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정성국은 이주 선단이 곧 떠난다는 소식에 김봉길을 배웅하기 위해 선착장으로 나갔다.
선착장에서 이주 선단의 출항을 준비하던 김봉길은 선착장까지 배웅하러 나온 정성국을 보고 웃으며 다가가다가 정성국의 안색을 살피고 살짝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째 전하의 안색이...정말 다음에 올 때 해구신 좀 구해올까요? 아니면 다른 보약이라도 좀?”
이에 정성국은 표정을 확 구기며 손을 내저었다.
“됐네. 이 사람아. 그것보다 보고서를 읽어보았는데 생각외로 하와이에서 가져간 백단목이 조선에서 비싸게 팔렸더군?”
작년에 김봉길의 요청으로 하와이 제도에 오하우 섬의 원주민과 교역을 시작했다.
이곳 북미왕국과 오하우 섬에 사는 원주민 간의 교역이라기보다는 이곳에서는 저들과 교역할 물자를 싣고 가서 오하우 섬에서 가져간 물자로 백단목을 베어 동아시아로 가져가는 교역이었다.
이 교역은 이주 선단이 매번 빈 배로 돌아가는 것이 아쉬워 시작한 교역이었는데 김봉길이 건네준 보고서에 따르면 이 백단목으로 인해 많은 수익을 올렸다고 적혀 있었다.
“그렇습니다. 전하. 애초에 청나라로 가져가서 팔 생각이었는데 조선에도 의외로 수요가 좀 있어서 팔다 보니 청나라로 가져가기도 전에 다 팔려버렸습니다.”
김봉길의 대답에 정성국은 살짝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뭐 양반들이 돈이 없지는 않으니까.”
“그렇지요. 하지만 대방 어르신이 그러더군요. 당장은 조선에서 팔아도 충분히 이득을 보겠지만 나중에는 결국 청에 가져다 팔아야 할 것이라고요.”
“그럴걸세. 돈 있는 양반의 수는 한정되어 있으니 말일세.”
지금이야 백단목을 찾는 사람이 많다지만 워낙 상류층의 소비시장이 작은 조선이었기에 한계는 명확했으니 말이다.
“예. 그리고 그때쯤 천급 함선으로 구성된 이주 선단의 귀환 항로를 살짝 바꾸는 것도 괜찮아 보입니다. 하와이에서 직접 청나라로 가서 물품을 팔고 개척촌으로 향하는 항로로 말이지요.”
김봉길의 의견에 정성국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밀무역인 만큼 천급 함선으로 구성된 이주 선단이 직접 청나라 해안가 인근으로 다가가는 것은 너무 눈에 띄어. 나중에 상황이 바뀌면 모를까.”
그러면서 정성국은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지금은 정성공 때문에 그의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쇄국정책을 실시하고 있는 청나라였지만 훗날 이들이 끝내 항복하고 대만 섬을 평정한 이후엔 쇄국정책을 폐지하고 바다를 열어 백성들에게 대외무역을 허락한다.
그때쯤 되면 김봉길의 말처럼 항로를 바꾸는 것도 고려해볼 만했다.
“아. 그러면 잉글랜드에 의해 북미왕국의 이름이 아시아에 알려질 테니 북미왕국의 이름으로 청나라에 사절을 보내는 것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정식으로 교역을 하자고?”
나쁘지는 않은 생각이었다.
정성공의 손자인 정극상이 청나라에 투항하는 시기는 1683년이고 정식으로 바다를 여는 시기는 1684년이었으니 그때까지 밀무역만 할 게 아니라면 사절을 보내고 정식으로 교역을 청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하지만 당장 청까지 신경 쓸 여력은 없었기에 일단 뒤로 미루었다.
“당장 급한 것은 아니니 나중에 논의하도록 하자고.”
“알겠습니다. 전하.”
김봉길 역시 현 북미왕국의 상황을 모르지 않았기에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슬슬 이주 선단의 출항준비가 끝날 무렵 정성국이 김봉길을 보고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자네도 다음 항해에는 가족들을 데리고 오는 것이 어떻겠나.”
“예?”
갑자기 가족 이야기를 꺼내서인지 의아한 표정을 짓는 김봉길을 보고 정성국이 계속 이야기했다.
“슬슬 가족과 함께 이곳으로 이주하란 소릴세. 자네가 예전에 그러지 않았나. 스페인을 상대할 때는 맡겨달라고. 그러자면 이곳으로 이주해야지.”
“아!”
그제야 작년에 정성국과 한 이야기가 생각난 것인지 탄성을 지르며 이를 기억하고 있는 정성국을 감격 어린 눈초리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전하. 미리 준비하겠습니다. 그럼 이 녀석의 선장 자리에서도 물러나야겠군요.”
그러면서 눈앞에 보이는 천급 함선을 바라보는 김봉길이었다.
“아마 그렇겠지?”
정성국의 대답에 살짝 그의 눈치를 보면서 입을 여는 김봉길이었다.
“근데...전선 중에 제일 큰 함선은 지급 전선뿐이죠?”
“그렇지.”
정성국의 대답에 김봉길은 살짝 울상을 하면서 말했다.
“끙...천급 크기의 전선은 안 만듭니까? 아니면 거대한 전하의 전용 전선이라던가?”
결국, 지금 타는 배보다 더 작은 배를 타게 되는 것이 안타깝다는 소리였기에 정성국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도 만들고야 싶네만...증기기관의 출력이 나와줘야 만드는데 그렇질 않으니 어쩌겠나.”
하지만 정성국의 반응에 김봉길은 이미 생각해둔 방안이 었었던지 곧장 입을 열었다.
“어...천급 함선은 크기가 크니 증기기관을 여럿 장착하면 되지 않습니까? 지급 전선에 250마력 증기기관 2개를 장착하니 천급 함선에는 4개를 장착하면 그런대로 쓸만하지 않을까요?”
김봉길의 제안에 잠시 고민해보던 정성국은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커다란 기함을 만드는 것이 꽤 구미가 당기긴 했지만 지금도 화력은 과잉수준인데 더 커다란 전선을 만들어 무엇하겠는가.
그리고 김봉길의 제안대로 건조해봐야 증기기관의 출력 때문에 결국 기범선에 불과했다.
“뭐 가능은 해 보이네만...당장은 지급 전선만으로도 충분할뿐더러 인급 전선을 건조해 비교해보니 전선은 기범선이 아닌 기선으로 건조하는 게 더 나아 보이더군. 선원들의 안전도 그렇고.”
이에 김봉길은 시무룩해져서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끙...결국 기동이가 더 분발해주기를 바라야겠군요.”
“하하하.”
* * *
6월이 되자 기다리던 지급 함선으로 구성된 이주 선단이 새김포에 도착했다.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모든 짐을 내려놓은 후 곧바로 건선거에 들어가 개조작업에 착수했다.
이미 지급 함선을 지급 전선으로 개조하는 것은 예정되어 있었기에 미리 준비하고 있었기에 개조작업은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배를 잃어버린 선원들에게는 선택권이 주어졌다.
다음 이주 선단 편으로 개척촌으로 돌아가든가 아니면 이곳에 남든가.
이에 대부분의 선원이 이곳에 남고 대신 가족들을 북미왕국으로 이주시키길 원했다.
이는 상황이 바뀌면서 선박 대부분의 기항지가 개척촌이 아닌 포로나이로 변경되었고 이 때문에 가족과 생활하기가 꽤 불편해졌기 때문이다.
항해가 끝나고 가족과 만나기 위해 다시 개척촌과 포로나이를 오가는 정기선을 타야 했으니 말이다.
이 때문에 가족이 있는 선원 대부분은 차라리 살기 좋은 북미왕국으로 이주하는 것을 택했다.
* * *
“대표님. 물자가 도착했습니다.”
로하스가 일을 마치고 건물 안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무렵 마을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하더니 한 사내가 로하스가 쉬고 있던 건물로 들어와 보고했다.
이에 로하스는 살짝 반가운 기색으로 응답했다.
“그런가? 양은 어떻던가?”
“이번엔 물자가 꽤 넉넉하게 들어왔습니다. 거기에 고기도 꽤 들어있더군요.”
그러면서 슬쩍 무언가 기대하는 눈빛으로 로하스를 바라보았다.
이에 로하스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사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허허. 그런가? 그럼 오랜만에 고기나 배불리 먹도록 하지. 술과 함께 말이지.”
“알겠습니다. 대표님.”
보고하러 들어왔던 사내는 이 소식을 마을에 알리기 위해 곧바로 몸을 돌려 건물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교대하듯 후엔이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어째 마을이 부산한 것을 보니 북미왕국에서 물자를 보내 왔나 보군요?”
“그렇네. 이번엔 고기도 포함되었다길래 오랜만에 술도 함께 마시기로 했네.”
“오. 그렇습니까.”
로하스의 이야기에 후엔은 슬쩍 미소를 지으며 입맛을 다셨다.
로하스는 그런 후엔의 반응을 보고 슬쩍 웃었다.
“오랜만에 고기를 먹게 되어서 좋은 건가. 아니면 술 때문인 건가.”
“뭐 둘 다 좋긴 합니다만...굳이 따지자면 술을 마실 수 있어서 좋지요.”
후엔의 말에 로하스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한탄했다.
“그런가? 난 이곳의 술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아. 셰리가 마시고 싶군.”
“...”
이곳에선 고향에서 마시던 셰리 와인을 구할 방법이 없었다.
직접 만들고 싶어도 원료로 사용할 포도도 없었고.
해서 후엔이 생각하기에 셰리를 마시려면 방법은 하나였다.
이곳에서 풀려나 조국으로 돌아가는 것.
쉽지 않은 일이었기에 오랜만에 술을 마신다고 들떠있던 후엔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이를 느끼고 로하스는 자신도 모르게 한탄했다가 후엔의 분위기까지 가라앉자 왠지 미안해져서 그에게 사과했다.
“이거 미안하네. 실언했어.”
로하스의 사과에 후엔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확실히 북미왕국의 술도 괜찮긴 하지만...셰리에 비할 수는 없지요. 저도 셰리를 맛보고 싶군요. 뭐 죽기 전에는 가능할 것도 같고 말입니다.”
후엔의 말에 로하스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로하스는 눈을 부릅뜨고 후엔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무슨 뜻인가? 설마 외무청 소속의 관리가 뭐라고 언질을 준 건가?”
이곳에서 포로 생활을 한 지도 벌써 2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어떻게 해서든 이들과 협상해서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나고 싶었지만, 처음에는 서로 간에 제대로 말이 통하지 않아서 협상할 수 없었다.
이에 필사적으로 말을 배웠고 작년에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해지자 협상을 시작하려 했던 에스파냐인들이었다.
하지만 자신들에게 북미왕국의 언어를 가르치고 대신 스페인어를 배우던 외무청 소속의 관리들은 에스파냐인들의 요청에 외교 협상은 말이 명확하게 통해야 한다는 이유로 협상 자체를 뒤로 미루었다.
이에 곧 협상을 통해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에스파냐인들은 무척 실망했고 이곳에서 평생 포로로 살아가야 할까 봐 절망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로하스는 그들을 다독였다.
그는 확신했던 것이다.
언젠가는 풀려날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곳은 누에바 에스파냐와 꽤 가까웠다.
비록 이곳이 내륙 깊숙이 자리 잡고 있어 누에바 에스파냐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로하스가 생각해보건대 이들이 계속 이곳에서 처박혀 있을 거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결국, 언젠가는 알려질 테고 그때가 되면 자신들이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다독였다.
이에 에스파냐인들은 일리가 있다고 여겨 수긍하고 일단 이곳에서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고.
보급 물자를 적당히 모아두었다가 이렇게 가끔 고기와 술을 마시며 즐기는 것도 이곳에서 적응하기 위한 노력 중의 하나였다.
어떻게든 이곳에서 버티기 위한.
그렇게 지낸 지도 1년이 흘렀고 대부분의 에스파냐인은 내심 포기하고 있었다.
솔직히 이곳에서 사는 것이 썩 나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기후도 괜찮은 편이었고 석탄을 캐서 물자로 교환해 부족함 없이 살 수 있었고.
한가지 흠이라면 여자를 구할 길이 없다는 점이랄까.
하지만 로하스는 아직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언질...까지는 아닙니다만 그런 뉘앙스가 있었습니다. 언제까지 우리를 이곳에 잡아두지는 않겠다는 그런 뉘앙스.”
후엔이 조심스럽게 이야기하자 로하스는 환희에 찬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게 정말인가?”
이에 후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설마 이곳 광산촌에서 평생을 머물겠느냐고 슬쩍 이야기한 것을 보면...”
“오오!”
로하스의 반응이 너무 격했기에 후엔은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
“다만 당장 풀어준다던가 이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로하스는 후엔이 뭐라고 이야기할지 다 안다는 듯 걱정하지 말라면서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그것만 해도 충분하네. 나는 언젠가 이들이 우리와 협상할 거라 굳게 믿고 있었네만 저들의 반응이 없었기에 조금은 지쳤었네. 하지만 오늘 자네의 이야기를 들으니 희망이 생겼네.”
“대표님...”
로하스는 후엔을 보고 혹시나 해 당부했다.
“아. 일단 다른 사람들에겐 알리지 말게. 정말 저들이 우리의 요청을 받아줄 때 이야기하도록 하지.”
후엔 역시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다면 로하스에게도 말할 생각이 없었기에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후엔의 확답을 듣고 로하스는 기분좋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자. 좋은 이야기를 들었으니 오늘 술자리는 꽤 즐겁겠어. 마을에 고기 냄새가 슬슬 풍기니 어서 가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