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정성국은 새롭게 건설된 관사의 문을 열고 들어와 함께 들어온 전아라를 바라보고 걱정스레 물었다.
“아라야. 괜찮아? 안 피곤해?”
“그럼요. 오라버니. 피곤할 게 뭐 있겠어요. 그냥 마차를 타고 새김포를 배회한 것뿐인데.”
이에 정성국은 한숨을 내쉬며 저번 주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회의가 끝날 무렵 관사의 건설이 끝났다고 개발청장이 웃으며 보고했다.
그러자 청장들은 모두 신혼집을 마련한 정성국을 축하해주었고 혼례식은 언제 올리는지 물어보았다.
이에 정성국은 전아라와 상의한 대로 아직 북미왕국의 예법을 정하지 않아 혼례식은 올리지 않는다고 이야기했고.
이 말을 들은 청장들은 일제히 한소리 했다.
도둑장가를 가는 것도 아닌데 그게 무슨 소리냐고.
명색의 한나라의 왕이 혼인을 하는 건데 그럴 수는 없다고 말이다.
그리고 한참을 실랑이한 끝에 혼례식 대신 정성국의 혼인을 알리는 축제를 열기로 했다.
또한, 축제 당일 정성국과 전아라가 새김포를 마차를 타고 한 바퀴 돌기로 했고.
그 정도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서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였고.
관사가 하루빨리 완성되기를 손꼽아 기다린 전아라는 나중에 이를 알고 부부 지연을 맺는 것이 또 밀렸다며 투덜거렸다.
그리고 오늘.
연구청의 장인들이 정성국을 위해 밤을 지새워가며 만든 지붕이 없는 화려한 마차에 전아라와 함께 올라타고 새김포의 외곽을 돌다 중앙 대로를 따라 관사까지 도착했다.
다만 정성국의 생각과는 달리 새김포에는 사람이 무척이나 많았다.
작년 개척촌에서 연구원들이 이주해 새김포에 머물면서 새김포의 인구밀도가 늘어나긴 했지만, 도로의 크기와 건물 사이의 간격 때문에 한적하다고 생각했던 새김포가 아침부터 인파로 바글거렸다.
미리 축제에 대해 알렸기에 새김포 뿐만 아니라 주변 지역에 사는 원주민들도 새김포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항상 연구소에서만 생활하던 전아라가 혹시 심적으로 힘들지 않을까 해서 물어본 정성국이었고.
“그럼 다행인데...그래도 계속해서 손을 흔들고 웃어야 했으니 혹시 피곤하지 않을까 해서.”
정성국의 걱정이 기꺼운지 환하게 웃으면서 입을 여는 전아라였다.
“아니요. 전혀 안 피곤해요. 오히려 백성들이 이 혼인을 기뻐하는 것이 느껴져서 얼마나 고마운데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고개를 끄덕이는 정성국을 보고 전아라는 세상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덧붙였다.
“솔직히 어제까지만 해도 조금 걱정했거든요. 조선인들은 제 신분 때문에, 원주민들은 제가 조선인이라서 이 혼인을 탐탁지 않아 하면 어쩌나 했는데 다들 무척 밝은 표정으로 축하해주니까 너무 행복한 거 있죠?”
정성국은 흠칫했지만 전아라가 행복한 표정을 짓고 가볍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이 혼인을 통해 전아라 자신이 갖고 있던 신분에 대한 자격지심을 털어냈구나 싶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이 축제를 주장했던 청장들이 새삼 고마워졌다.
“그래? 그거 다행이네. 어때? 축제를 열길 잘했지?”
살짝 으스대는 정성국을 보고 전아라는 자신이 타박했던 것을 떠올리고 살짝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러게요. 처음엔 오라버니와 부부 지연을 맺는 것이 뒤로 늦춰져서 참 싫었는데 말이죠. 괜히 투정 부렸네요.”
정성국은 그런 전아라가 귀엽다는 듯 바라보다가 헛기침을 했다.
“크흠. 그럼 이걸로 모든 절차는 끝났고 우리는 부부가 된 거야. 그렇지?”
그러면서 정성국은 아름답게 차려입은 전아라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전아라는 그런 정성국을 보고 묘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닌 거 같은데요? 아직 중요한 절차 하나가 남아 있지 않나요?”
그러면서 눈웃음을 지으며 정성국에게 다가가는 전아라였다.
"어? 어라?"
* * *
“저 섬인 것 같습니다. 선장님.”
부선장의 말에 제임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눈앞에 보이는 커다란 섬을 살펴보았다.
확실히 섬으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했기에 제임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 그런 것 같네. 이곳이 바로 이번 항해의 목적지인 아이누 부족 연합의 섬이 확실해. 이렇게 섬이 거대하니 반란을 함부로 진압하지 못했던 거겠지.”
그렇게 평하며 제임스는 드디어 목적지에 제대로 도착했다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제임스의 귓가에 부선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헌데 선장님. 이 섬이 목적지라면...해안가에 배를 댈까요? 아니면 해안가를 따라 이동해 항구를 찾아볼까요?”
“흐음...”
부선장의 말에 제임스는 섬을 바라보며 잠시 고민했다.
해안가 인근은 인적이 전혀 없었기에 이곳에 상륙한다 하더라도 육지를 탐사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릴 거라 생각한 제임스는 결정했다.
“일단 조심스럽게 이동하도록 하지. 우리의 목적은 아이누 부족 연합과의 접촉인데 저곳은 아무런 인적이 없으니 육지에 상륙한다 해도 원주민을 찾는데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아.”
이에 부선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제임스에게 어느 방향으로 향할지 물었다.
“그렇겠군요. 알겠습니다. 선장님. 허면 어느 쪽으로 갑니까? 북쪽으로? 아니면 남쪽으로?”
제임스는 일본 전도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토마스의 말에 따르면 일본 본토의 북단에 있는 항구에서 북쪽으로 이동해 한나절이면 도착한다고 했었지? 그럼 이 섬 최남단에 제대로 된 항구가 있겠지.’
그렇게 생각한 제임스가 명령을 내렸다.
“남쪽으로 가세.”
“알겠습니다. 선장님.”
제임스의 명령에 따라 조심스럽게 해안가를 따라 남쪽으로 이동하는 잉글랜드의 선박이었다.
그리고 제임스는 선장실로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 머물며 계속 섬을 살펴보았고.
섬의 최남단에 도착했을 때 마침내 제임스는 저 멀리 보이는 일본 특유의 높은 성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 * *
정성국은 박기동의 연락을 받고 연구청 소속의 연구실을 방문했다.
“오셨습니까? 스승님.”
“그래. 오랜만이구나.”
정성국은 연구하느라 바쁘기에 얼굴도 보기 힘들었던 박기동을 보고 반가워했다.
박기동은 그런 정성국을 보고 씩 웃었다.
“그랬나요? 매주 보고서를 주고받다 보니 오랜만인 줄도 몰랐네요.”
이에 정성국이 피식 웃으며 시선을 돌려 연구실 한쪽 바닥에 놓인 조그마한 철도를 바라보았다.
꽤 복잡하게 깔린 모형 철도와 그 철도 위에 올라가 있는 모형 기차를 보고 정성국은 아이들이 갖고 노는 장난감을 떠올렸다.
박기동은 정성국이 모형 철도를 바라보는 것을 깨닫고 설명했다.
“1:20의 비율로 축소한 모형입니다. 그동안은 저것으로 기차의 폭을 바꾸어가며 안정성을 연구해봤지요.”
“그래? 어떻더냐?”
정성국의 물음에 박기동은 민망한 듯 웃었다.
“막상 모형을 만들고 보니 불안해 보였는데...실제로 손으로 움직여보니 빠르게 움직여도 의외로 안정성이 있더군요.”
“그렇겠지. 그러면 기차의 폭은 정한 게냐?”
“예. 스승님. 2.5m로 정했습니다.”
“흐음...”
정성국은 전생에서 자신이 탔던 새마을호를 떠올렸다.
대한민국은 표준궤를 사용했기에 철도의 폭은 표준궤간인 1435mm였고 그 위를 달리는 기차의 폭은 3m를 조금 넘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지금 박기동이 말한 2.5m의 폭은 시내버스의 폭과 비슷했다.
‘전생을 생각해보면 폭을 더 키워도 상관없을 것 같긴 한데...아직은 불안한가 보네. 뭐 실제 운용해본 후에 폭을 키워도 되고 시내버스 정도만 해도 충분할 테니.’
그렇게 생각한 정성국이 박기동을 보고 입을 열었다.
“그럼 철도의 폭은 1.5m로 정한 거고?”
“그렇습니다. 스승님. 이 모형을 만들기 전만 해도 장인들과 연구원들은 안정성을 생각해서 철도의 폭을 더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만...이렇게 모형을 만들어 시험해 보니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폭을 키울수록 철도를 설치하기 어렵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으니까요.”
“그거야 그렇지. 그럼 기차를 끌 증기기관차는?”
“제가 개척촌에서 연구했던 증기기관차를 개량해서 최종적으로 설계한 녀석입니다. 200마력의 증기기관을 개조해 만든 녀석입니다.”
그러면서 박기동은 연구실 책상 한쪽에서 증기기관차의 설계도를 가져와 정성국에게 보여주었다.
정성국은 이를 보고 살짝 감탄했다.
‘처음으로 설계한 증기기관차라 로코모션 1호처럼 대놓고 보일러만 보일 줄 알았더니...’
영국의 조지 스티븐슨이 1825년에 제작하여 최초로 실용화시킨 로코모션 1호는 앙증맞은 보일러가 전부였다.
그렇기에 바로 뒤 차량에 화부가 탑승해서 보일러에 석탄을 집어넣어야 했고.
하지만 박기동이 건네준 설계도에 그려져 있는 증기기관차의 경우 앞쪽에는 육중한 보일러가 뒤쪽에는 석탄과 물을 싣는 탄수차가 합쳐져 있어 증기기관차 자체가 꽤 거대한 편이었다.
“육중해 보이는 것이 꽤 멋진데?”
정성국의 말에 박기동은 자식이 칭찬받은 것처럼 해맑게 웃었다.
“하하. 그렇지요?”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증기기관차의 설계도를 만족스럽게 바라보다가 박기동을 보고 물었다.
“그래. 이 녀석을 설계하는 것에 어려운 점은 없었고?”
이에 박기동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보였다.
“예. 그동안 기선을 만들면서 충분히 기술력을 쌓았으니까요. 딱히 어려운 점은 없었습니다. 스승님.”
그러면서 소형화시켜야 하는 트랙터가 문제지 이게 뭐 어렵겠냐며 투덜거리는 박기동이었고 정성국은 피식 웃었다.
“그래. 이거 지금 제작 중이라고 했나?”
“예. 장인들이 한창 만들고 있습니다. 공방으로 가보시겠습니까?”
박기동의 권유에 정성국은 고개를 저었다.
“완성되면 보도록 하지. 언제쯤 완성되겠나?”
“한 두어 달?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조만간 처음으로 제작한 증기기관차가 완성된다는 소식에 미소를 지은 정성국이 이내 문제점을 파악했다.
증기기관차가 달릴 철도가 아직 없다는 것을.
“그런데 증기기관차를 운행하려면 철로가 필요하지 않나?”
“그것 때문에 스승님께 연락드린 겁니다. 이곳 근처에 증기기관차가 달릴 철로를 설치할까 하다가 왠지 좀 낭비 같아서...”
철로야 다시 뜯어서 새로운 곳에 설치하면 그만이지만 아직 인력이 소중한 북미왕국이었기에 이왕이면 나중에 건설할 노선 일부에 선로를 설치하고 그곳에 만드는 것이 어떨까 싶다는 박기동의 말에 정성국은 고개를 저었다.
박기동의 생각도 틀리진 않았다.
하지만 처음으로 제작한 증기기관차에 어떤 문제가 생길 줄 알고 그런단 말인가.
이를 지적하자 박기동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스승님. 설마 새김포에는 철로를 깔지 않으실 생각이십니까? 전 이곳 새김포가 새로운 수도에 외항이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새마포는 너무 안쪽이지 않습니까?”
박기동의 물음에 정성국은 고개를 저었다.
“훗날에야 그럴지 모르겠다만...그러자면 거대한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설해야 하니 문제지.”
“아...”
박기동은 현재 북미왕국이 100m가 넘는 긴 다리를, 그것도 그 위에 철도를 깔고 기차가 다닐 정도의 튼튼한 다리를 건설할 여유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탄식했다.
“그런 의미에서 새마포 역시 외항으로 써먹기 어렵고. 뭐 노선은 내가 좀 더 고민해보고 결정할 거고 이건 연구청 소속인 너보다는 개발청에서 논의할 문제니 접어두고.”
그러면서 정성국은 연구실 한쪽에 걸려있는 새김포의 지도로 다가가 손으로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당장 필요한 것은 시범 삼아 만든 증기기관차가 달릴 선로 아니겠느냐. 그러니 이곳 외곽에 선로를 깔도록 하자. 한 3km 정도면 충분하겠지?”
“예. 그 정도면 뭐...”
박기동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성국은 그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그래. 내가 개발청장에게도 이야기해두마.”
“알겠습니다. 스승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