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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79화 (79/850)

79화

지급 전선을 타고 새남포로 항해하는 동안 정성국과 전아라는 오랜만에 휴식을 취하며 시간을 보냈다.

선실에 꽤 좁은 관계로 주로 갑판 위에서 바람을 쐬거나 지급 전선에 존재하는 적당한 크기의 회의실을 차지하고 그 안에서 티타임을 갖기도 했다.

그리고 정성국을 따라 지급 전선에 탑승했던 하얀 들꽃은 정성국보다는 의외로 전아라와 붙어 다녔다.

평소에는 서로의 일이 바빠 마주치기도 힘들었기에 이를 만회라도 하겠다는 듯이 말이다.

정성국으로선 둘이 친해서 나쁠 것은 없었고 애초에 항해 중에 하얀 들꽃이 할 일은 거의 없었기에 내버려 두었다.

그렇게 망중한을 즐기기를 잠시.

드디어 새남포에 거의 도착했다고 수병이 알려왔다.

* * *

“와! 정말 멋지네요!”

“그러게요. 정말 아름다운 곳이네요.”

지급 전선이 새남포의 항구에 도착했을 시기는 슬슬 노을이 질 무렵이었다.

외해에서 만 안으로 들어갈 때부터 갑판 위로 올라와 주변 경치를 구경하던 정성국과 일행들은 노을빛에 물든 바다와 주변을 둘러싼 녹음으로 우거진 수해를 바라보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렇게 한참을 주변 풍경에 취해있을 때 저 멀리 새남포가 보이기 시작했다.

수해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항구 마을과 그를 둘러싼 목책이 꽤 인상적인 새남포였다.

어떻게 보면 새김포와도 꽤 비슷한 느낌이었다.

내해 안쪽에 위치했고 기존의 숲을 개간해서 항구를 만들었으니 말이다.

다만 새김포와는 달리 마을을 둘러싼 목책과 선착장 옆에 보이는 커다란 병영 때문에 넓고 개방적인 느낌의 새김포와는 달리 조금은 폐쇄적으로 보이기는 했다.

‘뭐 당분간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무슨 일이 발생하면 곧바로 지원해줄 수 있는 새김포와는 달리 이곳은 외따로 떨어져 있었기에 만약의 경우 알아서 생존해야 했기에 최소한의 방어책으로 목책은 필수였다.

비록 이곳의 원주민들은 호의적이었지만, 이곳이 발전함에 따라 원주민들의 생각이 어떻게 바뀔지는 또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그렇게 정성국이 새남포를 보고 생각에 잠겼을 때 지급 전선이 새남포의 선착장에 정박했다.

그리고 지급 전선이 보였을 때부터 혹시나 하고 경계하던 새남포에 머물던 경비대원들은 곧 북미왕국의 배라는 것을 깨닫고 혹시 모를 보급품을 기대하며 선착장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급 전선이 정박하고 정성국이 먼저 지급 전선에서 내리자 이를 알아본 경비대원들이 기겁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조장들이 나서서 경비대원들을 정렬시키기 시작했고.

이를 보고 정성국은 국기와 더불어 자신을 상징하는 깃발을 만들긴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굳이 나를 상징하는 깃발이라기 보다는...왕실기 정도는 만드는 것도 괜찮겠네. 그런 걸 매달아두면 멀리서도 내가 타고 있다는 것을 알 테니 이렇게 어수선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 그에게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정성국이 고개를 돌리자 웅크린 늑대가 보였다.

“어라?”

“이곳에 오실줄은 몰랐습니다. 전하.”

외무청 소속의 웅크린 늑대가 정성국을 바라보고 고개를 숙였다.

정성국은 그의 인사를 받아주면서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웅크린 늑대? 이곳에 있었나?”

“예. 저번 정기선을 통해 잠시 방문했습니다.”

“그래?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니지?”

웅크린 늑대는 외무청의 이인자에 가까웠다.

그런 그가 직접 이곳을 방문했다는 소리에 정성국이 살짝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곳 새남포를 축으로 주변의 원주민들과 교류해나가면서 그들을 끌어들일 생각이었기에 그들과의 관계는 무척이나 중요했으니까.

이에 웅크린 늑대는 걱정 말라는 듯 손을 내저으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이야기했다.

“그럼요. 외무청의 업무 중의 하나인 이곳 원주민들의 대추장과 교류하기 위해 방문했을 뿐입니다.”

“그렇군. 난 또 무슨 일이 있나 했네.”

정성국이 별문제 없다는 말에 다행이라는 표정을 짓자 웅크린 늑대는 정성국이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를 깨닫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하하하. 이곳 새남포의 개발이 끝났으니 우리 북미왕국을 도와준 주변 부족에게 사례도 좀 하고 대추장들과 이런저런 협상도 하기 위해 잠시 방문한 것 뿐입니다. 외무청의 통상 업무이지요. 아. 더위를 피해 피신온것이기도 합니다. 여름엔 새김포보다는 이곳에 머무는 게 더 쾌적하거든요.”

웅크린 늑대는 농담 삼아 덧붙인 말이었지만 정성국은 왠지 농담처럼 들리지는 않았기에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아...그건 그렇겠군.”

정성국이 기억하는 시애틀은 안개가 자주 끼는 우중충한 도시로 기억하고 있고 그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최소한 여름에는 달랐다.

기후적 특성 때문에 평소에는 영국처럼 자주 안개가 끼거나 부슬비가 내리곤 하지만 여름만큼은 안개는커녕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씨에 가까웠고 조선과는 달리 습도도 비교적 낮은 편이었다.

거기에 이곳은 새김포보다 훨씬 북쪽에 자리 잡고 있어 기온이 낮은 편이었으니 여름을 보내기엔 새김포보다는 새남포가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이곳에 여름 궁전이라도 지으면 좋을 거 같긴 한데...그럴 여유가 언제쯤 생기려나.’

정성국은 과연 자신이 죽기 전에 그럴 여유가 있을까 싶었기에 피식 웃었다.

그리고 정성국이 생각하기에는 더위를 피해 정무를 볼 여름 궁전을 지을 바에는 차라리 기술 발전에 집중해서 선풍기나 에어컨 같은 냉방기를 발명하는 게 나아 보였고.

그때 정성국의 귓가에 웅크린 늑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병영 안쪽에 관리들이 지내는 관사가 있습니다. 불편하시겠지만 그곳에서 머무시지요.”

“그러도록 하지.”

* * *

새남포를 둘러본 정성국이 웅크린 늑대를 보며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괜찮은 곳이군. 거기에 이곳은 천혜의 항구이고.”

이에 웅크린 늑대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그렇습니다. 당장은 이주 선단의 보급항의 역할을 위해 만들어진 조그마한 항구에 가깝지만, 나중에는 북쪽의 중심 도시로서 충분히 역할을 해 줄 것입니다.”

“그렇겠지. 저들은 주변의 원주민들인가?”

정성국 역시 웅크린 늑대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모피를 어깨에 메고 새남포 안으로 들어오는 원주민을 가리켰다.

“그렇습니다. 보아하니 수쿼미시 족의 원주민이군요. 저들 말고도 스노호미시 족과 두와미시 족도 새남포에 자주 들르곤 합니다.”

“저들이 이곳에 온 것은 교역 때문이겠지?”

“그렇습니다. 모피를 팔아 각종 생활 물품 등으로 바꾸어 부족으로 가져가곤 합니다.”

이곳의 원주민들 대부분은 수렵 생활을 하는 만큼 모피를 제외하면 딱히 교역할 만한 것이 없긴 했다.

이에 정성국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입을 열었다.

“그렇군. 허면 원주민과의 교류는 교역을 통해서만 진행하는 건가?”

“아닙니다. 이곳 새남포를 건설할 때 약간의 원주민을 식량을 주어 고용하긴 했습니다. 개척단 소속의 건설노동자 처럼요.”

“그래? 원주민들의 반응은 어떻던가?”

정성국이 원주민 부족의 반응을 궁금해하자 웅크린 늑대가 슬쩍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일하는 대신 식량을 제공하니 건설노동자들은 만족해하는 편입니다. 다만 이번에 새남포의 건설이 대략 완료되어 이곳에 왔던 개척단 대부분이 새남포를 떠나고 있어서 조금 걱정하긴 하더군요.”

“일자리가 사라질까 봐?”

“그렇지요.”

이는 기존의 수렵 생활을 하는 것보다 이곳에서 건설노동자로 일하는 것이 더 풍족하게 살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기에 새남포의 건설이 완료되고 개척단이 떠나자 양질의 일자리가 사라질까 봐 걱정이라는 이야기에 피식 웃은 정성국이 웅크린 늑대를 바라보았다.

“그럼 어쩔 셈인가?”

그러자 웅크린 늑대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것 때문에 주변 부족의 대추장을 만나 논의를 했고 합의를 했습니다. 이곳 새남포의 영역을 동쪽의 호수까지 확장하기로 말입니다.”

웅크린 늑대의 답변에 정성국은 피식 웃었다.

어쩐지 외무청의 이인자라 할 수 있는 웅크린 늑대가 직접 이곳에 왔다 했더니만.

단순히 주변 부족과 친분을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남포의 영역을 확대하기 위해 주변 부족과 협상하려고 왔음이 분명했다.

전생의 시애틀은 서쪽의 퓨젓 사운드 만과 동쪽의 워싱턴 호 사이의 좁은 지협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새남포의 경우는 서쪽의 퓨젓 사운드 만에 인접한 조그마한 항구 마을에 가까웠다.

그리고 웅크린 늑대는 협상을 통해 새남포의 영역을 크게 확장한 것이고.

“동쪽의 호수 인근을 개간할 생각인가?”

“그렇습니다. 전하. 대신 개간과 경작 모두 원주민들을 고용하는 형태로 진행해 원주민의 고용을 늘릴 생각입니다.”

웅크린 늑대는 자신들이 처음 조선에서 왔던 이주민과 엮였던 것처럼 이곳 주변의 원주민들을 북미왕국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했다.

나쁠 것은 없었기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자체적으로 식량을 생산하는 것도 나쁠 것은 없겠지. 그리고 이곳은 목재 자원이 무척 풍부한 모양이니 이를 이용하는 것은 어떨까 싶네.”

“허면?”

정성국은 잠시 제지공장을 떠올렸지만 아직은 시기상조였다.

목재를 분쇄하여 화학 처리를 통해 불필요한 성분을 제거하고 표백해야 하는데 아직 그런 기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건 아라와 함께 연구를 좀 해봐야겠고...결국 만만한 건 제재소를 세우고 이곳에 조선소를 세우는 것 정도인가?’

“음...이곳에도 조선소를 짓도록 하지. 그리고 목재를 적당히 가공해서 새김포로도 보내게 제재소도 세우고.”

이에 웅크린 늑대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럼 더 많은 원주민을 끌어들일 수 있겠군요. 알겠습니다. 전하.”

* * *

지급 함선으로 이루어진 이주 선단은 오랜 항해 끝에 나하 항에 도착했다.

이주 선단이 선착장에 정박하자 마중 나오는 유구의 관리들을 보면서 이번 이주 선단의 총책임자인 이대수 선장은 왠지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에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뭔가 평소랑은 다른...아.’

비록 이곳 나하항에 도착한 것은 이번이 3번째지만 왜 평소와는 다르다고 느꼈는지 깨달았다.

평소엔 이주 선단이 도착하면 유구인 관리 두어 명이 선착장에 마중 나와 입항료를 받고 물자를 제공하곤 했었다.

헌데 이번엔 마중 나오는 인원이 꽤 많았다.

문제는 유구인 관리를 따라오는 인원 대부분이 칼을 찬 왜인으로 보였다는 점이다.

어째 분위기가 수상쩍었기에 잠시 인상을 찡그렸던 이대수 선장은 배 위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부선장에게 슬쩍 손짓했다.

애당초 이곳은 왜인들도 있어 기항하면서도 항상 경계를 늦추지 않았었기에 이대수 선장의 손짓에 부선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선원들에게 경계를 늦추지 말 것을 당부했다.

이에 선원들은 들고 있던 갑오 소총에 탄환을 장전하기 시작했고.

이를 확인한 이대수 선장은 다시 시선을 돌려 자신에게 다가오는 유구 관리와 왜인들을 차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안녕하십니까. 나하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대수 선장에게 다가온 유구 관리가 평소처럼 입을 열었다.

이에 이대수 선장도 유구 관리에게 인사하며 용건을 전했다.

“안녕하십니까. 식수를 조금 보충하고자 입항했습니다.”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도록 하지요.”

유구 관리의 말에 뒤쪽에 서 있던 유구인이 선착장 한쪽에 있는 항구노동자들에게 손짓하자 평소처럼 항구노동자들이 식수가 담긴 통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뒤쪽에 칼을 찬 왜인들이 함께 다가왔기에 혹시 배를 탈취하려고 그러나 경계했던 이대수 선장은 이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랑 같은데...그럼 저들은 왜 따라온 거지?’

그때 유구 관리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이대수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예. 말씀하시지요.”

“혹시 이 선단의 목적지를 알 수 있습니까?”

뒤쪽의 왜인들이 집중하는 것을 느낀 이대수가 직감했다.

‘이거구나. 왜인들이 궁금해하는 것이. 헌데 왜? 설마 우리가 아이누인들을 지원하는 것을 눈치 챈건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오히려 이대수는 유구 관리를 의심스러운 듯 바라보며 말했다.

“흐음...그건 왜?”

“하하하. 그냥 이 정도 선박에 실린 물자가 어디로 가는지 궁금해서 말입니다. 혹시 북동쪽으로 가는겁니까?”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질문을 하는 유구 관리를 보고 이대수가 슬쩍 둘러댔다.

“우린 북서쪽으로 갑니다.”

“아하. 알겠습니다. 답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유구 관리는 그 정도로 질문을 마무리 지었지만 뒤쪽의 한 왜인이 나서서 질문했다.

"혹시 북동쪽으로 향하는 배를 본 적은 있습니까?”

"북동쪽? 글쎄...그쪽은 왜국의 영토잖소...교역을 원하는 남만인들이 주로 간다고 알고 있는데...?"

그렇게 둘러대자 유구 관리가 난처한 표정을 짓다가 대화를 마무리했다.

“아하. 그렇군요. 아. 식수는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이야기하는 동안 항구노동자들이 식수가 담긴 통을 가져왔고 이대수는 이를 확인한 후 선원들에게 손짓했다.

그리고 품에서 은이 담긴 주머니를 꺼내 유구 관리에게 건넸다.

“예. 충분합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도록 하지요.”

“좋은 항해 되시길 기원합니다.”

유구인 관리는 인사 후 돌아갔고 뒤쪽의 왜인들은 조금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잠시 선단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선원들이 식수가 담긴 통을 배에 싣는 동안 이대수는 차가운 표정으로 그런 왜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어째 당분간은 조심해야겠군. 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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