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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90화 (90/850)

90화

“맛있네. 역시 더운 여름에는 수박이 제일 낫긴 해.”

“그렇죠?”

‘좀 미지근한 것이 불만이긴 한데...어쩔 수 없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정성국은 하얀 들꽃이 가져온 수박을 입에 넣었다.

그나마 수박을 자르기 전에 물에 넣어두어 온도를 낮추긴 했다지만 냉장고에서 갓 꺼낸 시원한 수박을 기억하는 정성국으로선 아쉬울 수밖에.

정성국은 수박을 마저 먹으며 옆에서 함께 수박을 오물거리고 있는 하얀 들꽃을 바라보았다.

하얀 들꽃은 혼인한 이후에도 그동안 해온 것처럼 정성국의 곁에서 일했다.

다만 예전처럼 각 청을 오가며 정성국의 심부름을 하기보다는 정성국의 곁에서 업무를 돕는 방향으로.

이는 북미왕국은 일손이 워낙 부족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하얀 들꽃처럼 능력 있는 여성을 그냥 관사에 처박아 둘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리고 하얀 들꽃 역시 그냥 관사에서 정성국을 기다리며 시간을 보낼 수동적인 여인은 아니었고.

거기에 북미왕국의 첫째 왕비라고 할 수 있는 전아라 역시 일하느라 바쁜 상황이었으니.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집무실의 문을 급하게 두드렸다.

“음? 들어오게.”

정성국의 허락과 함께 문이 벌컥 열리면서 호위대장이 집무실로 들어와 보고했다.

“전하. 선착장에서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무슨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짓는 정성국에게 호위대장이 당황스러운 얼굴을 하며 대답했다.

“새남포로 향하던 정기선이 에스파냐 선단에 의해 공격받았다고 합니다.”

“뭐라고?”

* * *

“허어...”

정성국은 선착장에서 전투를 치른 흔적이 남아있는 인급 전선을 바라보았다.

인급 전선 갑판 위에 존재하는 상부 구조물 곳곳에는 총탄의 흔적이 보였고 선박 측면에는 쇳덩이로 된 포탄을 맞은 듯 움푹 들어간 흔적이 보였다.

그리고 인급 전선 옆에는 새김포와 새남포를 오가는 정기선이 보였다.

정기선은 다행스럽게도 공격받은 흔적은 없었다.

다만 정기선 주변은 몹시 북적거렸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포로로 짐작되는 축 늘어진 모습의 백인들이 경비대원의 명령에 따라 하나둘 정기선에서 내리고 있었다.

이를 잠시 바라보고 있을 때 주변에서 상황을 통제하고 있던 경비대원과 인급 전선의 함장이 정성국에게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전하.”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급 전선 함장의 인사를 받아주고 입을 열었다.

“그래. 에스파냐 선단에 의해 공격을 받았다고? 자세한 상황을 설명해보게.”

“알겠습니다. 전하.”

이주 선단의 선박들은 최소한의 방어를 위해 화포로 무장했지만, 정기선의 경우는 상황이 달랐다.

정기선은 아무런 무장을 하지 않았다.

이는 화포와 포탄의 관리 문제도 있었고 화포를 운용할 뱃사람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다만 내해 안에서 도시를 연결하는 정기선과는 달리 새김포와 새남포를 오가는 정기선의 경우는 운이 없다면 이번처럼 스페인의 무역 선단과 마주칠 수 있었기에 정성국은 최소한의 조치로 해군 훈련대 소속의 전선을 움직여 정기선을 호위하도록 했다.

내해를 순찰하거나 정박해서 훈련만 하던 해군 훈련대는 이 명령을 반길 수밖에 없었고.

새남포로 정기선이 출항할 때마다 해군 훈련대 소속의 전선이 돌아가며 호위를 하곤 했다.

그리고 이번 항해의 호위는 정성국의 눈앞에 보이는 이 인급 전선의 차례였고 말이다.

“그러니까 이곳에서 출항해 새남포로 향하는 도중 북쪽에서 범선이 보였다고?”

“그렇습니다. 전하.”

오랜만에 장기 항해를 한다는 것에 들떴던 병사들은 항해 도중 북쪽에서 다가오는 범선으로 구성된 선단을 발견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이주 선단인 줄 알았으니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이주 선단 같지가 않았다고 한다.

단 3척으로 구성된 선단이기도 했고 범선이었으며 배의 크기도 제각각이었으니 말이다.

해서 인급 전선의 함장은 곧바로 정기선에 신호해서 거리를 벌리게 하고 인급 전선 혼자서 남하하는 정체불명의 선단에 조심스럽게 접근했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 정도 가까워졌을 무렵 남하하던 선단의 일부가 배의 방향을 틀어 측면을 보이며 포문을 열고 먼저 공격했다고 했다.

“잠깐. 저들이 먼저 화포로 선제공격했다는 소리지?”

“그렇습니다. 전하.”

이 보고에 정성국은 누에바 에스파냐를 선제공격할 명분으로는 충분하다 싶었다.

벌써 두 번이나 공격받은 셈 아닌가.

“흐음...그래서?”

이에 인급 전선의 함장은 자부심 어린 표정으로 당당하게 대답했다.

“다행히 거리가 있었기에 초탄은 모두 빗나갔습니다. 다만 적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곧장 전투태세에 돌입했고 전투 끝에 결국 적 선단을 모두 격침했습니다.”

함장의 보고를 다 듣고 정성국은 환하게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감탄했다.

“허어. 단 한 척으로 3척으로 구성된 선단을 말이지? 고생했네. 함장.”

이에 함장은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당당하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전하. 적들보다 튼튼한 전선과 강력한 화포로 무장했는데 무엇이 힘들겠습니까.”

함장의 대답에 문득 원균이 떠오른 정성국은 고개를 저으며 함장을 칭찬했다.

“아닐세. 겁먹지 않고 저들과 맞서 싸웠기에 얻을 수 있는 승리였지. 함장이 상황을 적절하게 판단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어. 정말 잘했네. 그래서 그 후는?”

함장은 정성국의 극찬에 오히려 민망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크흠. 저들의 선박을 모두 격침한 후 전투를 마무리하였고 바다에서 구조를 원하는 자들을 구해 포로로 삼았습니다. 포로의 수가 많아 정기선에도 태웠고요. 그리고 포로들의 처리 문제와 보고 때문에 회항을 결정했습니다. 아. 포로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미루어 짐작하건데 이들은 에스파냐인들로 추정됩니다.”

“아아. 뒷처리도 잘했군. 알겠네.”

그러면서 다시 한번 눈앞에 있는 함장의 어깨를 두드리며 칭찬했다.

그러면서 가까이 다가간 정성국은 잠시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물었다.

“피해는?”

이에 함장은 밝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다행스럽게도 별다른 인명피해는 없습니다. 전하.”

혹시나 해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던 정성국은 함장의 대답에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분명 포탄에 맞은 흔적도 보이는데 인명피해가 없다는 것은 그만큼 인급 전선이 튼튼하다는 의미였으니 말이다.

“그거 정말 다행이군. 보아하니 적의 포탄을 맞은 것 같은데.”

“그렇습니다. 전하. 총 4발의 포탄을 맞았습니다만 별다른 인명피해는 없었습니다.”

함장의 보고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충 들은 것은 다 들었다고 생각해 함장에게 말했다.

“그래. 고생했네. 일단 전투를 치렀으니 당분간은 쉬도록 하게. 그리고 자네를 비롯한 이번 해전에 참여한 인급 전선에 타고 있던 모든 병사에게 적당히 포상을 할 테니 알리도록 하게.”

“감사합니다. 전하.”

함장은 밝은 표정으로 물러났고 정성국은 함장 뒤편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비대원에게 물었다.

“그래. 포로들은 몇 명이나 되는지 파악했나?”

“총 124명입니다. 전하.”

생각보다 많은 포로에 살짝 놀란 정성국은 이내 명령을 내렸다.

“꽤 많군. 일단 저들을 제대로 씻기고 저들을 감시하도록 하게. 그리고 곧 외무청 관리들을 보낼 테니 그들을 돕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전하.”

정성국은 멀리서 에스파냐인으로 추정되는 포로들을 바라보다 이내 집무실에 쌓여있는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곧장 돌아갔다.

* * *

외무청에서 포로들의 심문이 끝났다는 소식에 정성국은 청장들이 참석하는 회의를 소집했다.

회의가 시작되고 정성국은 곧장 외무청장인 조용한 곰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 심문은 다 끝났나?”

“그렇습니다. 전하.”

“그래. 저들의 정체는 뭐라던가?”

“전하께서 예상하셨던 대로입니다. 마닐라에서 출항한 에스파냐의 교역 선단이라고 하더군요.”

교전이 일어났던 장소와 저들이 남하하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스페인의 선단일 것이라 예상했었기에 정성국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외에는?”

“광산촌의 포로들과 비슷한 이야기를 하더군요. 해적인 줄 알고 공격했다고.”

조용한 곰의 대답에 정성국은 콧방귀를 뀌었다.

“흥. 그걸 변명이라고 하던가? 선제공격은 저들이 먼저 했다면서?”

그러자 조용한 곰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에스파냐인의 변명을 그대로 전했다.

“저자들의 이야기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선박이 접근하길래 해적이 약탈을 위해 접근한다고 생각해 방어했을 뿐이랍니다. 거기에 이곳은 자신들의 영역이기에 에스파냐의 선박으로 보이지 않은 우리 인급 전선을 선제공격한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더군요.”

이에 청장들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다만 정성국은 오히려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조용한 곰에게 물었다.

“저들도 이곳에 오면서 새김포를 봤을 텐데? 그런데도 그런 주장을 했다고? 이곳이 자신들의 영역이라고?”

이에 조용한 곰이 슬쩍 웃으면서 대답했다.

“일단 알려지기는 북미 땅이 자신들의 땅이라면서 원칙적으로는 자신들의 잘못이 아니라고 주장하더군요.”

이에 정성국은 저들의 속셈을 깨닫고 피식 웃었다.

저들은 고작 인급 전선 한 척을 당해내지 못하고 패배해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 이곳에 오면서 정박해있는 다른 인급 전선들과 지급 전선들을 보았으니 잘못 건드렸다 싶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책임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그리 주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뒷받침해주듯 조용한 곰이 덧붙였다.

“그리고 이런 사태가 발생한 것에는 우리 북미왕국의 책임도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우리 북미왕국이 알려지지 않아 문제가 생겼다고 말입니다.”

조용한 곰의 말을 듣고 청장들이 화를 내기 시작했다.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 어찌 먼저 공격해놓고 자신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냐면서.

다만 정성국은 오히려 저들이 뭐라고 했는지 궁금해 물어보았다.

“그래서? 자신들은 책임이 없다?”

“이곳의 원주민들이 국가를 이루고 있는 것은 몰랐기에 벌어진 일이라면서 자신들을 풀어달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피식 웃는 조용한 곰이었고 청장들은 무척 분노해 에스파냐를 성토하기 시작했다.

이를 잠시 지켜보던 정성국은 책상을 두드려 청장들을 진정시켰다.

“진정들 하게. 어차피 내년이면 지금처럼 우리 북미왕국을 무시하지는 못할 테니. 그건 그렇고 다른 보고할만한 내용은 없나?”

고개를 젓던 조용한 곰이 마침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예. 딱히 없습니다. 전하. 아. 저들을 통해 누에바 에스파냐의 정보를 수집해본 결과 누에바 에스파냐의 부왕이 바뀌었다고 하더군요.”

“그래?”

“그렇습니다. 전하. 안토니오라는 고위 귀족이 부왕의 자리에 올랐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정성국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군주를 대리해 식민지를 다스리는 부왕은 본국과 멀리 떨어져 있는 만큼 식민지를 사유화할 우려가 있었고 이 때문에 오랜 기간 식민지를 통치하게 내버려 두지 않았으니 말이다.

“뭐 식민지의 부왕이야 자주 바뀌는 편이니. 일단 알겠네. 다른 보고할 사항은 없고?”

“그렇습니다. 전하.”

이에 정성국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결정을 내렸다.

124명의 새로운 일꾼이 생겼으니 잘 써먹어야 하지 않겠나.

“그럼 포로들은 모두 광산촌으로 보내 일을 시키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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