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아. 그리고 그것과는 별개로 북미왕국에서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몇 가지 있습니다.”
정평국이 북미왕국을 직접 둘러보고 하는 이야기인 만큼 정성국은 관심을 두고 바라보았다.
“음? 말해 보거라.”
“첫 번째는 교육입니다.”
“흐음...”
정성국이 신음을 흘렸고 정평국은 자신이 방문했던 부족 마을들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이곳과 가까운 지역, 특히 처음 북미왕국에 합류한 부족들의 경우에는 말을 가르치는 선생도 꽤 많아 부족민들과 아이들의 교육이 그나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만...남쪽에 있는 부족 마을들은 상황이 조금 다르더군요. 선생이 부족한지 한 마을에 한 명의 선생만 있는 곳도 많고 선생이 없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아. 그건 이미 알고 있단다.”
정성국도 모르지 않았고 이를 위해 교육청장을 통해 지속해서 선생들을 키워내고 있었지만 아직은 한계가 명확했다.
개척촌에서처럼 수준 높은 교육이 가능한 선생은커녕 간단한 기본교육이 가능한 선생의 수도 부족한 상황이었으니까.
그나마 임시로 북미왕국에 합류한 부족들은 이곳 새김포에 똑똑한 젊은이들을 보냈고 북미왕국에서는 그들을 속성으로 가르친 후 선생으로 다시 마을로 보내고 있긴 했다.
하지만 아무리 속성으로 가르친다 하더라도 새로운 말과 글을 익히는 것을 단기간에 해결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기에 비교적 최근에 합류한 부족 출신 젊은이들의 교육은 아직 진행 중이었고 정평국이 방문했던 선생이 아예 없는 부족들은 아마 그런 경우일 것이다.
이에 정성국은 이미 파악하고 있는 문제고 선생을 늘리기 위해 교육청장이 노력하고 있지만 결국은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라고 이야기하자 정평국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을 제가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형님. 제가 지적하고자 하는 바는 그게 아닙니다. 지금 교육청에서 육성하는 선생들은 모두 기본교육만 가르칠 수 있는 수준의 선생뿐인 것이 문제라는 겁니다. 분명 북미왕국의 정체성과 통합을 위해서 모든 백성에게 말과 글을 가르치기 위한 선생의 대량 육성도 물론 중요합니다만 개척촌에서처럼 중등, 고등 교육이 가능한 선생들의 육성 또한 중요하다는 겁니다.”
“음?”
예상외의 말에 정성국의 의아한 표정을 짓자 정평국이 잠시 목을 축인 후 입을 열었다.
“형님. 오히려 이런 중등, 고등 교육이 북미왕국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개척촌의 기술이 발전할 수 있었던 계기도 결국은 형님이 어렸을 때 아이들을 모아 잘 가르쳤고 이들이 노력했기에 가능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에 정성국은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정평국은 자신감을 얻고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형님의 말마따나 고작 인구 25만의 조그마한 우리 북미왕국이 한때 이 대륙을 장악했다고 선언했던 유럽의 강국이라는 스페인과 한판 붙어보겠다는 생각을 하는 이유도, 그리고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하는 이유도 결국은 이렇게 발전된 기술 때문이지요. 그러니 이를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는 인재를 키우는 것이 우선입니다. 헌데 지금 북미왕국은 그러한 인재를 키울 방법이 거의 없습니다. 그나마 개척촌에서 교육받은 인재들이 이를 대체해주고 있습니다만 언제까지 북미왕국에 필요한 인재를 개척촌에서 데려올 수는 없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북미왕국의 교육 정책은 북미왕국 백성들에게 기본적인 교육을 할 수 있는 선생들을 우선하여 육성하는 방향이었다.
그리고 이들을 기반으로 마을 곳곳에 기초적인 학교를 세우고 말이다.
하지만 정평국은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수준 높은 인재를 배출시킬 수 있는 교육기관의 설립이 더 중요하고 이를 위한 선생들을 지금부터라도 육성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흐음...하긴. 생각해보면 고작 기본적인 내용을 가르치는 선생의 육성조차 이리 시간이 걸리는데 중등, 고등 교육이 가능한 선생의 육성이 단기간에 가능할 리 없으니 지금부터 준비해야 하긴 하겠구나. 이건 교육청장에게 이야기해서 수준 높은 선생들을 육성하는 사범학교를 세워야겠군.”
정성국이 긍정적으로 반응하자 정평국은 환하게 웃으며 계속 입을 열었다.
“두 번째는 화폐의 발행입니다. 이곳은 주로 물물교환으로 거래를 하다 보니 무척 불편하더군요. 문제라면 북미왕국엔 아직 화폐를 발행할만한 귀금속이 부족할 것 같다는 건데...일단은 원상에 이야기를 해둬야겠습니다. 거래량을 늘려서 금과 은을 좀 확보해보라고.”
이에 정성국은 정평국을 바라보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전생의 기억이 있는 정성국이 화폐의 중요성을 모를 리가 없었다.
다만 당장 화폐를 발행할만한 귀금속이 부족했고 이를 맡길만한 사람이 없었기에 잠시 두고 보고 있었을 뿐.
정성국은 내심 정평국에게 이 일을 맡길 생각이었는데 그가 먼저 언급하자 만족스러웠다.
‘뭐 화폐를 만들 귀금속이야...묻혀 있는 위치를 알고 있으니 슬슬 캐야겠군.’
캘리포니아 북부와 동부의 금광지대는 이미 북미왕국이 확보하고 있었고 새나주 동쪽에 위치한 캘리코 은광산은 아직 북미왕국의 영역이 아니긴 했지만, 탐사대와 외교청의 관리들을 생각하면 곧 확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정성국이었다.
“원상이나 개척촌에 보관하고 있는 귀금속은 없지?”
“예. 밀무역으로 벌어들이는 돈 대부분을 현물로 바꿔서 이곳으로 운반하고 있으니까요. 아이누 섬의 모피나 건해삼의 생산량은 정해져 있으니 결국 도자기의 생산을 어떻게든 늘리라고 해야겠군요.”
말을 그렇게 하면서도 곤란한 표정을 짓는 정평국을 보고 정성국은 손을 내저었다.
“지금도 개척촌의 생산량은 한계로 알고 있는데?”
“그렇긴 합니다만...”
“그럼 이곳의 도공 중에 실력이 좋은 사람들에게 유럽으로 수출하는 골도자기를 만들도록 하고 그걸 개척촌으로 가져가면 되겠지. 그리고 이곳에서도 직접 금과 은을 캐면 화폐를 발행할 수 있을 거야.”
“으음...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하긴 이곳에서 개척촌으로 향할 때는 거의 빈 배나 다름이 없으니 나쁘진 않네요. 헌데 이곳에 금광과 은광이 있습니까?”
호기심 어린 눈초리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있긴 하지. 다만 채굴할 인력이 부족해서 일단 놔두었다만 상황이 달라졌으니.”
“다행이군요. 허면 준비해서 내년쯤에 화폐를 발행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말인데...당분간은 네가 화폐 발행에 대한 일을 좀 맡거라.”
“음...알겠습니다. 형님.”
잠시 정성국의 제안을 생각해보던 정평국은 이내 일을 맡을 사람이 마땅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더 조언할 말은 없느냐?”
“마지막으로는...후계를 생각해서라도 더 늦지 않게 혼인을 하시지요. 형님.”
“크흠...그래야지.”
더는 혼인을 미루지 말라며 채근하는 정평국의 말에 정성국은 헛기침했다.
이에 정평국은 조선에서 온 이주민들은 오로지 정성국을 믿고 이곳에 이주를 선택한 만큼 제대로 된 후계가 없는 현 상황을 꽤 불안해한다고 덧붙였다.
“그래?”
“예. 그리고 첫째 형수님과 혼인을 하면 바로 둘째 형수님과도 혼인을 올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정평국은 하얀 들꽃을 알게 된 후 사석에선 둘째 형수님으로 부르곤 했다.
“응? 왜?”
그러자 정평국은 자신이 돌아다녔던 마을의 원주민들을 떠올리고 입을 열었다.
“의외로 둘째 형수님이 원주민들 사이에 명망이 높더군요. 특히 새김포와 주변 지역의 원주민들은 형님과 둘째 형수님이 맺어지는 것을 기정사실로 알고 있습니다. 헌데 이런 상황에서 첫째 형수님과만 혼인을 올리고 둘째 형수님과의 혼인을 미루면...”
“원주민들이 불안해할 수 있다?”
“이런저런 말이 나오긴 할 겁니다.”
이에 정성국은 잠시 고심했다.
“흐음...그럼 아라와의 혼인도 미뤄야 하나?”
그 말에 정평국이 지금 무슨 소리냐며 표정을 찡그렸다.
“아니 왜요?”
이에 정성국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럼 하얀 들꽃은 어디서 지내라고? 근처에 관사가 남는 게 하나도 없는데?”
예전 군사청에 집무실을 두었을 때는 잘 곳이 필요해 관사를 이용했지만, 자신의 전용 건물이 생긴 후론 이곳 집무실 안쪽의 조그마한 개인실에서 지내고 있었다.
한나라의 왕치고는 몹시 궁색한 모양새였지만 어차피 곧 그럴듯한 궁궐로 이사할 생각이었으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다.
어차피 잠만 잘 공간이었으니.
그러다 아라와 혼인을 생각하고 그제서야 함께 살 관사를 알아봤지만, 이번에 수많은 연구원이 새김포로 이주함에 따라 부부가 지낼 크기의 관사는 남는 게 없었다.
그렇다고 잠시 살기 위해 새로 건물을 지을 수도 없고.
해서 이곳을 적당히 개조할 생각이었으나 그렇다고 방을 여러 개 만들어 하얀 들꽃까지 데려올 공간은 없었다.
이를 알게 된 정평국이 탄식했다.
“아...”
* * *
지급 전선의 함장실에서 박경수는 아이누 섬에 다녀왔던 정일신 함장의 말을 듣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허. 그래요? 유구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니...막부가 우리의 정체가 무척이나 궁금한 모양입니다.“
개척촌에 도착한 이주 선단들의 보고에 의하면 나하 항에서 북쪽으로 향하는 선박들의 목적지를 꼬치꼬치 물어보았다고 한다.
이에 개척촌에서는 정체가 발각되지 않게 조심하라고 지급 전선의 함장인 정일신에게 연락을 보냈고 정일신은 자신뿐 아니라 박경수도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이를 이야기해주었다.
”그렇겠지. 우리 덕분에 원정 자체가 어그러진 셈이니까.“
정일신은 씩 웃었지만, 박경수는 오히려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거 이래서야 협상이 잘 이루어질지 걱정이네요.“
분명 막부의 피해가 큰 만큼 협상을 통해 전쟁을 마무리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뒤로는 아이누인들의 배후를 파악하고 있었다는 소식에 왜인들과 협상 중인 아이누인들의 지휘부가 생각났다.
홋카이도 남쪽의 마쓰마에 성에서는 아이누인과 왜인간의 협상이 시작된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다만 원상에 소속된 인물들의 경우 왜인들에게 정체가 발각되면 곤란했기에 먼저 후방으로 빠진 상황이었다.
어차피 막부에서 새로 원정군을 조직하지 않는 한 이미 전투는 끝난 상황이었으니 다른 부족장들도 이를 흔쾌히 허락했고.
덕분에 신식 소총으로 무장한 아이누 섬의 부대는 지급 전선을 타고 후방인 삿포로 인근에 주둔해 있었다.
”글세...난 오히려 반대로 생각하네. 나하에서의 일을 생각해보면 결국, 우리의 정체를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는 소리 아닌가. 그런 상황에서 포로까지 포기하면서 전쟁을 계속할 거라 생각하진 않네. 일단 이번 협상에서 전쟁을 그만둘 거라 생각하네.“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어쩌면 나중에 다시 쳐들어올 수 있다는 소리였기에 씁쓸한 표정을 짓는 박경수였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그때 누군가 함장실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경수! 자네 여기 있었나!“
”음? 투로시노? 오니비시? 여길 어떻게?“
함장실에 들어온 투로시노와 오니비시를 보고 박경수가 눈이 휘둥그레지자 오니비시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박경수에게 다가가 소리쳤다.
”드디어 전쟁이 끝났네! 샤모들이 결국 이곳을 우리의 땅으로 인정하기로 했단 말일세!“
”정말입니까?“
박경수는 전쟁이 끝났다는 오니비시의 말에 반색했다.
몇 달째 질질 끌던 협상이 드디어 끝난 모양이었다.
”그렇다네! 다 자네들의 도움 덕분이야!“
오니비시는 박경수와 정일신을 보고 고마워 어찌할 줄을 몰라 하다 결국 눈물까지 흘렸다.
투로시노는 그런 오니비시를 보고 뒤에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오니비시의 이런 반응은 어찌 생각하면 당연했다.
홋카이도의 아이누인들은 15세기에 왜인들이 홋카이도에 진출한 이후 꾸준히 핍박받아왔다.
이를 참지 못하고 지속해서 투쟁한 지도 벌써 200년이 흘렀지만 이러한 흐름을 바꾸진 못했고.
헌데 갑자기 나타나 자신들을 도와준 이들 덕분에 드디어 홋카이도 이북은 아이누인들의 땅임을 인정하는 협상을 왜인들이 받아들였으니 감격하는 것은 당연했다.
”아닙니다. 저희는 명령에 따라 조금 도왔을 뿐입니다. 아이누인들이 포기하지 않았기에 이뤄낸 역사이지요. 축하드립니다.“
정일신이 나서서 오니비시에게 이야기하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내 어찌 모르겠나. 자네들이 아니었다면 우리도 코샤마인처럼 결국 패망했을 거야. 정말 고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