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마쓰마에 성에서 지내던 샤쿠샤인은 오니비시가 도착했다는 소식에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래. 잘 다녀왔나? 구경은 잘했고?”
샤쿠샤인의 물음에 오니비시는 잠시 자신이 다녀왔던 조선의 개척촌이라는 곳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분명 이국적인 곳이었다.
그리고 구경할 것도 무척이나 많았고.
하지만 그곳에 가서 꼭 만나고 싶었던 인물을 결국 만나지 못했기에 입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구경은 잘 했네만...목적을 이루진 못했지.”
“목적?”
“원상의 대방을 만나는 것 말일세.”
오니비시의 대답에 샤쿠샤인이 안색을 살짝 흐렸다.
“그래? 자네가 직접 갔는데도 만나지 못한 건가?”
오니비시는 샤쿠샤인이 왜 안색을 흐리는지를 깨닫고 오해하지 말라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 만나기는 했어. 다만 내가 만나고 싶던 사람이 아니었을 뿐이지.”
“그게 무슨 뜻인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 샤쿠샤인에게 오니비시가 개척촌에 도착하고 나서야 알게된 사실을 이야기했다.
“난 투로시노가 만났다는 원상의 대방을 만나고 싶었네만...알고보니 그는 원상의 초대 대방이라고 하더군. 그리고 지금은 개척촌을 떠났다고 했고.”
이에 샤쿠샤인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그럼 자네가 만난 건 원상의 2대 대방인 셈인가?”
이에 오니비시는 고개를 저었다.
만약 자신이 만난 원상의 대방이 초대 대방의 동생이자 자신들에게 지원을 결정했다는 2대 대방이었다면 그와 함께 술잔을 건네면서 감사의 인사라도 하고 싶었는데 말이다.
“그것도 아니네. 그동안 우리를 지원해주었던 대방 역시 원정군을 격파한 이후 대방의 자리에서 물러났다고 하네. 결국, 내가 만난 건 3대 대방이었네.”
오니비시의 이야기에 샤쿠샤인은 조금 당황한 표정이었다.
원상의 대방이라는 자리는 저들의 우두머리 아니던가.
헌데 무슨 조직의 우두머리가 계속 바뀐단 말인가.
이를 묻자 오니비시가 대답했다.
“그 투로시노가 원상의 초대 대방과 함께 동쪽의 거대한 바다를 건너 새로운 대륙을 찾았다고 하지 않았나? 다들 그곳으로 떠났다고 하네. 초대 대방이 먼저 떠났고 그 뒤를 이어 2대 대방도 샤모들의 원정군이 박살 난 이후 더는 큰일이 없을 거라면서 떠났다고 하네.”
“그래? 그럼 원상의 본거지가?”
오니비시는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그렇네. 내가 방문했던 개척촌은 예전에는 원상의 본거지였지만...이제는 바다 건너 새로운 대륙에 자리 잡았다고 하네. 아, 이건 당분간은 함구해달라더군.”
그 이야기에 샤쿠샤인은 이제야 원상이 자신들에게 개입하고 지원해 준 이유를 확실하게 깨달았다.
그들이 누누이 이야기했던 것이 바로 사실이었다.
“허...진짜였나? 그래서...”
허탈한 표정의 샤쿠샤인을 보고 오니비시 역시 비슷한 표정으로 나직하게 말했다.
“그래. 그래서 저들이 우리의 독립을 도운걸세. 새로운 대륙과 개척촌 사이의 안전한 항로를 위해. 저들이 이야기한 것은 모두 사실이었네. 그리고 내가 만난 원상의 대방은 지도까지 보여주며 자세하게 설명해주더군.”
혹시 자신들을 오해라도 할까 봐 지도까지 꺼내 가며 상세하게 설명해주던 원상의 대방이 떠올랐다.
자신들은 왜인들처럼 아이누인들을 노예로 삼지도 않을 것이고 그 땅을 지배하는 것에도 관심 없다고 설명했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내심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샤쿠샤인 역시 이를 지적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했던 일은...”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하는 샤쿠샤인을 보고 오니비시가 씁쓸한 표정으로 대신 입을 열었다.
“그래. 우리가 생각한 것이 꽤 틀어진 것은 사실이지. 내가 파악하건대 저들은 우리가 저들의 대방을 왕으로 모신다고 한들 우리 생각처럼 냉큼 받아들일 것 같지는 않아. 오히려 바다 건너에 스스로 나라를 세우면 모를까.”
“그런가...”
원정군을 모두 격파하고 축제를 벌였던 날.
샤쿠샤인과 오니비시는 대화를 통해 아이누인들의 앞날을 걱정했고 생존을 위해서라면 원상의 도움이 절실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파악하게 되었다.
그리고 최후의 보루로 원상의 대방을 자신들의 왕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하나의 방책으로 생각했다.
다만 그렇다고 바로 저들의 대방을 자신들의 왕으로 모실 생각은 없었기에 일단은 원상에 대해 더 자세히 파악하고자 노력했고.
그 결과 원상에 대해 꽤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원상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된 후 이들이 생각하기에는 원상의 대방을 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원상에게도 꽤 매력적인 제안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원상은 분명 강력한 세력이었지만 실제로는 부족이나 국가가 아닌 상인집단이었으니 자신들이 원상의 대방을 왕으로 받아들이겠다고 제안하면 원상도 긍정적으로 이를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원상과 아이누인들이 결합하면 샤모뿐만 아니라 투로시노가 이야기했던 서양 세력을 무서워할 이유도 없었고 아이누인들은 이곳에서 평화를 누릴 수 있어 보였다.
그래서 협상이 끝난 후 오니비시가 직접 원상의 대방을 한번 만나보고 싶어했던 것이었고 말이다.
“상황이 바뀌었어도 저 바다 건너에 정착했다는 원상의 초대 대방을 한번 만나보고 싶더군. 그래서 일단 내가 만났던 원상의 대방에게 요청했다네. 바다 건너 원상의 본거지에 가보고 싶다고.”
“뭐라던가? 허락하던가?”
“당장은 어렵고 일단 시간을 좀 달라고 하더군.”
오니비시의 대답에 샤쿠샤인은 콧수염을 매만지며 잠시 생각하다가 슬쩍 흥미를 드러냈다.
“흐음...그런가. 만약 저들이 허락한다면 나도 자네와 함께 가보고 싶군.”
“하하하. 투로시노도 다시 가길 원하던데...우리 셋이 모두 자리를 비울 수야 없겠지.”
그러면서 자신은 절대 양보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온몸으로 표현했고 이를 보고 샤쿠샤인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쩝...”
그런 샤쿠샤인을 보고 다시 한번 크게 웃은 오니비시가 이야기의 주제를 돌렸다.
“그래. 이곳은 별일 없었나?”
“별일은 없었...아. 그 투로시노가 이야기했던 서양 세력이 찾아왔네.”
샤쿠샤인의 말에 오니비시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자세하게 물었고 샤쿠샤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지금까지 파악한 내용을 알려주었다.
“잉글랜드라...자네가 보기엔 어떻던가? 정말 투로시노의 말처럼 강대한 세력인 것 같던가?”
이에 샤쿠샤인은 잠시 마쓰마에 성 인근 항구에 정박하고 있는 잉글랜드의 선박을 떠올리며 자신 없다는 듯 이야기했다.
“글세...그거야 모르지. 다만 저들이 타고 온 선박은 원상의 선박과 비슷해 보였네. 그...화포라는 것도 있었고. 오히려 원상의 화포보다 수는 더 많더군.”
“허어...그래?”
지급 전선에 장착된 화포는 아이누인들에겐 신이 내린 무기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 화포가 잉글랜드의 선박에도 장착되어 있다는 소리에 오니비시가 살짝 놀라면서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저들이 이곳에 온 목적은 무엇인가?”
“우리 뒤에 있는 세력과 접촉하길 원하더군.”
그 말에 오니비시는 놀라서 샤쿠샤인을 바라보았다.
“원상과 말인가?”
“그렇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면서 연결해주길 원했네.”
“그래서?”
오니비시의 물음에 샤쿠샤인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대답했다.
“뭘 그래서인가? 일단 이쪽에서 전해 줄 테니 이곳에서 기다리라고 이야기했네. 저들은 확신하고 이곳에 찾아왔기에 모른척할 수도 없었고.”
거기에 정박해있는 화포가 장착된 커다란 배도 부담이었다고 덧붙이자 오니비시는 이해할 수 있었기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처음 이곳을 도착했을 때만 하더라도 이곳 마쓰마에성 인근 마을을 살피던 제임스였지만 곧 흥미를 잃었다.
딱히 볼거리도 없었고 이곳에 오기 전에 들렀던 데지마와 비교해보면 시골 항구나 다름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저들에게 용건을 전한 후로 대답이 올 때까지 선장실에서 머물고 있던 제임스였다.
“정말 교역할만한 것이 마땅치 않습니다. 쇼군이 왜 이곳을 포기했는지 알겠군요.”
제임스와는 달리 마을을 돌아다니며 혹시 교역할만한 것이 있나 알아보던 부선장은 선장실에 도착하자마자 투덜거렸다.
“그 정도인가?”
“예. 선장님. 저들에게 살만한 것은 기껏해야 말린 생선 정도? 교역품으로 삼을만한 것은 아니죠.”
그렇게 한숨을 내쉬는 부선장에게 쓴웃음을 지으며 제임스가 혹시나 하고 물어보았다.
“혹시 모피는 없던가?”
이에 부선장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보이는 모피들이 조금 있긴 한데...저희들에게 팔지는 않더군요. 그리고 모피의 양이 많지 않아서 크게 의미는 없어 보입니다.”
부선장의 대답에 제임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목소리를 낮추며 질문했다.
“그래? 흐음...혹시 저들 뒤에 있는 세력에 대해선?”
부선장 역시 안색을 바꾸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철저하게 함구하고 있습니다. 저들 뒤에 있는 세력의 이름조차 알아내기 어렵더군요.”
“끙...”
혹시나 싶어 아이누 부족 연합의 사람들과 접촉해 그들 뒤에 있는 세력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려 했던 제임스였지만 일이 그렇게 쉽게 돌아가진 않았다.
“결국, 저들에게 대답이 올 때까지는 기다려야겠군.”
“이곳에 머문 지도 벌써 2주에 가까운데 더 기다려야 한단 말입니까?”
선원들의 불만 때문에 인상을 찌푸린 부선장을 제임스가 다독였다.
“어쩌겠나. 조금만 더 참아보세.”
“그냥 저들을 협박해서...”
그때였다.
“선장님! 아이누 부족 연합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이에 부선장은 화들짝 놀랐고 제임스는 그런 부선장을 한번 째려보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선장실을 나섰다.
선장실에서 나선 제임스의 눈에 막 배 위로 올라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다들 비슷한 복식을 하고 있었지만 그중 한 명은 제임스가 이곳에서 보아왔던 아이누인과는 조금 달랐기에 그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런 제임스의 눈길을 느꼈던지 아이누인으로 보이지 않는 사내가 제임스를 보고 입을 열었다.
제임스는 데지마에서 데려온 통역사를 바라보았다.
통역사는 토마스가 괜히 챙겨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곧바로 통역했다.
“당신이 잉글랜드에서 온 사절입니까?”
“그렇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당신이 듣고 싶은 대답을 들려줄 수 있는 사람.”
사내의 말에 제임스는 신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으음...그렇군요. 그럼 안에서 이야기하죠.”
* * *
“통역을 통해 대화하는 만큼 용건만 빠르게 이야기했으면 좋겠소만.”
처음 제임스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려 했지만, 사내의 제지에 결국 포기하고 용건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물었다.
“헌데 당신들을 뭐라고 불러야 하겠소? 그리고 당신은?”
제임스의 물음에 사내는 잠시 고민했다.
‘어차피 내년이면 스페인에도 알려질테고...괜히 원상의 이름을 내세웠다가 일본에 알려지면 골치 아파질 테고 대방 어르신도 필요하다면 밝히라고 허락했으니...’
“당신이 잉글랜드의 사절이라고 했던가? 그럼 나는 북미왕국의 사절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군.”
이에 제임스는 통역사의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했다.
“미안한데 다시 이야기해 줄 수 있겠소? 처음 듣는 나라 이름이라.”
“북미왕국.”
“북.미.왕.국? 발음이 어렵구려. 하하하.”
제임스의 너스레를 받아주지 않고 사내는 독촉했다.
“이제 용건을 이야기했으면 좋겠소만.”
이에 제임스는 은근슬쩍 북미왕국에 대해 더 물어보려는 마음을 접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 미안하오. 우리의 용건은 간단하오. 우리 잉글랜드는 북미왕국과 교역을 하고 싶소.”
제임스의 말에 사내는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교역? 우리에 대해 무엇을 알기에?”
“잘 모르오. 다만 최소한 이들에게 화약 무기를 지원해줄 정도로 문명국이라는 것 정도는 추측할 수 있지. 그리고 우리의 예상이 맞다면 최근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상인에게 팔리는 새로운 유형의 도자기. 그거 북미왕국에서 만든 것 아닙니까?”
제임스의 의미심장한 눈길에 사내는 내색하지 않고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알아챈 건가? 그럼 이 친구를 통해 전에 구하려고 했던 묘목을 좀 구해야겠구만.’
“결국, 요새 나가사키에 풀리는 도자기 때문에 왔다는 거구려.”
사내는 부정하지 않았고 제임스는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예스! 토마스의 생각이 맞았어! 좋아! 이들과 무슨 일이 있어도 거래를 터야겠어!’
잔뜩 흥분한 제임스는 사내를 보고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그렇소. 우리도 도자기를 구하고 싶어서 온 겁니다.”
“흐음...이미 올해 생산된 도자기 전량은 나가사키에 풀기로 되어 있으니 당장 우리가 당신들에게 팔 물량은 없습니다. 대신 한 가지 부탁만 들어준다면 내년부터는 생산량을 늘려서라도 당신들에게 도자기를 팔겠소.”
사내의 말에 잠시 낙담하던 제임스는 긴장하며 사내를 바라보았다.
“으음...그 부탁이란 건?”
“커피 묘목을 구했으면 하오만.”
“엥?”
“말 그대로요. 커피 묘목을 이 배에 가득 싣고 온다면 거래를 하겠소. 아. 물론 커피 묘목은 제대로 값을 치러 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이에 제임스는 기묘한 표정으로 사내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서도 커피를 마실 줄 몰랐군. 커피 묘목이란 말이지? 알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