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제정신입니까?”
“물론일세.”
오랜만에 나가사키에 도착한 제임스 선장은 곧바로 잉글랜드 상관에 들러 상관을 책임지고 있는 토마스를 찾았다.
토마스는 제임스 선장을 만나 식사를 함께하며 이곳의 현지 사정에 대해 상세하게 이야기해 주었고.
식사가 끝난 후 티타임을 가지며 토마스는 제임스 선장에게 하나의 제안을 던졌다.
이 제안에 제임스 선장은 토마스를 황당하게 바라보았고.
“가뜩이나 분위기가 안 좋다면서요? 소문도 안 좋고. 그런데 저보고 북동쪽으로 향하라는 소리입니까?”
토마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소문이야...저지대놈들 짓이겠지. 워낙 세력에 차이가 크니 막지 못했지만.”
이곳 데지마를 좌지우지하는 세력은 누가 뭐라 해도 네덜란드였다.
그런 네덜란드에서 작정하고 아이누인들을 지원하는 것이 잉글랜드라는 소문을 퍼트리니 왜인들이 잉글랜드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흉흉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를 알면서도 워낙 세력이 미약해 그냥 두고 볼 수밖에 없었던 토마스는 입맛이 썼고.
“물론 그렇겠죠. 그렇긴 한데 이런 시기에 북동쪽으로 배를 띄우면 정말 저들 반란군 뒤에 우리가 있다고 막부가 의심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특히 반란군과 접촉한다면요?”
제임스 선장의 의문에 토마스는 눈앞의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대답했다.
“일단 작년에 이미 협상은 마무리했고 막부에서 저들의 독립을 승인했으니 더는 반란군이라고 부를 수는 없지. 저들이 주장하는 대로 아이누 부족 연합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네. 그리고...막부가 우리를 의심한 다라...글세? 막부도 모르지는 않을 거야. 우리 잉글랜드가 굳이 저들을 지원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이에 제임스 선장은 이곳에 도착하고 나서 받았던 시선을 떠올리고 말했다.
“하지만 이곳 데지마의 분위기는 영 안 좋던데요?”
“말했잖은가. 저지대 놈들이 제대로 장난친 덕분이라고. 쯧.”
하지만 제임스 선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예. 그런 상황에서 굳이 제대로 된 지도도 없이 무작정 북동쪽으로 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이진 않습니다만.”
지금까지 잉글랜드는 이곳 나가사키의 북동쪽으로는 항해한 적이 없었기에 아이누 부족 연합을 찾아가려면 꽤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이를 지적하자 토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좀 위험하긴 하겠지. 하지만 그걸 감수할 만한 이득은 있다고 보네.”
이득이라는 말에 제임스 선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득이요? 그...아이누 부족 연합? 이름만 들어도 미개한 원주민들만 존재할 것 같은데 그들과 접촉해 무슨 이득을 취할 수 있겠습니까? 쇼군이 별다른 고민 없이 그들과 협상한 것을 보면 딱히 부유한 지역도 아닌 것 같은데 말입니다.”
제임스 선장의 의문에 토마스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아. 확실히 그건 그래. 처음 반란군과 협상을 한다고 했을 때만 하더라도 일단은 협상을 통해 포로를 구출하고 다시 원정을 준비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막부에선 그럴 기색이 전혀 없더군. 그런 것을 볼 때 그곳은 꽤 오지인 것 같아. 뭐 그나마 북쪽에 자리 잡고 있으니 기껏해야 괜찮은 모피 정도를 얻을 수 있을까?
“모피라...?”
제임스 선장은 토마스가 말한 모피에 관심을 두었다.
이 시대 북방의 질 좋은 모피는 부드러운 금이나 다름이 없었기에.
하지만 토마스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런 제임스 선장의 관심을 접게 만들었다.
“기껏해야 북방의 섬에서 모피의 수량이 나오면 얼마나 나오겠나. 그러니 막부도 그냥 포기하고 저들이 원하는 대로 독립을 승인하고 아예 손을 떼버린 거겠지.”
기대할 것은 모피뿐인데 수량이 적다면 굳이 배를 띄울 이유가 없었기에 토마스가 앞서 말한 이득이 대체 무엇인지 고민하며 혼잣말을 하는 제임스 선장이었다.
“그럼 대체 왜?”
이에 토마스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아이누 부족 연합과 접촉해서 그들 뒤에 있는 정체불명의 세력과 연결될 수만 있다면 꽤 커다란 이득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네.”
제임스 선장은 토마스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정체불명의 세력은 서양 세력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정체를 알 수 없지만, 이곳 동아시아까지 진출한 세력은 잉글랜드를 제외하면 기껏해야 에스파냐, 네덜란드, 포르투갈 정도인데 대체 무슨 이득을 볼 수 있겠는가 싶었기에.
다만 제임스 선장은 토마스의 의미심장한 표정을 보고 호기심을 갖고 물어보았다.
“그들이 누군지 짐작하시는 겁니까?”
“나도 정확한 정체는 모르겠네. 하지만 짐작이 가는 세력은 있지.”
“역시 에스파냐입니까?”
제임스가 생각하기에 애당초 막부의 반란군을 지원할 만한 동기를 갖춘 세력은 예전에 이곳에서 쫓겨난 에스파냐나 포르투갈 정도였다.
다만 포르투갈은 반란군을 지원할 정도로 세력이 강성하지는 못했고.
하지만 토마스는 고개를 저었다.
“내 생각이 맞다면...그들은 서양 세력이 아닐걸세.”
“예? 그게 무슨...”
분명 막부의 수송선을 공격한 배는 서양 선박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아이누 뒤에 있는 세력이 서양 세력이 아니라는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짓는 제임스 선장을 보고 토마스는 탁자에 올려져 있던 찻잔을 들며 입을 열었다.
“난 말일세. 이걸 유통하는 자들이 아이누 부족 연합 뒤에 있지 않나 생각하네.”
“갑자기 그게 무슨...”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는 제임스 선장이었지만 토마스의 생각은 확고했다.
토마스의 눈앞에 놓인 도자기로 만든 찻잔 세트.
최근 유럽 왕실에서 선풍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물건이었다.
기존의 경덕진에서 나오는 도자기와는 달리 디자인 자체가 자신들의 식문화에 알맞게 제작되었다.
거기에 기존의 도자기와는 달리 단단한 편이라 파손의 우려도 적었고.
이 때문에 사용하다 잘못해서 도자기에 흠집이라도 날까 두려워 막상 도자기 세트를 사놓고도 장식품으로만 이용하는 본국의 귀족들이 환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 도자기는 처음 나가사키에서 네덜란드를 통해 유럽으로 흘러 들어갔고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이 때문에 인도에서 상관을 운영하던 토마스가 본국의 명령을 받고 나가사키로 온 것이다.
잉글랜드는 그동안 일본에 상관을 유지하면서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해 철수했고 덕분에 그동안 일본과의 무역을 독점했던 나라가 바로 네덜란드였다.
헌데 유럽에서 유행하는 이 도자기 때문에 다시 잉글랜드가 자신들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 일본에 진출했고 10년 전 영란 전쟁까지 벌였던 네덜란드로서는 일본에 진출한 잉글랜드가 거슬릴 수밖에.
그래서 노골적으로 아이누인들 뒤에 잉글랜드가 있다며 소문을 내고 잉글랜드를 다시 일본에서 축출하려고 했던 것이다.
다만 막부는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딱히 소문을 잠재우지 않고 이를 이용해 아이누인들의 협상을 마무리했고 말이다.
이곳에서 그러한 흐름을 파악한 토마스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아이누인들을 뒤에서 지원하는 세력이 바로 이 도자기를 유통하는 세력이 아닐까 하는.
단순한 소거법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동아시아까지 진출한 서양 세력은 아이누 부족 연합을 지원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왜군의 수송선을 공격한 것은 분명 서양 선박이었고.
헌데 토마스는 그가 파악한 정보를 떠올렸다.
그가 이곳에서 파악한 정보로는 서양 세력 외에 서양 선박을 이용하는 정체불명의 세력이 하나 있었다.
바로 이 도자기를 나가사키에 가져오는 밀무역선.
그들도 분명 서양 선박을 이용한다고 들었다.
처음 이곳에 토마스가 도착한 후 정보를 수집한 결과 본국의 예상과는 달리 유럽 왕실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도자기는 일본에서 만든 것이 아닌 밀무역을 통해 유통된 도자기였다.
이에 밀무역자와 만나고 싶던 토마스였지만 네덜란드가 자신의 거래처를 알려줄 리가 만무했기에 접촉할 방법이 없었고.
다만 몇 가지 정보만 파악했을 뿐.
이 때문에 허송세월하던 토마스는 최근 벌어진 사태를 파악하고 문득 이것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토마스가 생각하기에는 아이누 부족 연합 뒤에 있는 세력은 기존의 서양 세력이 아닌 새로운 세력이라고 생각했고 그때 도자기를 밀무역하는 자들도 서양 선박을 사용한다는 것이 생각나자 이 둘이 연관되어 있다고 느꼈다.
그렇다면 저들과 접촉하기 위해 아이누 부족 연합의 땅으로 가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내용을 제임스 선장에게 모두 이야기하자 제임스 선장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거 너무 비약 아닙니까? 고작 밀무역자들이 막부에 대항했다고요?”
이에 토마스는 설명하느라 목이 마른 듯 찻잔에 담긴 차를 마신 후 어깨를 으쓱했다.
“뭐. 비약이 심한것은 인정하네. 하지만 서양 선박을 사용하는 세력중에 아이누 부족 연합을 뒤에서 지원할 세력은 내가 생각하기엔 저들 뿐이야. 그러니 한번 접촉해보자는 거고.”
토마스의 말에 제임스는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잘못했단 오해를 받아 막부에 의해 이곳에서 퇴출당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토마스는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 진출한 지도 벌써 3년째지만 별다른 이득이 없었다.
그나마 본국의 주선으로 매년 이곳에 들르는 제임스 선장이 아니었다면 적자에 허덕여 상관을 유지하지도 못했겠지.
그리고 이런 상황은 시간이 흐른다고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았다.
“이곳에 진출한 후 제대로 이익도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언제까지 상관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은가. 이대로 시간을 보내다 철수하는 것보다는 무언가라도 시도해 보는 것이 맞겠지. 그래서 자네에게 부탁하는 거고. 자네처럼 노련한 선장이 필요하니 말일세. 허니 부디 계약을 맺어주었으면 좋겠군.”
토마스의 말에 제임스 선장은 잠시 고민했다.
분명 제대로 된 항로도 모른 채 북동쪽으로 배를 띄우는 것은 부담스러웠지만 토마스가 제안한 것은 용선 계약에 가까웠기에 비록 토마스의 예상이 틀리다 하더라도 손해는 보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 정말 토마스의 말처럼 아이누 부족 연합 뒤에 있는 자들이 이 값비싼 도자기를 가져오는 밀무역자라면 이들과 거래를 틀 경우 막대한 이득을 취할 수 있었고.
이는 분명 토마스의 배려였기에 제임스 선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끙...알겠습니다. 한번 해보도록 하지요.”
“고맙군.”
제임스 선장의 결정에 토마스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준비해두었던 지도를 펼쳤다.
“이건...”
“어렵게 구한 일본의 전도일세.”
찻잔을 옆으로 치우고 탁자 위에 올려둔 일본 전도를 제임스 선장이 유심히 살펴보았다.
“반란이 일어난 곳이 북쪽이라 했으니 이곳입니까?”
제임스가 일본 본토 북쪽의 히로사키 번 근처를 가리키자 토마스는 고개를 저었다.
“북방의 섬이라 하지 않았는가. 내가 확보한 지도에는 없네만 이곳 너머일세. 확인해보니 이곳에서 원정군이 소집되어 북쪽으로 향했다고 하네. 그리고 한나절이면 충분히 도착했다고 하니 꽤 가까울걸세.”
토마스의 설명을 유심히 듣던 제임스 선장은 잠시 지도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 지도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해안가를 따라 이동하면 편할 텐데 그랬다간 오해를 받을 수도 있으니...”
“지도는 가져가게. 그리고 막부는 너무 신경 쓰지 말게.”
“그 소리는?”
“필요하다면 도중에 막부의 항구에 들러 위치를 파악하라는 의미일세. 막부의 눈치를 보는 것보다는 저들과의 접촉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걸세. 이런 상황이라면 막부가 뭐라 하기도 전에 우리가 자진 철수해야 할 판이니.”
“끙...상황이 그렇다면...알겠습니다. 어떻게든 성공시켜야겠군요.”
“그게 내가 원하는 바일세.”
그러고도 토마스와 한참을 논의한 제임스 선장은 나가사키에서 며칠 휴식을 취한 후 해가 떨어질 무렵 조용히 나가사키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