풀고 대답했다.
이에 정성국은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렇긴 하지만...꽤 유용한 녀석이지. 자. 그럼 올라타도록 하지.”
그러면서 정성국이 움직이려 하자 호위대장이 다시 안색을 찌푸리면서 정성국의 탑승을 막으려 들었다.
“전하. 꼭 타셔야겠습니까?”
“물론일세.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탈 예정이지 않은가?”
“하지만...”
“걱정하지 말게. 방금 움직인 것을 보아하니 제동장치도 잘 작동하는 것 같고...딱히 큰일은 없을 거네.”
그러면서 객차에 올라탄 정성국이었다.
객차 안은 꽤 비좁고 불편했다.
이는 어쩔 수 없었다.
애당초 정성국이 미리 타겠다고 언질이라도 했다면 최소한 정성국이 탈 객차는 고급스럽게 꾸미기라고 했겠지만, 정성국은 탑승 여부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었다.
다만 최대한 많은 사람이 기차를 타볼 수 있게 임시로 객차를 만들라고 지시했고 그 결과 이렇게 나무 의자가 빽빽하게 놓인 객차가 탄생한 것이다.
‘뭐 상관없지. 기껏해야 5km인데. 그나마 이야기했던 대로 창문을 설치해서 바깥풍경을 볼 수 있으니 뭐...’
제대로 된 노선이었다면 모를까 시험 노선이라 짧았기에 비좁고 불편한 것은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정성국이었다.
정성국이 올라탄 객차에는 정성국과 호위대원들, 그리고 관리들이 탑승했다.
그리고 다른 객차에는 이 기차를 만든 장인들과 이 선로를 깔기 위해 일한 사람들이 탑승했다.
이는 자신들이 노력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제대로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정성국이 객차에 올라타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고 잠시 기다리자 앞쪽에서 다시금 굉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에 객차 안의 사람들은 다들 두려운 듯 웅성거렸다.
정성국의 옆에 앉아있던 호위대장 역시 불안한 표정으로 앉아있다가 기차가 움직이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를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정성국이 이내 시선을 돌려 창문을 통해 바깥풍경을 바라보았다.
철로를 따라 죽 늘어선 사람들이 경악하며 기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속도가 올라감에 따라 사람들의 반응은 더욱 커졌고.
사람들이 기차에 겁먹어 도망치는 모습도 간혹 보였다.
객차 안의 사람들도 기차의 속도가 올라가자 불안한지 눈을 감고 떠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옆에 앉아있던 호위대장은 담력이 꽤 큰 듯했다.
“정말...이 쇳덩이가 이렇게 빠르게 움직이는군요.”
떨리는 목소리로 감탄하는 호위대장을 보고 웃으면서 정성국이 입을 열었다.
“그렇지. 기차는 이 북미대륙에서 아주 중요한 이동수단이 될 거야.”
이에 호위대장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겠군요. 이렇게 많은 사람을 태우고 이렇게 빠르게 움직이다니...이 기차로 인해 북미왕국의 발전이 더욱 가속화되겠군요.”
“그렇지. 그리고 그에 걸맞게 사람들의 생각도 조금은 바뀌었으면 좋겠군.”
정성국이 무슨 의미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눈치챈 호위대장이 잠시 말을 고르다 입을 열었다.
“...당연히 그렇게 될 겁니다. 전하. 이런 육중한 쇳덩이가 스스로 움직이는 것을 본다면 말입니다.”
호위대장의 대답에 정성국은 피식 웃으며 빠르게 바뀌는 바깥풍경을 바라보았다.
점차 속도를 올리던 기차는 얼마 되지 않아 감속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기차가 멈추자 객차 안의 사람들이 일제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정성국은 이를 보고 미소지으며 창문을 통해 기차를 보고 놀라는 표정을 짓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다시 반대편에 있는 증기기관차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출발했던 곳으로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한번 경험해봤다고 조금은 진정이 되었는지 정성국과 함께 탄 관리들은 그나마 눈을 뜨고 바깥풍경을 홀린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길 잠시.
다시 기차가 감속하기 시작했고 정성국은 바깥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환호를 느끼며 부디 조선인들도 개척촌 출신 조선인들이나 오히려 무지했기에 아무런 반감 없이 교육을 받아들이고 빠르게 적응하는 원주민들처럼 변화하길 바랐다.
기차가 멈추고 정성국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직도 다리를 덜덜 떠는 관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자. 빨리들 정신 차리고 내리라고. 그래야 다른 사람들도 타볼 것 아닌가.”
* * *
그 이후로도 기차는 10번 넘게 시험 노선을 왕복하며 수많은 사람에게 시대가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체감시켜 주었다.
그리고 이날 있었던 시험운행은 새김포 주변을 넘어 북미왕국 전체에 무수한 이야깃거리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