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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92화 (92/850)

92화

로하스가 북미왕국의 병사들에게 포로들을 인계받고 자신의 얼굴을 본 후 기겁하며 급히 말을 거는 니콜라스에게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대화를 미룬 뒤 먼저 후엔과 함께 포로들이 쉴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현재 광산촌에 사는 인원은 145명.

여기에 124명이 더해졌으니 비좁을 수밖에 없었다.

해서 주변을 감시하는 경비대원에게 광산촌의 확장을 요청했다.

경비대원은 이미 포로들이 그런 요청을 할 것이라고 예상한 모양인지 흔쾌히 한쪽 목책을 허물고 적당히 확장한 후 다시 목책만 세우면 된다고 이야기해주었다.

이에 로하스는 내일부터 광산촌을 확장하기로 하고 일단 이곳까지 오느라 지친 사람들을 기존에 지어두었던 숙소에 배정해 쉬게 했다.

그 후 로하스는 니콜라스를 자신의 집으로 안내했다.

“로하스. 자네가 살아있을 줄은 몰랐네.”

집 안에 들어오자마자 니콜라스가 그렇게 말했고 로하스는 피식 웃었다.

“죽었다고 생각했었나 보군.”

이에 니콜라스는 침중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다들 그렇게 생각했네. 대양을 건너는 중에 재난을 만났을 거라고. 자네는 능숙한 함장이었으니 고작 해적에게 당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어. 헌데 여기서 볼 줄은 몰랐군.”

“그건 내가 할 말이네. 여기서 자네를 볼 줄은 몰랐는데...후우.”

로하스는 한숨을 내쉬며 자신도 모르게 마른세수를 했다.

이번 사태로 인해 당분간은 외무청의 관리들이 어느 정도 거리를 둘 테니 어쩌면 이것이 누그러지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싶었기에 나온 반응이었다.

니콜라스는 그런 로하스의 반응을 보며 안색을 찡그렸다.

“웬 한숨인가.”

로하스는 초췌한 모습의 니콜라스를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네. 그보다 생존자는 다 온 건가?”

로하스의 말이 니콜라스의 무언가를 건드린 듯 니콜라스는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그렇네. 저들은...저들이 탔던 배도 그렇지만 저들이 사용하는 포탄은 악마의 무기나 다름이 없었어!”

끝에는 절규하는 니콜라스를 보고 로하스는 아직도 자신을 괴롭히는 기억이 떠올라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긴 하지.”

로하스의 반응에 니콜라스는 그를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설마 자네도?”

이에 로하스는 무척이나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마을이 그리 큰 편은 아니지 않은가.”

“...그랬군.”

로하스의 말에 니콜라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지만 아직 손을 벌벌 떨고 있었다.

로하스는 그런 니콜라스의 손을 보고 구석에 놔둔 전에 마시고 남겨둔 술이 담겨있는 병을 들어 니콜라스에게 건넸다.

“자. 이거 마시고 진정 좀 하게.”

니콜라스는 떨리는 손으로 병을 받고 단번에 들이켰다.

“쿨럭. 이거 술인가?”

니콜라스는 로하스를 보고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 로하스가 건네준 것을 물병으로 착각한 것 같았다.

이에 로하스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허. 포로 주제에 술이라니. 그러고 보니 이건 도자기잖아? 하.”

그러면서 다시 병을 들어 술병에 들어있는 술을 모두 마실 때까지 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후우.”

마침내 니콜라스가 술을 다 마시고 조금은 진정된 듯 보이자 로하스가 입을 열었다.

“그래. 진정이 좀 된 건가?”

“미안하군. 며칠 전의 일은 나에겐 너무 악몽 같은 일이었던지라...”

“이해하네. 나 역시 2년 전의 일이 아직도 눈에 선하니까. 하지만 우리도 상황을 자세히 파악해야 하니 설명을 부탁하네.”

니콜라스는 술기운이 도는지 불콰하진 얼굴로 로하스가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모두 해주었다.

처음 멘도시노에 도착해 선단을 정비하고 남하하다 정체불명의 선박을 만나 교전했고, 농락당하듯 깨졌고, 교전이 끝난 후 저들에게 구조되어 포로가 되었다고.

이를 유심히 듣던 로하스는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 한 척이었다고?”

“그래. 정확하게는 두 척의 배였지만 실제로 한 척은 전투 시에는 멀리 떨어져 있었으니. 그 한 척의 배에 산마리아 호와 산티아고 호가 차례대로 격침되고 결국 교역품을 싣고 있던 산미구엘 호도 침몰해버렸지.”

이에 로하스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야 판단을 잘못해 저들의 대규모 선단에 뛰어들었다가 낭패를 보았다지만 니콜라스는 상황이 달랐다.

니콜라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산마리아 호와 비슷한 크기였다고 했다.

결국, 잘해야 500톤급의 선박이라는 소린데 고작 그 한 척을 당해내지 못하다니.

생각외로 북미왕국의 힘이 강력했다.

‘하긴. 그 말도 안 되는 강력한 포탄을 생각해보면 불가능하지도 않지. 그보다 예전에 내가 본 함대가 전부가 아니었다는 거군. 분명 그 함대는 500톤급의 선박은 없었던 거 같은데.’

“흐음...”

로하스가 잠시 생각에 빠졌을 때 니콜라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주절거렸다.

“자네는 이곳에서 오래 머물렀지? 그러니 말해보게. 저들의 정체가 대체 뭔가? 악마의 주구가 아닌 건가?”

이에 로하스는 생각을 멈추고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니콜라스를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소린가?”

“저들의 배는 무척이나 특이했네. 돛도, 노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빨랐어. 거기에 터지는 포탄까지. 이게 말이 되는가?”

니콜라스의 말에 로하스는 처음 섬에 머물다 이곳으로 올 때 탑승했었던 선박을 떠올렸다.

‘분명 특이했지.’

분명 돛도, 노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움직였던 특이한 선박.

그 때문에 이곳에 도착한 뒤로도 저들이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겠냐며 말이 많았었다.

하지만 북미왕국의 실상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아마 그게 저들이 자부심을 갖는 북미왕국의 기술이겠지. 특히 외무청 관리들은 우리 에스파냐를 잘 아는 눈치인데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을 보면 생각보다 더 발전된 곳이 분명해.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협상을 통해 본국으로 돌아가 이곳과 정식으로 교류를 해야 하는데...’

로하스는 본국의 상황을 떠올리며 속으로 탄식했다.

현재 에스파냐의 상황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한때 유럽의 패권을 쥐고 있었던 에스파냐는 30년 전쟁으로 인해 신성 로마 제국과 함께 몰락했고 결국 유럽의 패권을 프랑스, 스웨덴 제국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최근까지 벌어졌던 프랑스-스페인 전쟁은 스페인의 몰락을 유럽 내에 널리 알린 셈이었고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북미왕국은 묘하게 자신의 조국인 에스파냐에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어느 정도 이들의 입장을 파악하고 있는 로하스였다.

북미왕국의 주요 구성원은 이곳 신대륙의 원주민들이었기에 자신들을 침략자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다만 그나마 다행인 것이 그동안 외무청 소속 관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파악하게 된 사실인데 자신들이 점령한 누에바 에스파냐의 원주민들과 이곳 북미왕국의 원주민들은 꽤 다르다는 것이다.

언어도, 생활양식도, 종교도.

그렇기에 로하스는 이들이 누에바 에스파냐의 원주민들을 위해 에스파냐와 적대하지는 않으리라 판단하고 있었다.

다만 북미왕국이 확장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에스파냐와 부딪힐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올 텐데 그것이 더 문제라고 판단했고.

해서 일단은 어떻게든 협상해서 아직 자신을 믿어주고 있는 선원들을 조국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우선이라면 조국으로 돌아간 이후에는 어떻게 해서든지 조국에 북미왕국을 제대로 알려 충돌을 피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교류를 통해 저들의 기술을 얻게 되면 더 좋고.

로하스는 이곳 광산촌에서만 시간을 보냈지만 2년 넘게 외무청 소속의 관리들과 대화하며 꽤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기에 북미왕국의 힘을 조금이나마 추측할 수 있었다.

그리고 로하스가 생각하기에는 북미왕국과 자신의 조국인 에스파냐가 충돌하게 되면 자신의 조국은 결코 북미왕국을 당해낼 수는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30년 전쟁부터 프랑스-스페인 전쟁까지 거의 반세기 가까이 계속해서 전쟁을 치르며 몰락해가던 조국이었다.

그런 조국이 최근 피레네 조약으로 인해 모든 전쟁을 마무리하고 그나마 평화를 유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미왕국과의 충돌은 조국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특히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인해 막대한 세입을 얻을 수 있었던 저지대 지방을 독립시키면서 수입이 줄어든 상황에서 북미왕국과 충돌하게 되면 중요한 수입원 중의 하나인 아시아 무역로가 당분간 사라지는 셈이 되니까.

그렇다고 아시아 무역로를 지키겠답시고 북미왕국과 전면전을 벌일 수도 없었다.

누에바 에스파냐는 그럴 역량이 없고 본국에서 해군을 보내기에는 이곳은 너무 멀었다.

대서양을 건너 남미를 빙 돌아 도착해야 하니 말이다.

그리고 막상 이곳에 도착한다 하더라도 과연 북미왕국의 강성한 해군과 맞서 싸울 수 있겠는가 싶기도 했고.

이는 로하스뿐만 아니라 2년 전 대규모 함대를 목격했던 선원 모두가 내심 동의했기에 로하스는 이곳에 머물고 있는 선원들과 조국을 위해 하루빨리 협상을 통해 조국으로 돌아가기만을 기다렸는데.

이번에도 스페인의 무역 선단이 먼저 북미왕국의 배를 선제공격했다고 하니 일이 제대로 꼬인 셈이다.

이에 로하스는 눈앞의 니콜라스가 살짝 얄미워져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실제로 저들은 그런 굉장한 배와 강력한 무기를 사용하고 있네. 눈에 보이고 이미 경험했던 것을 부정할 생각인가?”

“으음...”

로하스의 타박에 니콜라스는 딱히 할 말이 없었던지 신음만 흘렸다.

이를 보고 로하스는 다시 니콜라스를 재촉해 그 이후의 일을 캐물었다.

그리고 탄식했다.

“젠장. 이곳이 우리 에스파냐의 영역이니 선제공격한 것이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정말 그렇게 말한 건가?”

“그랬네.”

그제야 로하스는 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망했군. 당분간은 돌아가기 힘들겠어. 다만 이 일로 북미왕국이 본국을 적대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이런 로하스를 보고 니콜라스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왜 그러는 건가?”

로하스는 그런 니콜라스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지금껏 서로 언어를 배우며 조금씩 저들을 파악하고 있었다고.

그리고 협상을 통해 조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고.

헌데 갑자기 상황이 바뀌었다고.

그 정도 설명하자 니콜라스도 알아듣고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럼 우리 때문에 협상은 어려워졌겠군.”

“아마도.”

이에 니콜라스는 로하스를 보고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자네들의 귀환을 막게 되었으니 미안하군.”

로하스는 그런 니콜라스를 보고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솔직히 우리가 인디언들을 대하는 것과는 다르게 이들은 우리를 가혹하게 대하지 않네. 그렇기에 이곳에서 지내는 것도 나쁘진 않아. 여자가 없다는 것만 제외하면 말이지. 하지만...문제는 이번 사태로 북미왕국이 우리 조국을 적대시하고 충돌할까 그게 두렵네.”

“으음...”

로하스의 말에 니콜라스는 이곳에 오면서 보았던 선착장에 정박하고 있는 선박들을 떠올리고 자신도 모르게 신음했다.

자신이 경험했던 기괴한 선박보다 큰 선박도 꽤 많았고 이들이 일제히 남하한다면 누에바 에스파냐의 서해안은 초토화가 될 것이 분명했다.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조국이 막대한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더욱 심각해진 표정을 한 니콜라스가 떨리는 눈동자로 로하스를 바라보았다.

“어쩌지? 저들을 진정시킬 방법이 있나?”

이 물음에 로하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글세...최소한 기회는 있네. 서로의 언어를 배우기 위해 매일 저들의 관리와 대화하고 있으니 말일세. 그때 어떻게 해서든지 저들을 진정시키고 설득해봐야지.”

이에 니콜라스는 로하스를 간절하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부디 자네가 저들을 설득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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