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정성국은 왠지 허전한 기분이 들어 주변에 손을 더듬었다.
그리고 침대 위에는 자신뿐이라는 것을 깨닫고 정성국은 눈을 떴다.
주변은 아직 어두웠다.
하지만 이 개인실에 자신이 찾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때 집무실 쪽에서 달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정성국은 침대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다듬고 집무실로 나섰다.
문을 열자 집무실 가득한 차향과 한쪽에 피워진 화로의 온기로 인해 조금은 따뜻한 공기가 정성국을 맞이했다.
“어? 일어나셨어요? 오라버니?”
전아라가 정성국을 보고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응. 잘 잤어?”
“그럼요. 마침 깨우려던 참이었는데. 여기요.”
그러면서 전아라는 우려낸 차가 담긴 찻잔과 간단하게 요기할 수 있는 떡이 든 접시를 집무실 한쪽의 티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고마워.”
정성국은 티 테이블 한쪽에 앉아 전아라가 건네준 찻잔을 들어 차를 조심스레 마셨다.
“후우. 좋다.”
정성국이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감탄사에 전아라가 환하게 미소지었다.
“그렇죠? 이 떡도 드셔보세요.”
“저 화로에 살짝 구웠나 보네?”
“예. 오라버니는 구운 떡을 좋아하시잖아요.”
“아아. 맛있다. 자. 너도 먹어.”
“네.”
전아라가 조심스럽게 떡을 들어 입에 가져다 대고 오물거리는 것을 잠시 바라보던 정성국이 입을 열었다.
“괜찮겠어?”
“뭐가요?”
오물거리던 떡을 삼킨 후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성국을 바라보는 전아라였다.
“제대로 된 혼례를 올리지 않아도 괜찮겠냐고.”
전아라는 정성국을 보고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요. 전혀 상관없어요. 괜히 제대로 된 혼례를 올린다고 몇 년 기다리고 싶지는 않아요. 이야기했던 대로 뒤쪽에 관사의 건설이 끝나면 같이 살면 그만이죠.”
정성국은 예전에 빨리 혼인을 올리라는 정평국의 조언을 들은 후 전아라와 상의했다.
전아라는 처음 정성국이 혼인을 입에 올리자 무척 상기된 표정을 지었었다.
하지만 정성국이 현재 건설하고 있는 새로운 수도에다 짓고 있는 궁궐의 건설이 완료되면 그곳으로 이주해서 제대로 된 혼례를 올리고 전아라와 하얀 들꽃을 부인으로 맞이하겠다는 소리에 짜게 식은 눈빛으로 정성국을 한참을 바라보다 앞으로 2년 넘게 따로 살 작정이냐고 타박했다.
거기에 자신은 이곳 새김포로 이주한 후 가끔 정성국과 잠자리를 함께하고 있지만 하얀 들꽃은 그것도 아니었으니.
전아라의 등장 이후 전아라와 정성국이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대추장들은 혹여 하얀 들꽃이 버림받을까 봐 묘하게 걱정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해서 정성국은 더는 미루지 않고 하얀 들꽃과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눴고.
그녀의 속마음을 확인한 정성국은 결국 하얀 들꽃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처음부터 하얀 들꽃은 원주민의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든 정성국을 경애하고 있었고 정성국 역시 몇 년간 부대끼면서 정이 들었기에 그런 하얀 들꽃이 싫지 않았으니까.
다만 하얀 들꽃도 그렇고 정성국도 그렇고 전아라를 생각해서 전아라와 혼인을 올린 후 정식으로 하얀 들꽃과 혼인을 올리기 전까지는 잠자리를 갖지 않기로 약속했고.
그렇기에 정성국의 계획대로 새로운 궁궐에서 전아라와 혼인을 올리게 되면 하얀 들꽃은 2년 넘게 독수공방을 해야 한다는 소리였기에 자신을 생각해 그렇게 약속한 하얀 들꽃이 눈에 밟혀 더욱 타박한 전아라였다.
이에 정성국은 곧바로 잘못했다고 한참을 달랜 후에 전아라의 뜻대로 집무실 근처에 조그마한 관사를 두 채 건설하기로 했다.
한 채는 전아라가, 한 채는 하얀 들꽃이 사용할 관사였다.
그리고 이 관사의 건설이 완료되는 대로 전아라가 관사에 들어가 사는 것으로 혼례를 대신하기로 했다.
정성국은 이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여성에게 결혼식의 의미는 시대를 막론하고 비슷하다고 생각했고 한 번뿐인 혼례인 만큼 어떻게든 그럴싸하게 치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아라는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마땅한 장소도 없고 아직 북미왕국만의 제대로 된 관혼상제가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함부로 조선식으로 혼례를 올리는 것이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아요. 오라버니. 오라버니가 누누이 이야기한 것처럼 이곳은 조선이 아니니까요.”
정성국이 조선의 관혼상제를 그대로 북미왕국에 이식하는 것을 썩 탐탁지 않아 한다는 점은 전아라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정성국이 조선식으로 혼례를 올리면 기존의 이주민뿐만 아니라 원주민들도 그대로 따라 할 거라고 판단했다.
이는 딱히 강제하지 않았음에도 조선 이주민들이 명절로 생각하는 설날, 한식, 단오, 추석 등의 명절을 제대로 된 의미도 모르면서 원주민들 역시 명절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랬다.
아직은 새김포 주변 부족만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면 이러한 경향이 북미왕국 전체로 퍼질 거라고 생각해 공식적으로 북미왕국만의 명절을 따로 정해야 하나 고민했을 정도였으니까.
‘당장 인력이 부족해서 예법에 대한 부분은 일단 손 놓고 있었던 내 잘못이긴 한데...지금이라도 이에 대해 논의를 해봐?’
그런 생각을 하는 정성국을 보고 전아라가 쐐기를 박았다.
“그렇다고 북미왕국만의 제대로 된 예법을 정하겠다고 시간 끄는 것도 전 싫어요. 혼례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오라버니의 부인이 된다는 것이 중요하지.”
단호한 전아라의 말에 정성국은 피식 웃으며 손을 들어 그녀의 손 위에 얹고 그녀의 온기를 느끼며 입을 열었다.
“...알았다. 고맙구나.”
그러자 전아라는 자신의 손 위에 올려진 정성국의 손을 바라보고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 * *
“사금을 채취했다고?”
“그렇습니다. 전하. 이것이 새한강에서 동쪽으로 뻗은 지류에서 채취한 사금입니다.”
그러면서 개발청장이 주머니에서 사금 조각을 꺼내 보였다.
정성국은 개발청장이 보여준 반짝거리는 사금 조각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캘리포니아 금광지대는 꽤 넓게 퍼져 있었고 당장 이를 모조리 캘 인력은 없었기에 정성국은 현재 건설 중인 새로운 수도의 동쪽에 위치한 시에라 네바다 금광지대에 있는 금부터 캐기로 마음먹고 개발청장에게 명령을 내렸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금을 확인했고 금광맥을 찾는 중이라는 보고가 올라왔었는데 갑자기 개발청장이 따로 할 이야기가 있다면서 정성국의 집무실을 찾아왔다.
그리고 사금을 채취했다면서 이렇게 정성국에게 사금을 보여준 것이다.
“금광맥을 찾지 못한 건가?”
“아직 찾는 중입니다. 전하. 다만 생각외로 강이나 개울에 존재하는 사금이 많아서 이 사금들도 모두 채취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연락이 왔습니다.”
“흐음...”
정성국이 기억하기로도 캘리포니아 자갈층에 함유된 금은 금 함유량이 높긴 했지만, 문제는 전통적인 사금 채취 방식으로는 대규모로 금을 채취하기도 어렵고 인력이 많이 필요했기에 이를 거론했다.
“사금을 채취하려면 인력이 많이 필요하지 않나?”
“그렇긴 합니다만...그렇다고 그냥 사금을 포기하기엔 너무 아깝습니다. 전하.”
“그거야 그렇지. 흐음...알겠네. 인력을 지원해주도록 하지. 금광산에서 일할 인력과는 별개로 말일세.”
정성국의 허락에 개척청장의 안색이 밝아졌다.
어떻게 보면 가뜩이나 일이 많은 개척청장에게 일이 더해지는 꼴이었지만 반짝이는 금이 가진 마력 때문인지 개척청장의 안색은 무척 밝았다.
“알겠습니다. 전하.”
“그리고 아직 남쪽에선 소식이 없나?”
금광산에 대한 보고를 듣자 작년 겨울에 발견한 캘리코 은광산이 떠올라 이를 묻자 개척청장이 대답했다.
“아. 은광산에 대한 소식이라면 개척단 일부가 은광산 근처에 마을을 건설 중이라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다만 주변이 황무지에 가까워 마을을 건설하는데 생각보다 많은 물자가 필요하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황무지에 가까웠기에 건물을 지을만한 목재도 찾기 힘들었고 덕분에 조그마한 마을을 건설하는데도 많은 물자가 필요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긴 했다.
“그렇겠지. 하지만 화폐를 찍어내려면 꽤 많은 은이 필요하니 최대한 지원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전하.”
그렇게 이야기를 끝낸 정성국은 잠시 개인적인 물음을 던졌다.
“아. 그리고 관사는 언제쯤 완공되겠나?”
개척청장은 이번에 건설하는 관사가 정성국의 신혼집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만큼 정성국이 이를 묻는 것은 빨리 혼인을 하고 싶어서 묻는 것이라 생각하고 흐뭇하게 웃었다.
“개척단에 소속된 최고의 장인들이 최선을 다해 짓고 있습니다만...내부 공사도 해야 하는 만큼 아마 한 달은 걸리지 싶습니다. 전하.”
정성국은 잠시 사용할 관사이니 대충 지으라고 이야기했었지만 신하 된 입장에서 어떻게 그러겠는가.
해서 개발청장은 개척단 소속의 장인들 일부를 빼서 관사를 짓고 내부에도 왕이 잠시 지낼 공간에 걸맞게 화려한 장식을 하라고 명령을 내렸었다.
“한 달이라...알겠네. 고맙네.”
“아닙니다. 전하.”
* * *
슬슬 날씨가 풀리고 봄바람이 불어올 무렵 정성국은 회의실에서 군사청장이 가져온 탐사대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그러니까...아파치 족과 나바호 족의 약탈 때문에 어쩔수없이 스페인의 통치를 받아들인 거군?”
“그렇다고 합니다. 전하.”
아파치 족과 나바호 족은 알래스카와 캐나다 서북부에서 남하한 부족으로 이 두 부족의 기원은 거의 같다고 보면 된다.
다만 스스로를 디네 족이라고 부르는 나바호 족은 남하한 후 푸에블로 족과 접촉해 그들에게서 농경을 배워 정착하고 농경 생활을 했고 아파치 족은 계속해서 수렵 생활을 한다는 점이 차이점이었다.
아무튼, 이 두 부족은 종종 푸에블로 족의 마을에 침입해 농작물을 약탈했고 이 때문에 푸에블로 족은 스페인의 정복자들에게 손쉽게 항복한 것이다.
다만 이들의 통치를 받아들이고 나니 종교적인 문제가 불거져 틀어지긴 했지만 어찌 되었건 간에 스페인인들이 푸에블로를 통치하면서 아파치 족과 나바호 족이 푸에블로의 부락을 침입하는 것을 막아주는 것은 사실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정보였다.
“흐음...”
정성국이 잠시 생각에 잠겼을 때 외무청장인 조용한 곰이 나섰다.
“전하. 외무청에서 나서보겠습니다.”
“외무청에서?”
“그렇습니다. 전하. 탐사대의 보고대로라면 푸에블로 족에게 필요한 것은 아파치 족과 나바호 족의 약탈을 막아줄 보호자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북미왕국은 스페인을 대신해 그들의 보호자가 될 역량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잠시 보고서를 건드리며 생각에 잠긴 정성국이 입을 열었다.
“흐음...그렇기는 한데...저들이 우리를 선택할까?”
이에 조용한 곰은 고개를 끄덕이며 해볼 만하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스페인은 자신들의 종교를 강요하지만, 북미왕국은 그렇지 않잖습니까. 푸에블로 족에게 이점을 알린다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정성국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15년 후에도 종교 문제 때문에 대대적으로 봉기하는 만큼 이를 건드린다면 충분히 가능성은 있어 보였다.
다만 설득에 실패하면 스페인에게 북미왕국의 존재가 알려질 위험성이 존재했기에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이 위험성은 설득 시기를 뒤로 미루면 없앨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정성국이 군사청장을 바라보았다.
“군사청장. 푸에블로 족은 탐사대의 정체를 모르는 것이 확실하지?”
“음...최소한 정체를 숨기기 위해 북미왕국의 복식 대신 통바 족의 복식을 하고 방문해 정보를 수집했으니 모르지 않겠습니까?”
이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조용한 곰을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허면 외무청에서 나서되 일단은 통바 족으로 위장해서 그들과 접촉해 일단 친분만 쌓도록 하게. 설득은 내년에 시도하고.”
내년에는 스페인과 한판 붙을 거라는 것을 이곳 회의실 안에 있는 청장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조용한 곰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내년이라...무슨 의미인지 알겠습니다. 전하. 그럼 일단은 통바 족으로 위장해 저들과 접촉하면서 은근히 종교 문제를 거론하겠습니다.”
조용한 곰의 대답에 정성국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예전 그 순박하던 원주민이 맞나 싶은데? 이젠 충분히 믿고 맡길 수 있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