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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80화 (80/850)

80화

정성국이 새남포에 방문했다는 소식이 인근에 퍼지자 새남포 주변의 원주민 부족 대추장들이 하나둘 새남포에 방문했고 정성국과 대화를 나누었다.

대추장들의 방문과 그들과의 대화는 단순한 친목 도모에 가까웠다.

정성국은 훗날 이들을 끌어들일 생각이 있었지만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새남포에 방문한 대추장들은 그동안 북미왕국과 교류하면서 들어왔던 대추장 위의 왕이라는 존재가 이곳에 잠시 들렀다길래 얼굴이나 한번 보자는 느낌으로 방문했었고.

덕분에 웅크린 늑대만 좋았다.

협상을 위해 직접 주변 부족을 돌아다닐 필요 없이 새남포에 방문한 대추장들을 상대로 협상을 하면 되니 말이다.

그리고 이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들에게 고용되면 기존보다 풍족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이곳에서 일하고 싶어하는 원주민이 꽤 있었으니까.

자신들이 사용하지 않는 땅을 이용하게 허락하는 대가로 부족민들이 풍족하게 살 수 있었으니 대추장들로서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렇게 웅크린 늑대가 새남포에 방문한 대추장들과 열심히 협상하고 있을 때 정성국은 모든 협상을 웅크린 늑대에게 맡기도 오랜만에 휴식을 취했다.

그렇게 새남포에서 며칠을 머문 후 슬슬 새김포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할 무렵.

새남포로 다가오는 선단이 보였다.

* * *

“이주 선단? 지급 기범선으로 이루어진 이주 선단 말인가?”

정성국은 관사에서 전아라와 하얀 들꽃과 함께 담소를 나누다가 갑자기 호위대장이 전해준 보고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습니다. 전하. 방금 선착장에 정박했다고 합니다.”

호위대장의 보고에 전아라가 정성국을 보고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이번 이주 선단에는...”

“그래. 평국이가 올 거라고 했었지? 이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는데.”

그러면서 정성국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에 전아라와 하얀 들꽃이 정성국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정성국은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 굳이 따라올 필요 없어. 여기서 쉬고 있어. 평국이 데리고 이곳으로 올 테니.”

“알았어요. 오라버니.”

정성국은 그가 머물고 있던 병영 안쪽의 관사에서 나와 근처에 있는 선착장으로 이동했다.

선착장에는 방금 막 도착한 것으로 보이는 지급 기범선들이 정박해 있었다.

그리고 석탄을 비롯한 각종 물자를 지급 기범선에 보급하려는 항구노동자로 부산한 선착장 한쪽에서 항구 관리원과 대화를 나누는 정평국의 모습이 보였다.

오랜만에 본 동생은 그동안 일에 치여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지 않을까 싶었던 예상과는 달리 오히려 선실에서 푹 쉬어서 그런지 의외로 건강해 보였기에 안도하면서 다가간 정성국이었다.

정평국은 항구 관리원과 대화를 하다 누군가 다가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오랜만에 보는 형 정성국의 얼굴을 보고 반가운 기색이 역력하면서도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전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정성국은 자신을 보자마자 고개를 숙이고 있는 동생을 보고 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전하는 무슨. 그냥 형님이라고 불러라. 고개 들고.”

“하지만...”

정성국의 말에 무어라 반박하려는 정평국의 말을 단호하게 자르는 정성국이었다.

“됐고. 공식 석상에서라면 모를까 사석에서 굳이 전하라고 호칭할 필요는 없어. 말도 예전처럼 좀 편하게 하고.”

정평국은 썩 내키진 않았지만, 형의 단호한 기색에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형님.”

정성국은 오랜만에 본 동생을 보고 반가워하며 그동안의 안부를 물었다.

“그래. 그동안 잘 지냈느냐? 마음에 둔 처자는 생겼고?”

이에 정평국은 살짝 뚱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잘 지냈습니다. 형님. 계속해서 늘어나는 일에 파묻혀 살았을 뿐이죠.”

개척촌에서 일하느라 바빴다는 소리에 정성국은 혀를 찼다.

“쯧쯧...전에도 말했던 것 같은데? 그건 별개라고?”

그러자 정평국이 울컥한 표정으로 정성국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일이 좀 많아야 말이죠. 그동안 집무실의 지박령으로 불릴 정도였단 말입니다.”

이에 정성국은 사서 고생이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그 일을 맡을 인재를 키우라니까...”

“인재를 키우고 열심히 업무를 나누어도 계속 일이 생기는걸 어찌합니까. 거기에 아이누인들을 지원하느라 업무가 늘어나기도 했고 최근에는 포로나이 항 옆에 원상의 전용 선착장을 따로 만드느라...”

정성국의 말에 울컥한 정평국이 얼마나 일이 많은지 하소연하기 시작했고 잠시 이를 듣던 정성국이 의외의 이야기에 그의 말을 끊었다.

“음? 무슨 일이라도 있나? 포로나이 항에 원상의 전용 선착장을 만들겠다고? 포로나이 항이 그렇게 붐벼? 혹시 다른 서양 선박이라도 드나드는 게냐?”

포로나이 항에 원상의 전용 선착장을 만들겠다는 것은 그만큼 포로나이 항이 비좁다는 의미였기에 정성국은 자신이 들렀던 포로나이 항을 떠올리고 살짝 놀랐다.

비록 주변 섬에서 아이누인들이 교역을 위해 배를 타고 오지만 그래 봐야 조각배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혹시 아이누 섬의 위치가 서양인들에게 알려진 것은 아닌가 싶어 묻자 정평국은 손을 내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다만 최근에 한성 지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서인 쪽에 물건을 대는 상인을 통해 개척촌에 배가 너무 많이 정박해 있는 것이 아니냐며 조금은 분산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답니다.”

“그건 또 무슨...고작해야 10척 내외 아닌가?”

정성국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조선의 번화한 포구가 아니더라도 웬만한 포구에는 수십 척의 선박은 존재했으니까.

하지만 정평국은 오히려 이해가 간다는 듯 그들을 두둔했다.

“대신 크기가 크잖습니까. 너무 눈에 띈다는 거겠죠. 일단 공식적으로는 작은 포구 수준인데 대선이 10척이나 정박하고 있으니...”

이에 정성국은 처음 인급 함선을 타고 제물포에 정박했을 때 꽤 시끄러웠던 것을 기억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해보니 고작 10척이라고 하더라도 대부분은 지급, 천급 함선일 테니 확실히 눈에 띄긴 할 것 같았다.

특히나 인급 함선은 주로 조선의 내해를 돌아다니느라 바쁘지만, 지급, 천급 함선의 경우는 이주민을 태우고 대양을 건너는 시기가 아니면 주로 개척촌에 정박하고만 있으니.

이에 정성국은 표정을 풀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참...그래서 포로나이 항에 원상의 전용 선착장을 만들고 그곳에 배들을 대부분 정박시키겠다는 뜻이구나?”

“그렇습니다. 형님. 어차피 예정된 일이긴 했습니다. 계속해서 선박을 건조할 예정이라 배가 점점 늘어날 테니 이를 분산시킬 항구가 필요하긴 했으니까요.”

이에 정성국은 동의했다.

특히 지급, 천급 함선의 경우에는 겨울부터 봄이 올 때까지 항구에 계속 정박해 있어야 하는데 개척촌의 항구를 확대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런 관점에서 아이누 섬의 포로나이 항은 좋은 대안이 될 수 있었다.

조선의 다른 포구에 선박을 분산시키기에는 아무래도 부담스러웠으니까.

조선의 내해를 돌아다니며 물자를 수송하는 인급 함선을 제외하면 다른 선박들은 먼바다를 항해해야 하는 만큼 해적을 대비해 화포를 장착했기에.

비록 조선 주변에선 포문을 닫아두고 포 갑판을 봉쇄하긴 하지만 다른 항구에 정박시키기에는 아무래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흐음...그렇기는 하지. 한성의 눈치를 봐야 하니 개척촌을 더 확대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조선의 다른 포구를 이용하기도 부담스러우니. 헌데 한성에서 다른 말은 없고? 이번에 꽤 많은 조선인을 이주시켰잖아?”

이번 이주 선단을 통해 몇 달 사이에 조선에서 북미왕국으로 이주한 이주민의 숫자만 해도 1만이 가볍게 넘는다

그런 만큼 혹시 한성에서 이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나 싶어 정평국에게 물어보았지만 정평국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별다른 말은 없었습니다. 형님.”

“흐음...”

공식적으로 개척촌에 대해 조정에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원상과 인정(人情)이라고 쓰고 뇌물이라고 읽는 무언가를 주고받는 서인들이 이를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헌데도 이를 언급하기보다는 오히려 배를 분산시키라는 이야기만 했다는 것은 유민들을 빼돌리는 것을 일단은 묵인하겠다는 뜻이라고 생각한 정성국이었다.

유민은 결국 먹고살기 위해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난 존재였다.

국가의 입장에서는 이런 유민들을 파악해 다시 양민으로 정착시켜 세금을 걷어내는 것이 최선이겠으나 그게 쉬울 리가 없었다.

먹고살기 힘들어 고향에서 도망친 유민들이 순순히 이를 받아들일 리도 없었고.

그런 유민들을 원상이 빼돌리니 그냥 모른 척하는 것이다.

특히 이 시기 이양법의 확산으로 노동력이 그렇게 부족하지도 않은 상황이었으니.

아니었다면 분명 제재했을 것이라고 생각한 정성국이었다.

그리고 정평국도 정성국과 비슷한 의견을 내보였다.

“아마 유민들이라 일단은 두고 보는 것 같습니다.”

“다행이긴 한데...조선에 유민이 아직도 많나?”

정성국이 파악하기로는 북미왕국으로 이주한 유민만 하더라도 2만에 가까웠기에 묻자 정평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아직도 백두대간에 유민들이 꽤 많습니다.”

“그런가.”

농민들을 위해 삼남 지방엔 고구마를, 그 위쪽엔 감자를 퍼트렸음에도 불구하고 먹고살기 힘들어 유민이 되려는 농민들이 많다는 뜻이었기에 잠시 씁쓸한 미소를 지은 정성국이 이내 분위기를 바꾸듯 정평국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건 그렇고. 아무튼, 북미왕국에 온 것을 환영한다. 네가 할 일이 참 많아.”

이에 정평국의 안색이 구겨지면서 슬며시 투덜댔다.

“개척촌에서도 일하느라 바빴는데 이곳에선 좀 적당히 하면 안 되겠습니까. 최소한 휴일은 보장해 주시죠. 형님.”

그러자 정성국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걱정 말아라. 휴일을 꼬박 챙겨줄 테니.”

정성국의 대답에 정평국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형을 바라보았다.

“어? 정말입니까? 정말로?”

“그럼 그럼.”

정성국은 동생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오랫동안 일을 시켜야 하니 건강관리는 필수지.’

* * *

지급 기범선으로 이루어진 이주 선단은 새남포에서 물자를 보급받고 바로 출항했다.

그리고 이 선단에 정성국과 지급 전선 역시 동행했고.

정평국은 기존에 타고 왔던 배에서 내려 형 정성국과 함께 지급 전선에 올라타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평국이 보고서에 담지 못했던 개척촌의 이야기와 원상의 현황에 관해 이야기했다면 정성국은 북미왕국에 대해서 적당히 이야기해주었다.

이를 다 듣고 정평국은 새삼스럽다는 눈초리로 정성국을 바라보았다.

“3년 만에 그렇게 거대한 영토를 얻을 줄은...거의 조선에 비견할 정도라니...역시 형님은 대단하십니다.”

하지만 정성국은 피식 웃었다.

“그래 봐야 북미왕국의 인구수는 25만 수준이니 국력은 비교가 안될 거다.”

비록 땅덩이의 크기는 비슷하다고는 하지만 현시점에서 조선의 인구수가 대략 천만 명 정도로 짐작하고 있는 정성국이었기에 북미왕국의 인구수를 볼 때마다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에 정평국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물론 그렇긴 하지만 그건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 아니겠습니까. 식량도 충분하니 몇 세대만 지나면 인구는 자연스럽게 늘어날 테고요. 거기에 북미왕국의 기술력을 생각해보면 신생 국가치고는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허면 전 이곳에서 무슨 일을 맡아야 합니까?”

일이 많다면서 징징거려놓고 이곳에서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관심을 두는 동생을 보고 워커홀릭이라고 혀를 찬 정성국이 입을 열었다.

“그동안 일이 많았다며? 일단은 조금 쉬어라. 그리고 호위대원을 붙여줄 테니 직접 북미왕국을 좀 돌아다니면서 파악을 하고. 그 후에 이야기하도록 하자.”

“형님...정말로...”

정성국의 말에 무척이나 감동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정평국이었다.

그런 동생을 보고 정성국은 생각했다.

‘뭐...이 녀석이 북미왕국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해야 일을 맡길 수 있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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