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이것으로 포로들에 대한 처리를 끝낸 정성국은 고개를 돌려 군사청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군사청장.”
“예.”
“전투에 대한 분석은 다 끝났나?”
“그렇습니다. 전하.”
그러면서 군사청장이 정성국에게 보고서를 조심스럽게 올렸다.
정성국은 잠시 보고서를 살펴보았다.
보고서에는 전투가 어떤 식으로 흘러갔는지, 당시 전투를 지휘했던 인급 전선의 이정운 함장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가 자세하게 쓰여 있었다.
이를 쭉 읽어본 정성국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흐음...단지 배만 믿고 들이댄 것이 아니었군?”
보고서를 읽고 정성국이 만족스러워 한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물론 이 시대의 전장식 함포가 그렇게 위력적이지는 않았다.
거기에 생각외로 배는 단단했고 어느정도 파손된다 한들 바다에 떠있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그래서 단순히 쇳덩이를 날려 상대의 배를 침몰시키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이 시대의 해전은 적 함선을 격침하는 것보다는 선원이나 상대 함포를 공격해서 적의 저항을 침묵시키는 방향으로 전투가 진행되었고 말이다.
거기에 북미왕국의 전선은 방어력을 더욱 보강한 상태였기에 그냥 들이대었어도 어쩌면 적의 함포를 충분히 견뎠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방어력을 보강했다고 한들 가뜩이나 함포 수에서 월등히 밀리는 상황에서 가까이 붙어 적 포격을 견디면서 싸우는 것은 자신들에게 좋을 것이 없다고 판단한 이정운 함장은 인급 전선의 속도를 최대한 활용했다.
적들의 측면에 위치한 함포가 발사된 이후 속도를 올려서 적 선단과 거리를 두며 이동해 결국 적들이 역풍을 받으며 다가올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그리고 한 척씩 침몰시켰고.
호위함으로 추정되는 두 척이 침몰하고 나자 남은 한 척이 배의 방향을 돌려 도주하려 했지만 쫓아가서 마무리했다고 쓰여 있었다.
즉 이정운 함장은 바람에 상관없이 일정하게 속도를 낼 수 있는 기선의 장점을 십분 활용해 전투를 유리하게 이끈 것이다.
이를 거론하자 군사청장 역시 기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더군요. 이정운 함장이 인급 전선의 속도와 기선이라는 장점을 잘 이용한 것 같습니다.”
정성국 역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며칠 전 자신의 칭찬에 감격하던 이정운 함장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이정운 함장이라...용감할 뿐만 아니라 꽤 영리하군.”
“그렇습니다. 전하.”
정성국은 회의실 탁자 위에 놓여있는 보고서를 톡톡 건드리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동안 오로지 훈련만 해왔던 해군 훈련대 소속의 함장들에게 이 보고서는 무척 중요한 교육 자료라 할 수 있었다.
“이 보고서는 해군 훈련대 소속 함장들에게 꼭 보여주도록 하게. 함장들의 교육이 무엇보다 시급하니 말일세.”
군사청장도 이에 동의하는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전하.”
“아. 그리고 이정운 함장을 비롯한 이번 전투에 참여한 인급 전선의 병사들에게 포상은 내렸지?”
정성국의 확인에 군사청장은 이미 정해진 포상을 내렸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전하.”
정성국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그 옆에 앉아있던 연구청장을 바라보았다.
“그래. 전투를 치뤘던 인급 전선의 상태는 어떻던가?”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적 함포에 맞아 찌그러진 부분과 그 안쪽에 눌린 목재를 교체하면 그만인지라...”
“그래? 그럼 수리는 금방 하겠군?”
“물론입니다. 그 정도야 금방이지요.”
큰 문제 아니라는 듯 대답하는 연구청장을 바라보며 정성국은 혹시나 해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럼 지급 전선의 개조는 차질없이 진행되는 거겠지?”
이에 연구청장은 정성국이 무엇을 걱정하는 것인지 파악하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예정대로 내년 초까지 지급 함선을 모두 지급 전선으로 개조하고 인급 전선 역시 모두 건조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 믿도록 하지.”
정성국은 믿는다는 듯 연구청장을 바라보고 다시 군사청장을 바라보았다.
“군사청장. 연구청에서 전선은 확실히 마련해준다고 하는데 이를 운용할 병사들의 훈련 상태는 어떻지?”
정성국의 물음에 군사청장 역시 자신 있게 대답했다.
“작년부터 병사를 모집해 훈련하는 중이고 이번에 전투에 참여한 인급 전선의 병사들 역시 작년에 모집한 병사들이었으니 훈련 상태는 완벽하다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전하.”
“그래?”
제대로 된 해군을 키우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알고 있었기에 살짝 걱정했던 정성국이었지만 생각해보니 군사청장의 말마따나 이번에 전투에 참여했던 인급 전선에 탄 병사들 대부분은 작년에 모집했던 병사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충분히 제 역할을 해 주었고.
이에 정성국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자 군사청장이 덧붙였다.
“예. 또한, 지금도 교대로 배를 운용하고 있는 만큼 연구청에서 배를 건조하는 즉시 배를 운용할 수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지요.”
작년에 모집한 병사들은 모두 해군 훈련대 소속으로 만들어 훈련시켰기에 당장 훈련용으로 사용할 전선조차 부족한 상황이었다.
해서 초기엔 유일한 전선인 지급 전선을 가지고 훈련했었고 인급 전선이 건조되기 시작하면서 현재는 한 척의 전선에 2배수로 인원을 배정해 교대로 전선을 운용하고 있었기에 이를 거론하는 군사청장이었다.
“흐음...알겠네. 그리고 외무청장.”
“말씀하시지요. 전하.”
“푸에블로 족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
이에 조용한 곰은 이 시점에서 푸에블로에 관한 이야기를 묻는 정성국의 뜻을 파악하고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었다.
“전에 이야기했던 대로 통바 족으로 정체를 위장해 소금으로 교역하면서 지속해서 접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푸에블로 족이 에스파냐에 불만을 품도록 은근슬쩍 종교에 관해 거론하고 있고요. 다행히 어느 정도 효과는 있다고 합니다.”
“그래? 흐음...”
“예. 저들이 지속해서 자신들의 종교를 강요하고 있으니까요. 다만 의도를 숨기기 위해 은근슬쩍 이야기할 뿐이라 당장 저들이 에스파냐에 반발하거나 봉기할 거라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덧붙이는 조용한 곰의 말에 정성국은 손을 내저었다.
“아아. 지금처럼만 하게. 그 정도면 충분해. 다만 내년에 우리가 에스파냐를 공격할 때쯤에 슬쩍 정보를 흘리면 되겠지.”
“그렇겠지요. 알겠습니다. 전하.”
그것으로 푸에블로 족에 관한 이야기를 마무리한 정성국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년에 누에바 에스파냐를 공격하면 어떻게 해서든 텍사스 지역까지 확보해야 하니...이를 지킬 군사들이 필요하긴 한데...’
현재 군사청 소속의 병사 수는 1만에 가까웠지만, 비율로 따지자면 오히려 해군에 속한 병사들이 더 많았다.
이는 어느 정도 정성국이 의도한 바이기는 했다.
정성국은 스페인과 전쟁을 하더라도 일방적으로 누에바 에스파냐의 서해안을 공격할 생각이었지 직접 상륙하거나 새나주를 통해 누에바 에스파냐의 내륙을 공격할 의사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미 푸에블로에 씨앗을 뿌려 두었으니 훗날 열매를 맺고 이를 취하려면 저들을 도와줄 병사들이 필요했기에 다시 군사청장을 바라보았다.
“군사청장.”
정성국의 부름에 군사청장은 곧바로 대답했다.
“예. 전하.”
“추수 이후에 병사를 모집하도록 하게.”
“얼마나 모집할까요?”
이에 잠시 정성국은 생각에 잠겼다.
‘지금 육군은 4천 정도이긴 한데...이들을 밖으로 뺄 수는 없고. 나중에 푸에블로를 아파치 족이나 나바호 족에게서 보호하려면 최소 2천은 있어야 할 테고...텍사스 지역에도 곳곳에 병영을 짓고 머물 것을 생각해보면...’
잠시 머릿속으로 계산하던 정성국이 입을 열었다.
“흐음...넉넉잡아서 5천?”
“알겠습니다. 미리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군사청장이었는데 그동안 매년 이맘때쯤 병사를 모집했었기에 이미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모양이다.
오히려 더 많은 병사를 모집할 줄 알고 긴장하고 있다가 정성국의 말이 끝나자 다행이라는 표정이었으니.
“그래 주면 고맙겠군.”
* * *
광산촌의 한 건물 안에서 로하스와 후엔은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대표님. 요새 저들의 분위기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음? 자네도 그리 생각하나?”
로하스는 후엔의 말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로하스와 후엔은 매일 한 시간씩 외무청 소속의 관리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의 언어를 배우고 있었다.
헌데 요사이 외무청 소속의 관리들이 묘하게 차가운 느낌이라 의아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후엔 역시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니.
“역시...저만 그렇게 느낀 것이 아니군요?”
“그래. 묘하게 거리감이 느껴진다고 해야할지...차갑다고 해야할지...”
그때 갑자기 마을 밖에 무척이나 부산해지는 것이 느껴져 슬쩍 창문을 통해 바깥을 바라보자 광산촌 입구로 북미왕국의 병사들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이를 보고 로하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음? 아직 보급이 올 시기는 아니지 않나?”
“그러게 말입니다.”
최근에 보급을 받았기에 아직 물자 보급이 올 시기는 아니었다.
해서 마찬가지로 후엔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면서 건물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북미왕국의 병사들 뒤로 백인들이 줄줄이 걸어오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아니...저건 대체...”
“맙소사...설마?”
로하스와 후엔은 포로로 보이는 백인들을 보고 직감했다.
왜 외무청의 직원들이 최근 차가워진 것인지.
“아무래도...북미왕국이 공격받은 모양이군. 그래서...”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로하스였고 후엔은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예. 그래서 갑자기 저들의 반응이 차가워진 거겠죠. 상황을 보건데 저들도 우리 에스파냐인이겠지요?”
“아마 그렇지 않겠나. 후우.”
로하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왜 하필 이런 타이밍에 이런 일이 발생했단 말인가.
슬슬 말이 통하고 최소한의 희망이 생겨 기뻐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렇게 한숨을 푹푹 내쉬며 현 상황에 좌절하고 있던 로하스의 귓가에 후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저 친구는 니콜라스 아닙니까?”
“응?”
로하스는 후엔이 가리킨 사람을 바라보았다.
갈색 머리에 탄탄한 체구의 사내.
로하스와 친분이 있던 니콜라스였다.
그리고 로하스는 니콜라스를 보자마자 모든 상황을 이해했다.
“맞군. 니콜라스. 젠장. 니콜라스는 산티아고 호의 함장이었으니 아마 우리하고 비슷한 상황이었겠군.”
이에 후엔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시기를 생각해보면 교역 선단이 이곳을 지날 시기군요. 그리고 우리처럼 북미왕국의 선박을 만났을 테고...”
“우리처럼 해적으로 생각하고 공격했겠지. 결과야 뭐...”
기본적으로 마닐라에서 출항하는 교역 선단은 최소한 3척의 갤리온이 선단을 구성해 이동한다.
즉 대충 짐작하더라고 600명에 가까운 에스파냐인들이 갤리온에 타고 있었을 것이다.
헌데 로하스의 눈앞에 보이는 포로들은 기껏해야 100명이 조금 넘는 정도.
나머지는 교전하던 중에 사망했거나 구조되기 전에 죽었다는 뜻이었고 이는 로하스의 예전 기억을 자극했다.
멋모르고 덤벼들었다가 깨졌던 예전 기억을.
이에 우울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로하스는 자신이 이 광산촌의 대표라는 것을 자각하고 입을 열었다.
“일단 가세. 저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는 니콜라스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