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봄기운이 북미대륙에 가득할 무렵.
새김포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 다들 중앙의 대로를 바라보며 언제 정성국과 하얀 들꽃이 탄 마차가 오나 기다리고 있었다.
“어째 저번보다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은데?”
“그러게 말이야.”
먼발치서나마 정성국을 다시 보고 싶은 마음에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개똥이가 주변을 한번 둘러보고 말했다.
“아무래도 원주민들이 많이 온 모양이여.”
개똥이의 말에 함께 구경나온 친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특히 이번에 하얀 들꽃 님의 출신 부족에서 많이들 왔겠지.”
하얀 들꽃이 우티 족의 대추장인 푸른 안개의 딸이란 것은 널리 알려졌기에 우티 족뿐만 아니라 원주민들은 모두 북미왕국의 왕인 정성국과 하얀 들꽃이 맺어지길 바랐다.
그런데 그들의 바람과는 달리 정성국은 저번 달에 이주민 출신인 전아라와 혼인을 올렸고 이에 원주민들은 정성국의 혼인을 축하해주면서도 내심 아쉬워했었다.
이 아쉬움을 달래주듯 다시 정성국이 하얀 들꽃과 혼인을 올린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원주민들이 무척이나 기뻐하면서 이주민과 원주민의 결합을 상징하는 이 역사적인 날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했다.
덕분에 새김포는 수많은 인파가 몰렸고 청장들은 혹시 사고라도 터질까 봐 바짝 긴장했다.
“그렇겠지. 뭐 그것뿐만 아니라 저번 축제에 못 왔던 사람들도 왔을 테고.”
“그런가?”
“어? 저기!”
갑자기 멀리서 환호성이 들려 개똥이가 목을 쭉 빼고 중앙 대로를 바라보자 멀리서 지붕이 없는 마차에 올라타 이곳에 나온 백성들에게 열심히 손을 흔들고 있는 정성국과 하얀 들꽃이 보였다.
이에 개똥이도 주변 분위기에 전염된 듯 저 멀리 보이는 마차를 향해 환호성을 내뱉으며 자신들의 왕인 정성국이 천세를 누리기를 기원했다.
* * *
정성국이 두 번째 왕비를 맞이하는 것을 축하하는 날이었기에 새김포 곳곳에서 술판이 벌어졌다.
“전하께서 원주민과 혼인하실 줄은 몰랐는데...”
한 나이든 사내가 슬쩍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투덜대자 같은 자리에 앉아 술을 마시던 중년 사내가 술잔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왜요? 원주민과의 통합을 생각하면 예정된 일이었다고 생각하는데요?”
“통합은 무슨. 원주민과 정식으로 혼인하는 것은 전하의 격을 떨어뜨리는 짓이야. 첩으로 들이면 그만이지.”
나이든 사내의 말에 중년 사내는 자신도 모르게 주변을 확인한 후 그나마 이곳은 조선인뿐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내심 안도하면서 목소리를 죽이며 나이든 사내를 타박했다.
“그게 무슨 개똥 같은 소리요? 술 취한 게요? 아재는 기본 교육 안 받았나? 원주민이나 우리나 다를 것 하나 없다고 몇 번이고 강조했는데 격은 무슨?”
중년 사내의 타박에도 나이든 사내는 고집을 부렸다.
“흥. 제대로 된 철제 제품도 만들지 못하던 야인에 가까운 이들 아닌가? 그런 이들과 우리가 같다고?”
“그건...”
중년 사내는 반박하고 싶었지만 뭐라고 반박해야 할지를 알지 못했다.
중년 사내는 그저 이곳에 오는 동안, 그리고 이곳에 와서 선생들에게 교육받은 대로 원주민과 이주민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지 이에 대해 깊이 생각한 적은 없었으니까.
그때 옆에서 조용히 술을 마시고 있던 연구원 복장을 한 일행 중 중년 남성이 끼어들었다.
“쯧쯧. 수업시간에 졸았던 것이 확실하구먼. 이들은 그저 운이 없을 뿐이라고 하지 않았나. 제대로 된 작물이 없었기에 수렵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제대로 뭉칠 수가 없어 발전이 늦어졌을 뿐이라고. 거기에 이들은 고립되어 있으니 기술 발전이 더 더뎠던 것뿐이라고 선생들이 가르쳤던 것 같은데...”
나이든 사내가 끼어든 중년 남성에게 뭐라고 반박하려 했지만 끼어든 사내가 연구원 복장을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 헛기침을 했다.
이곳에서 중년 남성이 입고 있는 연구원 복장은 지식인의 상징과도 같았으니까.
“크흠. 그래도...”
나이든 사내가 수긍하지 않는 기색에 연구원 복장의 중년 남성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이들은 이 땅의 선주민이고 우리는 이들을 존중해야 마땅하네. 그리고 이들이 허락했기에 이곳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고. 어찌 보면 이들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푼 것과 마찬가지란 소릴세. 우리는 객이나 다름이 없다는 뜻이야. 헌데 이들을 내심 야인이라고 깔보다니...은혜를 모른다면 야인과 다를 것이 뭔가.”
“이익!”
중년 남성의 계속된 타박에 나이든 사내의 얼굴이 붉어지자 중년 남성과 함께 합석한 연구원 복장의 젊은 청년이 과열된 분위기를 진정시켰다.
“자자. 그만 들 합시다. 오늘은 전하께서 두 번째 왕비를 얻은 경사스러운 날인데 얼굴을 붉힐 이유가 없지 않소.”
“크흠.”
이 때문에 화를 낼 타이밍을 놓친 나이든 사내는 잠시 주변 분위기를 살피다가 자신에게 적대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헛기침을 했고 분위기를 살피던 중년 사내는 애써 웃으며 연구원 복장을 한 중년 남성과 젊은 청년을 보고 슬쩍 감사의 인사를 하며 나이든 사내에게 술을 권했다.
“그...그렇지. 오랜만에 좋은 일로 술을 마시는데 얼굴을 붉힐 이유가 없지. 아재도 그냥 한잔하슈. 당신네들도.”
중년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술을 마시며 속으로 생각했다.
‘의외로 원주민을 상대로 우월감을 느끼고 싶어하는 이런 인간들이 생각보다 좀 있네. 북미왕국의 앞날을 생각하면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데...이번 혼인으로 이런 인간들도 생각이 좀 바뀌면 좋으련만.’
* * *
아라가 거주하는 관사 옆쪽의 비어있던 관사에 들어온 정성국이 옆에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하얀 들꽃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하얀 들꽃은 평소와는 다르게 원주민 복식을 하고 전생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의 추장이라면 떠오르는 깃털로 장식된 모자를 쓰고 있었다.
이는 이번 혼인 자체가 약간은 정치적인 목적을 띠고 있었고 이번 혼인이 이주민과 원주민의 결합을 의미했기에 이를 확실히 알리고자 하얀 들꽃이 직접 평소엔 입지 않던 복식을 챙겨 입었다.
정성국은 항상 보아왔던 하얀 들꽃의 색다른 모습에 묘한 감흥이 일었지만 일단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하얀 들꽃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바라봐?”
“그냥...확인하고 싶어서요.”
“뭘?”
“전하가 제 남편이라는 것을요.”
그러면서 배시시 웃는 하얀 들꽃의 미소에 정성국은 심장이 뛰는 것을 느끼면서도 하얀 들꽃이 자신을 전하라고 호칭하는 것에 대해 왠지 거리감이 느껴져 이를 지적했다.
”그래. 이제 내가 네 남편인데도 계속 전하라고 부를거냐?“
이에 하얀 들꽃은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민했지만 마땅한 호칭이 떠오르지 않던지 정성국에게 되물었다.
”음...그럼 뭐라고 부를까요?“
”어...글세?“
정성국 역시 딱히 생각해둔 호칭이 없었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하얀 들꽃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정성국을 보고 배시시 웃었다.
”아라님은 전하를 오라버니라고 부르지요?“
”그렇지?“
”제가 아라님께 듣기로는 처음에 그리 불렀기에 그것이 추억이 되어 오라버니라고 부른다고 들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저는 처음부터 전하라고 불렀으니 계속 전하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러냐. 알았다. 네 뜻을 존중하마.“
딱히 하얀 들꽃에게 듣고 싶었던 호칭은 없었기에 그러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하얀 들꽃은 그런 정성국의 반응을 보며 묘하게 웃었다.
”그리고 호칭으로 거리감을 좁히려 하시지 마시지요.“
”응?“
”거리감을 줄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하면서 하얀 들꽃이 정성국에게 다가오자 정성국은 왠지 모르게 기시감이 든다고 생각했다.
‘어라? 이거 왠지...’
* * *
올해 처음으로 이주 선단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정성국은 선착장으로 나가고 싶었지만 일이 워낙 많아 그럴 여유가 없었다.
해서 정성국은 김봉길을 집무실로 불러들였고 김봉길은 정성국을 보자마자 히죽거리며 인사했다.
“혼인을 올리셨다면서요? 그것도 두 번이나? 정말 경하드립니다. 전하. 이럴 줄 알았으면 이곳에 올 때 해구신이라도 챙겨오는 건데 말입니다.”
이에 정성국은 쓴웃음을 지으며 김봉길을 반겼다.
“해구신이 필요할 정도는 아니네. 그보다 오랜만일세. 선장.”
그러면서 잠시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정성국이 보고를 듣고 의아했던 점을 물어보았다.
“헌데 이번에 이주 선단의 규모가 작년하고 비슷하다면서? 설마 천급 함선을 건조하지 않은 건가?”
밑에서 올라온 보고에는 이번에 도착한 이주 선단은 5척의 천급 함선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되어 있었기에 이를 묻자 김봉길이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전하. 나눠서 온 겁니다. 그게 효율적이기도 하고...전에도 이야기한 것처럼 한성에선 개척촌에 너무 많은 배가 몰리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니까요.”
이에 정성국은 작년에 이 문제로 이야기했던 것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군. 허면 이주 선단이 꽤 나뉘어서 오겠어?”
“그렇습니다. 여기 일정표입니다.”
그러면서 김봉길이 품에서 종이를 꺼내 정성국에게 넘겼고 정성국은 이를 펼쳐 내용을 확인했다.
일정표에는 올해 이주 선단의 구성이 적혀 있었는데 천급 함선으로 구성된 2개 선단, 지급 기범선으로 구성된 2개 선단, 지급 함선으로 구성된 1개 선단, 총 5개 선단이 번갈아 가면서 출항할 예정이라는 것과 개척촌에서 출항하는 예상 일자가 쓰여 있었다.
“허어. 올해는 총 9차례에 걸쳐 도착하는 건가? 엄청나군.”
“하하하. 좀 번잡해 보이기는 하는데...그래도 이편이 나은 것 같습니다. 보급의 문제도 그렇고 말입니다.”
“그렇겠지.”
그때 김봉길이 표정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아. 참. 몇 가지 보고할 게 있습니다.”
“그래? 무슨 일인가?”
정성국이 김봉길을 바라보자 그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먼저 작년에 나하에 도착했을 때 왜인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래? 왜인들이?”
“그렇습니다. 전하. 평소와는 달리 저희의 목적지를 꼬치꼬치 캐묻더군요. 그리고 멀리서 바라만 보던 왜인들이 유구인들 뒤에 찰싹 붙어 있었구요. 아무래도 아이누들을 지원하는 배후세력을 찾는 눈치였습니다. 유구인들은 탐탁지 않아 했지만 왜인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물어보더군요.”
김봉길의 보고에 정성국은 안색을 찌푸렸다.
“흐음...그랬단 말이지? 혹시 충돌하지는 않았고?”
“예. 작년에는 저들도 우리의 정체를 잘 몰랐기에 그냥 넘어갔습니다만...계속 나하를 이용하려면 무언가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충돌이 없었다는 보고에 정성국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김봉길이 조치란 단어를 강하게 발음하는 것을 깨닫고 쓴웃음을 지었다.
‘내년에는 움직일 생각이니 당장 왜인들과 붙을 여유는 없어. 그리고 당장 나하가 꼭 필요한 것도 아니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정성국은 김봉길에게 확인했다.
“조치라...그 전에 한 가지만 확인하도록 하지. 천급 함선은 꼭 나하 항에 들러 식수를 보급해야 하나?”
이에 김봉길은 잠시 생각해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천급 함선의 속도는 빠른 편이라 굳이 나하에 들르지 않아도 물자가 부족하진 않았다.
“아닙니다. 천급 함선은 하와이 제도에서 보급하면 굳이 나하에는 들르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지급 함선이 문제 아닙니까?”
김봉길의 대답에 오히려 정성국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됐네. 그럼. 당분간은 나하에 들르지 말고 곧장 개척촌으로 가게.”
“예? 그럼 지급 함선은...”
의아한 표정을 짓는 김봉길에게 정성국은 지급 함선은 이곳에서 지급 전선으로 개조해 사용할 예정이라고 설명해주었다.
이를 듣고 김봉길은 왜 정성국이 나하에 개입하는 것을 꺼리는 것인지 이해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지급 함선이 이주 선단에서 빠지면 굳이 왜인들과 다퉈가며 나하 항에 집착할 이유가 없었다.
“하긴...천급 함선과 지급 기범선과 비교해보면 지급 함선의 위치가 좀 애매해지긴 했지요. 느리기도 하고. 알겠습니다. 전하. 그럼 당분간은 나하 항에 들르지 않고 바로 개척촌으로 항해하지요.”
별다른 반발 없이 정성국의 명령에 동의하는 김봉길 선장이었고 정성국은 이에 살짝 미소지었다.
“그러도록 하게. 그리고 다른 보고는?”
“아. 그리고 잉글랜드에서 사절이 왔었습니다.”
김봉길의 보고에 정성국은 놀라 눈을 크게 뜨고 김봉길을 바라보았다.
“잉글랜드에서 사절이? 어디로? 설마 개척촌으로?”
이에 김봉길이 그럴 리 있겠느냐면서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전하. 홋카이도의 아이누인들을 통해 접촉했습니다.”
“아아...그나마 다행이군. 그래. 왜 왔다던가?”
“아이누인들 뒤에 있는 우리와 교역을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대방 어르신 말로는 아마 도자기 때문이 아닌가 하더군요.”
“그래?”
“뭐 자세한 보고는 다른 이주 선단 편에 올라올 것 같습니다만 일단 북미왕국을 언급한다고 했습니다. 이를 보고해야 할 것 같아서...”
김봉길의 말에 정성국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뭐 타이밍을 생각하면 크게 상관없긴 하겠지. 어차피 제대로 된 정도도 주지 않을 테고.“
“알겠네. 다른 보고는?”
“그 외에는 딱히 없습니다. 하와이 섬에 관한 내용은 따로 보고서를 올리겠습니다.”
“그런가? 그럼 항해하느라 고생했을 테니 일단 좀 쉬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