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정성국과 전아라가 마차에서 내렸을 무렵 저 멀리서 이곳으로 걸어오는 하얀 들꽃과 제자들이 보였다.
분명 정성국과 전아라가 마차를 타고 먼저 출발한 것은 사실이지만 시내에서는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해 마차를 천천히 몰기도 했고 이곳에 도착하고 나서 마차 안에서 전아라와 하얀 들꽃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했기에 걸어오는 하얀 들꽃과 제자들이 어느새 도착한 것이다.
이에 바로 집무실로 들어가려던 정성국과 전아라는 잠시 저들을 기다렸다.
그때 하얀 들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전아라가 정성국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정성국이 오랜만에 전아라에게서 풍기는 연한 풀 내음에 취했을 무렵 정성국의 귓가에 전아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라버니.”
“...응?”
“잠시 저 여인과 이야기해도 괜찮을까요?”
“...어?”
개척촌에서 전아라와 지냈던 기억이 떠올라 미소짓다가 전아라의 목소리에 담긴 내용을 파악하고 움찔한 정성국이었다.
전아라는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쿡쿡거리면서 웃다가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설마 제가 저 여인에게 투기라도 할까 걱정인가요.”
“아...그게 아니고...”
전아라는 정성국을 보고 잔잔하기 미소짓고 입을 열었다.
“너무 걱정 마세요. 오라버니. 그냥 비슷한 처지의 여인끼리 편하게 이야기 하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요.”
이에 정성국은 잠시 전아라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 마음은 모르는 거라지만 전아라가 하얀 들꽃을 해코지할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알았다.”
“믿어주셔서 감사해요. 오라버니.”
그 말을 끝으로 전아라는 정성국에게서 떨어졌다.
잠시 후 가까이 도착한 일행 중에 맨 앞에 서 있던 하얀 들꽃을 전아라가 환하게 웃으며 바라보았다.
그러자 하얀 들꽃도 전아라를 보고 환하게 웃었고.
동시에 이곳에 오면서 주변의 풍경을 보고 열심히 떠들던 제자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렇게 왠지 모를 침묵이 이곳을 가득 채울 무렵 전아라가 입을 열어 침묵을 깨뜨렸다.
“전하. 이곳이 전하께서 머무시는 곳이옵니까?”
“어? 어...그렇지.”
“허면 이곳 주위를 좀 구경하고 싶사온데 괜찮으신지요.”
“...어? 아. 그럼 안내인을...”
갑작스럽게 무슨 소린가 했다가 이내 전아라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닫고 하얀 들꽃을 안내인으로 붙여줘야겠다고 생각할 무렵.
오히려 하얀 들꽃이 한 발짝 앞으로 나와 싱긋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전하. 제가 이분을 안내하겠습니다.”
“...어?”
“아. 감사합니다. 그럼 부탁드려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멍한 표정으로 환하게 웃는 둘을 바라보는 정성국과 뒤쪽에서 두 여인의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눈을 굴리고 있는 제자들을 내버려 두고 전아라와 하얀 들꽃은 걸어가기 시작했다.
잠시 그녀들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정성국은 이내 전아라를 믿기로 결정했다.
‘아. 몰라. 아라가 알아서 잘 하겠지.’
정성국은 두 여인의 뒷모습을 보며 수군거리는 제자들을 보고 소리쳤다.
“뭐하냐. 빨리 들어가자. 할 이야기가 많다.”
““예! 전하.””
* * *
정성국은 집무실 옆에 있는 회의실에 제자들과 앉아 그동안 편지로는 나누지 못한 이야기나 최근에 있었던 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래. 잘들 지냈느냐? 개척촌엔 별일 없고?”
“그렇습니다. 전하.”
박기동이 어색하게 대답하자 정성국은 피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여긴 우리끼리 있으니 그냥 스승님으로 불러라. 전하는 무슨.”
“어? 그래도 됩니까?”
“내가 허락했으니 상관없다.”
단호하게 말하는 정성국이었고 제자들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스승님.””
그제야 좀 편한 표정을 지은 정성국이 개척촌의 근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그래. 별다른 일은 없고?”
“예. 뭐 개척촌에야 별일이 있겠습니까. 다만 아이누인들과 왜인들간에 큰 충돌이 있었습니다.”
“그래? 결과는?”
“아이누인들의 대승입니다. 원정군이 홋카이도에 도착하기 전에 해상에서 타격을 주었고 덕분에 아이누인들은 별 피해 없었다더군요.”
박기동의 대답에 정성국은 예정대로 원상에서 개입했음을 직감하고 물었다.
“해상이라...원상이 개입한 건가?”
“예. 작년 개척촌에 도착한 김봉길 선장의 이야기를 듣고 개척촌에서도 만약을 대비해 지급 함선 한 척을 지급 전선으로 개조했었습니다. 그 지급 전선을 투입했는데...그 한 척의 위력이 생각보다 컸습니다.”
자신이 한 손 보탠 지급 전선의 위력이 컸다며 흥분하는 박기동을 보고 정성국은 왜인들의 배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왜인들의 배는 서양인들의 배와는 달리 작은 편이니까.”
“예. 나중에 김봉길 선장이 보고서를 가져오면 꼭 확인해 보셔야 할 겁니다.”
최주명조차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보고서를 꼭 확인하라고 덧붙이자 정성국은 흥미가 생겼다.
“음? 어째 한 척으로 피해를 꽤 많이 입혔나 보네?”
“그렇습니다. 지급 전선 한 척으로 왜선들 절반 가까이 침몰시켰답니다.”
“허어.”
생각지도 못한 결과에 감탄한 정성국이었다.
고작 지급 전선 한 척으로 왜선들의 절반을 침몰시키다니.
'이거 보고서를 확인해봐야겠는데? 내 생각보다 지급 전선의 전투력이 크다면...'
잠시 정성국이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에 잠길 무렵 최주명의 목소리가 그의 생각을 방해했다.
“뭐 정일신 함장의 보고로는 왜인들이 방심한 탓이 컸다고 합니다만...어쨌건 지급 전선 한 척의 위력이 생각보다 크더군요.”
“그래? 흐음...아무튼 낭보로군. 그래서 그 이후는?”
“예정대로 왜인들과 협상을 할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 생각보다 포로도 꽤 잡아두었다고 하고요. 저희가 아이누 섬에서 잠시 머물렀을 때 듣기로는 막부에서 사신을 보내 협상을 시작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협상이라...”
“자세한 사항은 나중에 보고서로 확인하시면 될 겁니다.”
이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고 이번 이주 선단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래. 그럼 그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이번 이주 선단은 천급과 지급으로 나누어 이동하는 게냐?”
이에 최주명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지급 기범선까지 합쳐서 3개의 선단으로 나누었습니다.”
“지급 기범선? 지급 함선을 개조한 건가? 지급 전선처럼?”
“아닙니다. 애초에 건조할 때부터 기범선으로 건조한 녀석들입니다. 다만 속도를 위해 선형은 천급과 비슷하고요.”
이에 정성국은 그게 가능하냐며 되물었다.
기범선의 경우 연료의 보급이 필수였으니까.
“그래? 연료 문제는 어쩌고?”
이에 최주명은 그 때문에 무척 고생했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 때문에 카무이 반도에 조그마한 항구를 건설했고 봉길 섬에도 연료 창고를 지었습니다. 거기에 연료 보급선을 따로 건조해 석탄을 채우느라 바빴죠.”
새남포의 경우 한정된 인력으로 제대로 된 항구 도시와 더불어 병사들이 거주할 병영까지 지어야 하는 만큼 개발에 많은 시일이 걸렸다.
하지만 카무이 반도와 봉길 섬에서는 그저 선착장과 근처에 연료 창고를 짓는 선에서 끝낸 것처럼 보였다.
이에 정성국은 괜찮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카무이 반도의 아이누인들은 원상에 우호적이었고 봉길 섬은 무인도에 가까웠으니 굳이 새남포처럼 크게 항구와 병영을 건설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래? 지급 기범선은 몇 척이지?”
“네 척입니다.”
최주명의 대답에 정성국은 잠시 새남포의 연료 창고를 생각해보고 턱을 매만졌다.
“어째 아슬아슬하겠군. 혹시 모르니 바로 새남포에 석탄을 더 옮겨둬야겠어.”
기범선이라 새남포에 석탄이 부족하더라도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바람의 힘을 이용하면 그만이니까.
거기에 증기기관은 범용성이 큰 만큼 석탄이 없으면 나무나 숯을 이용해도 되긴 했다.
다만 효율이 썩 높지 않은 만큼 일단 새남포의 연료 창고를 석탄으로 가득 채워야겠다고 생각한 정성국이 입을 열었다.
“그러면 천급 함선, 지급 기범선, 지급 함선 순으로 도착하게 되는 셈인가?”
“그렇습니다. 스승님. 그리고 천급 함선과 지급 기범선은 다시 돌아가 이주민을 태워 올 생각이니...”
예상한 것보다 더 많은 인원이 이주할 것 같았기에 정성국은 미소지으며 입을 열었다.
“총 5차례에 걸쳐 이주민들이 도착한다는 뜻이군. 이거 행정청에 미리 이야기해둬야겠어.”
천급 함선과 지급 기범선의 건조로 더 많은 이주민을 옮길 수 있다는 것에 고무된 정성국은 생각했다.
‘역시 더 커다란 배와 더 빠른 배가 필요해. 그러려면 일단 기술을 발전시켜야겠지.’
그리고 기술을 발전시키는 데는 공돌이를 갈아 넣는 방법이 최고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정성국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제자들을 흡족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왠지 모를 오한에 제자들이 부르르 몸을 떨고 있을 때 정성국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항해하느라 고생했으니 당분간은 좀 쉬고 나서 바로 연구청에서 일하도록 하여라.”
정성국의 말에 제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스승님.”
그러자 김신철이 정성국을 보며 이곳에서 할 일에 관해 물어보았다.
“개척촌에서 하던 일을 계속하면 되는 겁니까?”
“그렇지. 일단 신철이 너는 새마포 맞은편에 세워진 제철소를 맡거라.”
“알겠습니다. 스승님. 제철소의 관리를 하면 됩니까?”
이에 정성국은 그럴 리 있겠느냐면서 고개를 저었다.
북미왕국이 발전하기 시작하면 강철의 소모량이 무척 늘어날 테니 미리 준비하는 것이 좋았다.
특히 내륙으로 뻗어 나가려면 철도는 필수였으니 제철소의 확장이 시급했다.
“북미왕국의 발전을 위해서는 더 많은 강철이 필요할 거다. 그러니 제철소를 최대한 키워라. 고로도 더 만들고. 이를 관리할 사람들도 키워야겠지.”
정성국의 말에 김신철은 이곳에서도 편히 쉬기는 글렀구나 싶어 시무룩해졌다.
“끙...알겠습니다.”
정성국은 고개를 돌려 그 옆에 앉아있는 이상돈을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상돈이는 연구청에 소속된 장인들을 관리하고 아직 북미왕국에서 생산하지 못하는 여러 상품을 만들 공방을 세우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스승님.”
이미 짐작하고 있었기에 이상돈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명이는...”
“뭐 저야 배를 만들어야겠죠.”
어차피 이곳에서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배를 만드는 일 외에 무엇이 있겠느냐는 최주명을 보고 정성국은 피식 웃었다.
“그렇지. 일단은 연구청에 소속되어 있는 조선소를 맡아 확장하거라. 아직 이곳에선 지급 전선을 건조할만한 건선거조차 없으니까.”
“알겠습니다. 허면 천급 함선까지 건조할 수 있는 건선거를 만들도록 하지요.”
이에 정성국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더 키워라. 최소 1만 톤 수준의 배를 건조할 수 있게.”
“헉!”
정성국이 1만 톤을 거론하자 최주명이 기겁했다.
2천 톤급의 배도 간신히 만드는 판국에 1만 톤이라니 제정신이냐는 표정에 정성국은 손을 저었다.
“오해하지 말아라. 당장 그런 커다란 배를 건조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나중을 생각한 게다. 그리고 건선거가 크면 그 안에서 여러 척을 동시에 건조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
이에 최주명은 탄성을 내뱉었다.
개척촌에서는 건선거 하나당 하나의 배를 건조했지만, 정성국의 말은 아예 건선거를 커다랗게 만들고 여러 배를 동시에 만들자는 이야기였다.
“아. 알겠습니다. 무슨 뜻인지. 이거 눈치 보지 않고 일을 할 수 있어서 참 좋네요. 진작 왔으면 좋았을 텐데.”
최주명의 말에 정성국은 쓴웃음을 짓고 박기동을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기동아.”
“예. 스승님.”
“아직 증기기관의 출력이 200마력이냐?”
이에 박기동이 살짝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작년 말에 250마력까지는 올렸습니다.”
나쁘지 않은 성과였기에 정성국은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렇군...일단 너는 이번에 이주한 장인들과 함께 연구청에서 증기기관을 양산하는 일과 동시에 새로운 연구를 하나 해야겠다.”
“새로운 연구라면?”
“증기기관차의 실용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