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그 후로 빠르게 시간이 흘렀다.
하와이의 원주민에게 보급할 여러 물자를 실은 천급 함선으로 이루어진 선단이 개척촌을 향해 떠났고.
오랜만의 휴식을 만끽하던 제자들과 장인들은 곧 연구청에 배치되어 갈려 나가기 시작했다.
며칠후 지급 기범선으로 이루어진 이주 선단이 도착해 이주민을 토해냈고.
잠시간의 정비를 마친 지급 기범선 역시 개척촌을 떠났지만, 이들은 증기기관을 이용해 기존의 항로와는 다르게 그들이 이용했던 북방 항로를 되짚어 올라갔다.
그 후로 지급 함선으로 이루어진 선단이 이주민을 내려놓았고.
지급 함선이 새김포에서 출항한 후 북미왕국에 도착한 이주민들이 머무는 임시 거주지가 비었을 무렵.
처음으로 한 해에 두 번이나 대양을 가로지른 천급 함선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 * *
“고생했네.”
강렬한 햇살을 피해 곧바로 정성국의 집무실로 도착한 김봉길을 보고 정성국이 한 말이었다.
이에 김봉길은 씩 웃으면서 대답했다.
“예. 확실히 고생하긴 했습니다. 전하.”
정성국은 대충 날짜를 셈해보고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거 천급 함선이 생각보다 빠르군.”
이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김봉길이었다.
처음 천급이 건조된 후로 몇 번 시험운항을 한 적은 있었지만, 그 이후로 이주 선단의 기함이 되어 지급 함선에 맞추어 이동했었기에 천급 함선의 속도를 제대로 실감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천급 함선으로 이루어진 선단은 자신들의 예상보다도 빨랐다.
“그렇더군요. 중간에 적당히 휴식을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50일 만에 왕복을 한 셈이니.”
지급 함선으로 개척촌에서 출발해 이곳 새김포까지 걸리는 시간이 평균 45일인 것을 생각해보면 굉장한 속도였다.
“아. 그러고 보면 지급 기범선이 북방 항로를 되짚어 항해하기로 했는데 혹시 자네 이곳으로 올 때 지급 기범선과 마주쳤는가?”
처음으로 북방 항로를 이용해 개척촌으로 돌아가는 지급 기범선을 궁금해하는 정성국의 반응에 김봉길은 조금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마주친 적은 없습니다만 봉길섬에 도착했을 때 그들의 행적을 듣기는 했습니다. 저희가 봉길섬에 도착하기 일주일 전쯤에 출항했다고. 아마 지급 기범선은 봉길섬에서 카무이 반도로 향했기에 저희와는 조금 엇갈린 거겠죠.”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별문제 없다는 김봉길의 보고에 정성국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가. 다행이군.”
“너무 걱정하지 마시죠. 새로운 항로도 아닌데요.”
김봉길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의 주제를 돌렸다.
“그렇기야 하지. 그럼 다른 이야기를 해보세. 하와이는 어떻던가?”
그러자 김봉길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보고 정성국은 하와이에서의 일이 잘 풀렸겠구나 싶었다.
“제가 예상했던 대로 북미왕국의 지원을 받은 부족이 섬 대부분을 장악했습니다.”
“그래?”
“예. 거기에 이번에 물자를 또 지원해줬으니 충분히 섬을 장악할 수 있을 겁니다. 그들도 추가로 물자를 지원해주자 무척이나 고마워하더군요.”
“그런가.”
정성국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자신들이 지원해 준 부족이 오하우섬을 장악한 만큼 천혜의 항구라 할 수 있는 진주만인근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훗날 태평양을 장악하고 남태평양으로 뻗어 나갈 수 있게 되었고 말이다.
“예. 그리고 아예 제대로 교역했으면 하는 눈치더군요.”
“교역이라...설마 계속해서 무기를 원하는 건가?”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하와이섬을 장악한 카메하메하 1세가 하와이 제도에 모든 섬을 점령하겠다고 나섰던 것을 기억하고 있던 정성국은 설마 하는 생각에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김봉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김봉길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면서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전하. 딱히 하와이 제도 전체를 장악하겠다는 생각은 없는 눈치였습니다.”
“허면...”
“식량을 원하더군요. 저희가 지원해주었던 쌀과 밀을. 그리고 생활에 필요한 각종 물품도요.”
이에 정성국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잠시 그곳에서 보급을 제외하고 교역할 만한 것이 있나 고민했다.
“흐음...그곳에 백단목이 있다고 했던가?”
“예. 꽤 많이 자생하고 있더군요.”
백단목은 향목으로 이용되는 열대성 상록수로 원산지는 인도이지만 인도네시아를 비롯해 태평양 여러 섬에도 넓게 자생하고 있었다.
물론 인도의 백단목보다 품질이 떨어지긴 하지만 백단목 자체가 동아시아에서 최고로 치는 향목이었기에 충분히 가치가 있었다.
“흐음...잘 되었군. 어차피 이곳에서 개척촌으로 갈 땐 거의 빈 배로 출항하지 않았던가. 적당히 저들과 교역할 식량을 챙겨서 백단목으로 바꾸면 소소하게 돈벌이는 되겠군.”
백단목은 나무에서 은은하게 좋은 향기가 나는 만큼 주로 향료나 향불 재료로 사용하기도 하고 불상이나 목세공품의 재료로 사용되는 만큼 개척촌으로 가져가기엔 괜찮은 교역품이었다.
“뭐 그렇지요. 다른 것들도 있으면 좋으련만.”
살짝 아쉬워하는 김봉길의 말에 정성국은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하와이하면 파인애플과 사탕수수, 커피가 유명하긴 한데...이거 지금 시기엔 하와이엔 하나도 없지 않나? 그나마 사탕수수 종자는 가지고 있으니 다행이로군.’
파인애플의 원산지는 남아메리카 북부의 열대 지방이었고 커피의 원산지는 에티오피아인 만큼 아직 하와이에는 이러한 작물이 없었다.
정성국은 그나마 오키나와에서 구했던 사탕수수를 떠올리며 김봉길에게 입을 열었다.
“교역할 물품을 만들어주면 되겠지. 농업 연구소에 이야기해 둘 테니 사탕수수의 종자를 가져가게.”
“사탕수수를요? 하와이에서 재배하라는 뜻입니까?”
“그렇지.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적당한 기후일걸세. 그리고...”
파인애플이야 당장 종자를 구할 길도 없었고 과일이었기에 유통하기 어려운 만큼 관심을 거뒀지만, 커피는 달랐기에 정성국은 커피를 어디서 구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그가 기억하기로는 1500년대에 이슬람 사회에 커피가 널리 퍼졌고 이에 보수적인 이맘이 커피를 금지하기도 했다고 알고 있는 만큼 이미 이슬람 지역에는 커피가 널리 퍼졌으리라고 보았다.
커피를 구하려면 결국 동남아를 거쳐 아랍 지역까지는 가야 했다.
‘기호품을 구하자고 해적 소굴에 가까운 동남아를 거쳐 아랍까지 원상의 배를 보내는 건 인력 낭비지. 일단 원상에 이야기해서 거래하는 서양 상인들을 통해 구해보라고 말을 해둬야겠군.’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김봉길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사탕수수 말고 또 하와이에서 재배할 다른 작물이 있습니까?”
“커피라고...각성효과가 있는 검은 음료인데 이 종자를 좀 구해서 하와이에서 재배했으면 하네.”
처음 듣는 음료의 이름에 고개를 갸웃하는 김봉길이었다.
“흠...그건 어디서 구해야 합니까?”
“원산지는 저쪽 아랍 지역이라 직접 구하기는 어려울 것 같고...원상을 통해 서양 상인에게 의뢰하는 방식으로 종자를 구해보도록 하게.”
정성국의 말에 김봉길이 알았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알겠습니다. 원상에게 전하의 명령을 전하도록 하지요. 허면 일단은 원주민에게 사탕수수의 재배를 권해야겠군요.”
“그렇지. 원주민들에게 잘 설명하도록 하게. 사탕수수를 재배해서 필요한 물품과 교환하자고.”
“알겠습니다. 전하.”
* * *
“그럼 내년에 뵙겠습니다. 전하.”
김봉길이 선착장까지 배웅 나온 정성국에게 마지막으로 인사했고 정성국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조심히 가게나. 그럼 내년에 보자고.”
“알겠습니다. 전하.”
이 말을 끝으로 김봉길은 천급 함선에 올라탔고 곧 닻을 올리고 돛을 활짝 핀 후 선착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선착장에서 이를 잠시 바라보던 정성국은 곧 선착장을 빠져나와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올라탔다.
정성국이 탄 마차는 곧장 움직이기 시작했고 잠시 후 마차가 멈춰섰다.
정성국이 마차에서 내리자 그의 눈앞에는 출항준비로 부산해 보이는 지급 전선이 보였다.
그가 도착한 곳은 이주 선단이 전용으로 사용하는 격리되어있는 선착장이 아닌 기존의 새김포의 선착장이었다.
정성국은 곧장 지급 전선에 올라탔고 갑판 한쪽에서는 전아라와 하얀 들꽃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까르르 웃고 있었다.
그러다 정성국을 발견하고 전아라와 하얀 들꽃이 정성국에게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전하.”
일단은 공식 석상이라고 생각했기에 존대하는 전아라를 보고 정성국은 미소를 지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길래 그리 즐거워 보이느냐.”
“그냥 일상의 이야기를 좀 하고 있었습니다. 전하.”
“그래?”
의외로 친하게 지내는 전아라와 하얀 들꽃을 보고 정성국은 내심 서로 다투지 않고 친하게 지내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번 항해에 전아라가 동행한 것도 하얀 들꽃의 조언 때문이었다.
최근 새남포의 건설이 모두 완료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왔고 북미왕국의 영역에 멀찍이 떨어져 있는 새남포를 한 번쯤 방문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 새남포를 거점으로 새남포 주변의 원주민을 끌어들일 계획인 만큼 현지 분위기를 직접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새남포 인근은 처음 정성국이 북미 대륙을 방문했을 때 방문할 예정이었으나 일정의 문제로 결국 방문하지 못했었기에 직접 방문해보고 싶기도 했다.
해서 정성국은 지급 전선의 장거리 항해 훈련을 겸해서 새남포를 방문하기로 했다.
자연스럽게 정성국의 비서에 가까운 하얀 들꽃 역시 일행에 포함되었고.
헌데 하얀 들꽃이 정성국에게 조언했다.
이번 항해에 전아라도 함께 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분명 전아라가 중요한 일을 하는 것은 아는데 이곳에 온 후로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계속 일만 하는 것이 조금 안타깝다고.
이번 외유에 가능하다면 전아라와 함께 바람을 쐬는 것이 좋겠다고.
정성국이 생각해보니 다른 제자들도 그렇지만 특히 전아라는 가끔 정성국과 보내는 시간을 제외하면 일하느라 바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해서 전아라에게 실제 포탄 사용 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을 파악하라는 명령과 함께 이번 항해에 포함시켰다.
처음 그 명령을 전아라에게 이야기하자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함께 배를 타고 여행을 하자는 의미라는 것을 파악하고 좋아 어쩔 줄 모르던 전아라였다.
이를 보고 자신의 무심함에 반성하면서도 이런 조언을 해준 하얀 들꽃에게 새삼 고마웠고.
해서 잠시 다정한 눈길로 전아라와 하얀 들꽃을 바라보고 있을 때 뒤쪽에서 누군가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정성국이 뒤를 돌아보자 그에게 다가오다 핑크빛 분위기에 잠시 멈춰선 함장이 보였기에 정성국은 생각을 멈추고 일단 함장과 이야기하기로 하고 그녀들에게 말했다.
“그럼 계속 이야기를 나누거라. 난 함장과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
“알겠습니다. 전하.”
정성국이 함장에게 다가가자 함장이 고개를 숙이며 보고했다.
“승선을 환영합니다. 전하.”
“반갑소. 함장. 출항준비는 끝났소?”
“그렇습니다. 전하.”
“그럼 바로 출항하도록.”
“알겠습니다. 전하.”
정성국의 명령이 떨어지자 함장은 곧장 선원들에게 명령해 지급 전선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리 보일러를 예열이라도 해둔 듯 닻을 올리자마자 슬금슬금 선착장을 빠져나가는 지급 전선은 곧 모든 돛을 활짝 펴고 빠르게 바다를 가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