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오니비시가 진정한 것은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이거 추태를 보였군.”
“아닙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빙긋 웃은 정일신이 자세한 이야기를 요청했다.
“헌데 제가 듣기로 막부와 아이누인 간에 견해차가 커서 협상이 쉽지 않다고 들었습니다만...어떻게 잘 해결이 되었나 보군요?”
아이누인들이 원하는 것은 간단했다.
저들이 에조라고 부르는 지역이 자신들의 땅임을 인정하고 왜인의 출입을 금할 것.
하지만 막부는 에조가 아이누인들의 땅을 인정하긴 하는데 자신들에 속하길 원했다.
즉, 아이누인들의 수장인 샤쿠샤인과 오니비시, 그리고 투로시노를 다이묘로 임명하고 에조를 그들의 봉지로 내리겠다는 입장이었다.
당연히 아이누인들이 받아들일 리가 없었고.
그렇다고 그냥 아이누인들의 요청을 들어주기엔 막부의 체면이 문제였기에 몇 달간 협상을 질질 끌었던 것이다.
“그랬지. 헌데 갑자기 막부에서 온 사절이 방침을 바꾸어 우리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하는 것으로 협상을 끝내버렸네.”
“예? 갑자기 말입니까?”
의아한 표정을 짓는 정일신에게 투로시노가 대신 대답했다.
“그렇네. 아마 막부에서 전령을 보내 협상을 독촉한 것 같긴 한데...”
“전령을 보냈습니까?”
“그렇다고 알고 있네.”
“흐음...”
갑자기 막부가 태도를 바꿨다는 이야기에 의아한 표정을 짓는 정일신과 박경수였지만 오니비시는 이미 끝난 일이라며 주제를 돌렸다.
“뭐 아무튼 덕분에 협상은 끝났고 포로들의 몸값도 지급하고 모두 데려갔으니 모든 일은 끝난 셈이지. 그것보다는 혹시 자네들의 대방을 한번 만나볼 수 있겠나?”
“예?”
의외의 이야기에 정일신과 박경수를 서로를 바라보았다.
* * *
정성국은 싸늘한 겨울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선착장 안쪽에 자리하고 있는 선박을 바라보았다.
“이게 이번에 새로 건조한 인급 전선이라고?”
정성국의 물음에 그의 뒤편에 서 있던 최주명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스승님.”
“흐음...”
정성국은 눈앞에 보이는 인급 전선을 바라보았다.
기존의 지급 전선과 이번에 새로 건조한 인급 전선은 느낌이 달랐다.
지급 전선은 결국 범선인 지급 함선에 증기기관을 부착한 기범선이었기에 갑판 위가 복잡한 편이었다.
하지만 인급 전선은 돛이 없고 배 중앙에 위치한 굴뚝을 중심으로 존재하는 상부 구조물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었기에 무척이나 깔끔했다.
물론 저 상부 구조물이 꽤 크고 긴 편이었기에 기존의 선박과는 조금은 이질적으로 보이긴 했지만.
기존의 지급 전선이 전투 시 선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방어판을 장착했다면 이 인급 전선은 아예 전투 시엔 상부 구조물 안에서만 움직일 수 있게 설계된 탓이다.
덕분에 정성국이 기억하고 있는 과도기의 철갑선과도 비슷한 모양새였기에 오히려 정성국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겉모양은 꽤 맘에 드는데? 특히 저 상부 구조물이 마음에 드는군.”
이 말에 최주명은 볼을 긁적이면서 대답했다.
“그렇습니까? 조금은 이질적이라고 생각했는데...스승님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다행이군요.”
아무래도 최주명의 반응을 볼 때 이 인급 함선이 꽤 이질적이라고 생각한 듯싶다.
이에 정성국은 피식 웃으면서 상부 구조물을 가르키며 입을 열었다.
“저 상부 구조물들의 방어력은 어느 정도나 되지? 기존의 방어판처럼 총탄 정도만 막을 수 있는 건가?”
정성국의 물음에 최주명은 고개를 저으며 자신 있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선체와 동일한 두께인 만큼 적들의 대포를 맞아도 충분히 버텨줄 겁니다.”
“그래?”
예상외의 방어력에 정성국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짓자 최주명이 부연설명을 곁들였다.
“그렇습니다. 스승님. 애초에 전선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건조했고 수많은 대포를 싣고 다니는 서양의 선박을 상대하려면 무엇보다 방어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신경을 최대한 썼습니다.”
정성국은 최주명의 설명에 몹시 흡족했다.
전투에 나서는 병사들의 최소한의 안전이 확보되었기 때문이다.
북미왕국의 인구수는 스페인에 비한다면 무척이나 적은 만큼 병사들의 안전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좋네. 출력은 500마력이랬지?”
“그렇습니다. 스승님 250마력의 증기기관 2개를 달았고 덕분에 평균 12노트까지 나오더군요.”
인급 전선은 함대의 초계함으로 사용할 예정이었기에 빠른 속도에 만족한 정성국이었다.
“허어. 빠르네. 그럼 무장은?”
“60mm 화포 8문을 장착했습니다.”
최주명의 말에 살짝 놀란 정성국이었다.
지급 전선에 장착된 화포가 12문이었으니 지급 전선보다 작은 인급 전선에 8문은 너무 과잉 화력이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그러다 정성국은 배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최주명을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많네? 6문 정도로 생각했는데. 근데 포문이 3개뿐 인데?”
“양 현에 3문씩 총 6문을 달았고 2문은 상부 구조물 안쪽에 설치했습니다. 선수포와 선미포로 사용하려구요.”
“호오.”
최주명의 답변에 정성국은 꽤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면서 발걸음을 옮겨 인급 전선의 앞쪽으로 향했다.
인급 전선의 상부 구조물 맨 앞쪽에 포문이 보이자 정성국은 그 독특함에 미소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어떻게 보면 상부 구조물 자체가 거대한 포탑과도 비슷한 느낌인가? 나쁘진 않지만...나중을 생각하면 포탑에 대해서도 체계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겠네.’
지금이야 상관없지만 적은 수의 포로 사각지대 없이 조준하려면 결국 포탑을 채용하긴 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포탑을 채용해 포가 갑판 위로 올라오게 되면 악천후에서도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었고.
“그럼 포의 사각지대는 거의 없는 셈인가?”
“그렇습니다. 스승님. 덕분에 배의 빠른 기동력을 사용하면서도 꾸준히 포를 발사할 수 있게 설계했습니다.”
정성국은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이 배를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고 건조한 최주명을 바라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고생했다. 잘 만들었네. 이거 어째 지급 전선보다 더 괜찮아 보이는데?”
정성국의 칭찬에 그동안 인급 전선을 건조하기 위해 고생했던 최주명을 비롯한 뒤쪽의 장인들이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지급 전선과는 달리 처음부터 철저하게 근접해서 전투할 것을 생각하고 설계한 녀석이니까요. 분명 지급 전선보다 포문 수는 적기에 단순 화력은 떨어질지 몰라도 지급 전선보다 더 유용할 거라 생각합니다.”
이에 정성국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그럼 이 인급 전선을 언제쯤 양산할 생각이지?”
“조금 더 시험 운용을 해보고 큰 문제 없으면 양산할 생각이니...아마 내년 초가 되지 않겠습니까?”
최주명의 대답에 정성국은 머릿속으로 잠시 계산해보고 입을 열었다.
“그런가? 그럼 길어야 1년 반이라는 건데...그럼 몇 척이나 건조할 수 있을까?”
최주명은 이미 생각해두었다는 듯 자신 있게 대답했다.
“최소 8척은 가능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최주명의 대답에 정성국은 고개를 갸웃하며 회의적인 표정을 지었다.
“가능할까? 내년에 이곳에 도착할 지급 함선도 지급 전선으로 다 개조해야 할 텐데?”
“걱정하지 마십시오. 스승님. 그것을 다 고려해서 8척이라는 숫자가 나온 거니까요.”
“그래?”
“예. 스승님. 이곳 조선소에서 일하는 인원을 계속해서 늘리고 있거든요. 겨우내 장인들이 노동자들을 교육하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곳 건선거를 워낙 크게 만들어서 공간도 충분하니 한 번에 여러 척을 동시에 건조할 생각이구요.”
결국, 배를 건조할 인력을 최대한 늘려서 선박을 찍어내겠다는 소리에 정성국은 나쁠 것은 없다고 여겼다.
앞으로도 많은 배를 건조해야 하니 말이다.
‘나중에 곳곳에 조선소도 건설해야 하니 여기서 최대한 인력을 키워서 다른 곳으로 보내도 되고.’
“그래. 최대한 지원해줄 테니 어디 한번 해보아라.”
* * *
정성국은 숨을 헐떡이며 직접 보고하기 위해 자신의 집무실로 달려온 군사청장을 보고 되물었다.
“그래? 발견했다고?”
“그렇습니다. 전하. 탐사대에서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전하께서 혹시 광맥이 있을지도 모르니 살펴보라고 한 지역을 다시 한번 탐사해보니 산 자체가 거대한 은이라고 하더군요.”
살짝 흥분한 얼굴의 군사청장을 보고 정성국은 잠시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원 역사에서 캘리포니아 남부, 로스앤젤레스 북동쪽으로 200km 정도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한 캘리코 지역은 산 전체가 은광산에 가까웠다고 한다.
이곳에 은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고 덕분에 전성기 시절에는 무려 500개에 달하는 은광에서 수많은 은을 채굴했다고.
다만 캘리코 지역의 전성기는 무척이나 짧았다.
은값이 폭락하면서 채산성이 악화하였고 수많은 은광이 폐쇄되고 그곳에서 일하던 광부들이 하나둘 떠나면서 결국 한때 잘나갔던 캘리코 은광촌은 아무도 살지 않는 유령촌이 되어 버렸다.
이를 떠올리며 정성국은 생각했다.
‘이번에는 과연 그곳에서 은이 떨어질 때까지 채굴할 수 있으려나? 아니면 마찬가지로 채산성이 안 맞아서 도중에 포기하려나.’
“그거 잘 되었군. 은광을 발견한 탐사대원에게는 따로 포상하게.”
“알겠습니다. 전하. 헌데 그곳을 확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곳에 사는 원주민은 없다던가?”
“그렇습니다. 전하. 메마른 황야에 가까워서 인근에 사는 원주민은 없답니다.”
“그럼 일단 새나주에 주둔해 있는 경비대원들 중 일부를 보내 확보하도록 하게. 그리고 새나주의 개척단의 일부도 함께 보내 일단 조그마한 마을부터 만들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전하.”
“탐사대에서 다른 보고는 없었나? 동쪽으로 나아간 탐사대원들 말일세.”
“아. 가장 먼 곳까지 탐사했던 탐사대원 일부가 원주민을 발견했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그래? 혹시 그들 부족의 이름은 파악했나?”
“푸에블로 부족이라고 했답니다.”
“푸에블로라...”
군사청장의 보고에 정성국은 은광을 발견했다는 보고보다 더 기쁜 표정을 지었다.
정성국이 탐사대를 통해 찾고자 했던 원주민이 바로 이 푸에블로 부족이었다.
이들 푸에블로 부족은 뉴멕시코, 애리조나, 텍사스 지역에 부락을 이루어 사는 원주민들로 이들을 북미왕국에 합류시킨다면 손쉽게 텍사스 지역까지 진출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잠깐만. 자신들을 푸에블로라고 말했다고?’
푸에블로라는 이름은 스페인어로 부락이라는 뜻으로 1600년대에 스페인의 정복자가 이들이 부락을 이루고 산다는 의미에서 붙인 이름이었다.
수렵 생활을 하는 다른 원주민들과는 달리 이들은 부락을 이루고 옥수수와 콩, 호박 등을 재배하는 농경 생활을 했으니까.
헌데 이러한 이름을 쓴다는 것은 결국 스페인의 영향력이 이들에게 미치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이에 정성국은 예상과는 다른 상황에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1680년대에 푸에블로 반란을 일으켜 스페인인들을 몽땅 자신들의 영역에서 내쫓는 거로 알고 있는데...설마 지금은 사이가 좋은 건 아니겠지?’
정성국이 푸에블로 부족을 찾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가 기억하기로는 1600년대에 스페인의 정복자가 리오그란데 상류에 스페인 이주민을 정착시키고 이 지역을 장악해 푸에블로 부족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페인인들은 이 미개한 푸에블로 부족에게 기독교를 강요했고 푸에블로 부족 중 일부가 이에 저항했다.
이러한 종교 갈등으로 인해 10여 명의 스페인인이 죽자 푸에블로 부족을 통치하던 스페인의 정복자들은 가혹하게 보복했다.
군사를 동원해 푸에블로인 600명을 넘게 죽여서 이들에게 항복을 받아낸 것으로 끝내지 않고 25세 이상의 원주민 남성 모두를 끌어내 그들의 발목을 잘라버렸다.
그리고 1680년에도 종교 문제로 인해 다시 다툼이 발생해 이때는 푸에블로 부족 모두가 봉기해 성당을 불사르고 사제를 죽이는 푸에블로 반란이 일어난다.
이때는 전투 끝에 결국 스페인인들을 몰아내었고.
이를 알고 있는 정성국은 당연히 이들이 스페인에게 좋은 감정은 없을 거로 생각하고 이들을 지원할 생각이었는데 어째 현실은 달랐다.
‘이러면 이야기가 좀 달라지는데...일단은 정보의 수집이 우선이겠군.’
정성국은 군사청장을 보고 명령을 내렸다.
“탐사대원들에게 푸에블로 부족과 조심스럽게 접촉해서 그들의 정보를 파악하라고 하게. 다만 스페인에도 알려질 수 있으니 북미왕국에 대해선 함부로 언급하지 말라고 전하고.”
“알겠습니다.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