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정성국이 자신의 품에 안겨 반가움에 눈물을 흘리는 전아라를 달래주고 있을 때 천급 함선에서 내린 사람들이 다가와 투덜거렸다.
”이거 너무 아라만 신경 쓰시는 것 아닙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배에 타고 올 걸 그랬나.“
”그 정도로 되겠냐?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 아라 먼저 보내고 다음 이주 선단에 탑승하자니까.“
”에이. 지급 기범선은 천급 보다 느리잖아. 시간 낭비야.“
”선실에서 연구하면 그만이지.“
”어휴. 그 흔들리는 선실에서 뭔 연구를 한다고.“
오랜만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정성국이 잠시 고개를 들자 그곳에는 자신을 보고 반가워하면서도 히죽 웃는 제자들이 있었다.
개척촌에서 머물며 원상과 북미왕국을 위해 연구를 진행하고 각종 기물을 만들어냈던 박기동, 김신철, 이상돈, 최주명까지.
정성국이 연구에 있어서 가장 믿고 있는 제자들이 이번 이주 선단을 통해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응? 너희들도 왔구나!“
”전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그동안은 스승님이라고 불렀던 제자들이었지만 이미 이곳에 북미왕국을 세워 스스로 왕에 올랐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제자들은 정성국을 보고 전하라 호칭했다.
이에 살짝 거리감이 느껴져 쓴웃음을 지은 정성국이었지만 오랜만에 보는 제자들이었기에 내색하지 않았다.
”물론이다. 너희들도 별 탈 없이 도착해서 참으로 다행이구나.“
정성국은 한 손으로 품 안의 전아라의 등을 다독이며 달래주면서도 앞쪽에서 자신을 보고 반가워하는 제자들을 환한 얼굴로 반겨주었다.
정성국은 오랜만에 보는 제자들의 모습을 확인했다.
그러다 강평화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평화는 이번에 오지 않은 게냐?“
”그렇습니다. 전하. 아라가 자리를 비운 상황에서 평화까지 이동하면 여러 문제가 생기는지라 당분간은 평화가 개척촌에 남아있기로 했습니다.“
”아. 그렇구나.“
누군가가 엿들을 수 있는 밖이었기에 슬쩍 얼버무리는 기동이의 말에 정성국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무연 화약의 제조와 이를 이용한 포탄과 탄환의 제조는 개척촌에서만 이루어지고 있었다.
개척촌의 화약 제조 공방에서 만들어진 포탄과 탄환을 이주 선단을 통해 북미왕국으로 운송하고 있었고.
비효율적이었지만 무연 화약의 제조는 극비였기에 이를 총괄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아 어쩔 수 없었다.
지금에 와서 정성국이 공방에 틀어박힐 수는 없는 노릇이고.
물론 이는 아직 북미왕국의 화약 소모량이 거의 미비했기에 가능했던 상황이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정성국은 북미왕국의 역량을 키우기로 마음먹었고 그에 따라 개척촌의 연구원과 장인 대부분 인력이 북미왕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화약 제조 공방도 옮겨야 했지만 아이누인들과 왜인들과의 분쟁 때문에 화약 소모량이 커진 만큼 대책 없이 화약 제조 공방을 옮겼다간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북미왕국에 제대로 된 화약 제조 공방이 생기고 그 공방이 돌아가 북미왕국에서 개척촌으로 포탄과 탄환을 개척촌으로 수출할 수 있을 때까지는 개척촌의 화약 제조 공방이 돌아가야 했다.
이 화약 제조 공방의 총 책임자는 전아라였지만 그녀에게 계속 개척촌에 남아 화약 제조를 총괄하라고 이야기할 수 없었던 강평화가 대신 개척촌에 남게 되었다.
강평화 역시 화약 제조 공방을 책임질 정도의 지식은 있었으니 말이다.
”아. 그리고 대방 어르신은 다음 선단을 통해 올 거라고 하더군요.“
”그래? 원상을 맡을 사람을 구했나 보구나.“
”예. 이천호 도방이 원상을 맡기로 했습니다.“
”이천호 도방이라...그렇군.“
정성국이 기억하는 이천호 도방은 꽤 유연한 태도를 지닌 중년 사내였다.
처음 원상을 만들 때 창업 공신에 가까웠고.
그런 만큼 충분히 대방 자리를 책임질 수 있는 인사라고 생각한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헌데 전하. 이곳에서 계속 이야기하실 겁니까? 슬슬 이동하시지요?“
”아. 그렇군.“
정성국이 김봉길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살펴보자 정성국과 전아라가 선착장을 막고 있어 배에서 내리지 못하고 있는 이주민들이 보였다.
또한, 천급 함선의 갑판에서 정성국과 전아라를 보고 흐뭇하게 웃고 있는 이주민들도 보였고.
이를 깨닫고 정성국은 일단 자리를 옮기기 위해 자신의 품 안에 있던 전아라의 등을 다시 한번 쓰다듬어준 후 조금은 다정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아라야. 좀 진정되었느냐?“
정성국의 말에 품 안에서 눈물을 훔친 전아라가 입을 열었다.
”...예. 전하.“
”그래. 할 말이 많겠지만 일단 자리를 좀 옮기자꾸나.“
”예. 전하.“
정성국의 말에 전아라가 정성국의 품 안에서 나왔고 이를 보고 히죽거리는 제자들과 김봉길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그동안 보고서를 통해 이들의 연구를 파악했었지만 오랜만에 얼굴을 본 만큼 나눌 이야기가 꽤 많았기에 빨리 집무실로 이동해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었다.
해서 선착장 밖에 있는 마차를 타기 위해 몸을 돌렸을 때 자신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하얀 들꽃을 미처 파악하지 못한 정성국이었다.
* * *
‘이것 참...고작 3년 만인데 많이 바뀌었구나.’
정성국은 마차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환하게 웃고 있는 전아라를 보고 그렇게 생각했다.
정성국이 처음 전아라를 보고 멍청한 반응을 보였던 이유는 별것이 아니었다.
그가 기억하는 전아라의 모습과는 조금 달랐기 때문.
정성국이 기억하는 전아라는 분명 자신을 제대로 꾸밀 줄 모르고 연구에만 몰두했기에 자신이 가진 미모를 깎아 먹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성국이 보기엔 참 단아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했지만.
하지만 지금 마차 안에서 자신을 보고 세상 좋다는 듯 환하게 웃는 전아라는 미모가 물이 올랐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는 3년이란 세월이 흘렀기에 조금은 성숙해진 탓도 없진 않겠지만 그보다는 옷도 그렇고 여러 장신구도 그렇고 제대로 꾸민 티가 났다.
전아라의 성향을 생각해보면 아마도 자신을 만나는 만큼 제대로 꽃단장한 것처럼 보였기에 정성국은 전아라가 이런 면모가 있었나 싶어 의외면서도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 저렇게 꾸몄기에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특히나 맞은편에서 자신을 보고 웃으면서도 전아라는 자신의 손에 끼워져 있는 정성국이 개척촌을 떠나기 전에 그녀에게 선물했던 금가락지를 매만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정성국도 전아라를 사랑했고 그렇기에 개척촌을 떠나기 전에 그녀의 마음을 받아들인 것이긴 했지만 왠지 모르게 정성국이 전아라를 생각하는 마음보다 전아라가 정성국을 생각하는 마음이 더 크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정성국은 온전히 전아라만 생각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으니.
그때 전아라가 정성국이 자신을 보고 미안해하는 것을 느낀 듯 살짝 의아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왜 그러시나요? 전하?“
”아니다. 그보다 어차피 마차 안에는 아무도 없는데 오라버니라고 부르지 그러냐.“
정성국이 타고 온 마차는 4인승이었고 정성국은 전아라 뿐만 아니라 김봉길에게도 마차를 타길 권했다.
하지만 김봉길은 전아라의 눈치를 살피고는 고개를 저으며 할 말이 많을 테니 먼저 대화를 나누라면서 빠졌다.
김봉길의 반응 때문인지 마차를 타고 왔던 하얀 들꽃도 정성국과 전아라를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자신이 제자들을 안내하겠다면서 마차에 타지 않았고.
덕분에 마차 안에는 정성국과 전아라 뿐이었기에 정성국이 편하게 이야기하라고 말하자 전아라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 전하는 한나라의 왕이시옵니다. 어찌 그럴 수 있겠사옵니까.“
이에 정성국은 고개를 저었다.
”거리감이 느껴져서 그런다. 아라야. 그냥 예전에 부르던 대로 부르렴. 최소한 단둘이 있을 때만큼은.“
정성국의 대답에도 전아라는 조심스러운 표정이었다.
”하오나...호칭을 편히 하다 실수할까 우려되옵니다.“
전아라는 자신의 신분에 대한 자괴감이 있었기에 괜히 이 때문에 정성국에게까지 피해를 줄까 두려운 눈치였다.
그런 전아라의 대답에 정성국은 피식 웃었다.
”공식 석상에서? 뭐 어떠냐. 어차피 이곳은 조선이 아닌데 뭘 그리 걱정 하는 게냐. 말실수했다고 탄핵 상소라도 올라올까 봐 그러느냐?“
정성국의 계속된 요구에 전아라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하면서 살포시 웃었다.
”알겠어요. 오라버니.“
”그래. 말을 편하게 하니 얼마나 좋으냐.“
“헌데 오라버니. 방금 무슨 생각을 하신 건가요?”
“음...그냥 미안해서 그런다.”
정성국의 말을 듣자 전아라는 정성국이 무슨 의미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파악하고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전아라는 자신의 신분 때문에 정성국을 온전하게 차지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으니까.
특히 정성국이 북미 대륙을 개척해 새로운 나라를 세울 예정이라는 소리에 내심 낙담하기도 했었다.
태생이 노비였으니 정성국과는 절대로 맺어질 수 없겠구나 해서.
그런데도 정성국을 향한 마음을 포기할 수 없어 어떻게 해서든 그를 돕겠다고 골방에 처박혀 연구에 몰두하기도 했다.
헌데 정성국은 개척촌을 떠나기 전에 자신을 찾아와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첫 번째 부인으로 삼겠다고 약조했다.
그거면 충분했다.
그렇기에 3년을 웃으면서 기다릴 수 있었고.
이렇게 오늘 정성국을 만나지 않았는가.
“그런 생각하지 마셔요. 오라버니.”
“으음...그래. 알겠다.”
더 미안해한들 오히려 전아라를 기만하는 꼴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전아라는 환하게 웃으며 그동안 정성국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보고 싶었다는 이야기부터 그동안 자신이 개척촌에서 어떻게 지내왔었는지, 또 정성국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를 물어보았다.
그러다가 슬슬 마차가 멈출 무렵 전아라가 슬쩍 입을 열었다.
“참...오라버니. 선착장에서 오라버니를 따라서 오던 원주민 여성은 누군가요?”
마차에서 막 내릴 준비를 하던 정성국은 전아라의 물음에 잠시 멈칫했다가 대답했다.
“응? 아...하얀 들꽃이라고 내 일을 도와주는 친구지.”
“흐음...알겠어요. 오라버니.”
전아라는 그러냐는 듯 정성국을 보고 환하게 웃었고, 정성국은 마음이 불편해졌다.
이에 마차 밖에서 마차 문을 열려는 호위대장에게 손짓한 후 다시 마차의 좌석에 앉아 전아라를 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정성국 역시 모르지 않았다.
아마 원주민과의 화합을 위해 원주민 여성과 혼인해야 한다면 그 대상은 하얀 들꽃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특히나 하얀 들꽃은 그동안 정성국이 외출할 때 가끔 따라다니면서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는 소문이 원주민들 사이에선 정설에 가깝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리고 이 때문에 원주민들이 정성국을 더 친근하게 여기는 것이 사실이고.
물론 정성국은 아직 하얀 들꽃을 한 명의 사랑하는 여성으로 바라보기보다는 여동생같은 느낌으로 귀여워하는 편이긴 했지만, 나중을 생각하면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언젠가 전아라와 혼인하게 되면 하얀 들꽃이 이런저런 입방아에 오를 수도 있을뿐더러 원주민들의 반응도 고려해야 하니까.
해서 조만간 그녀와도 진지하게 이야기해볼 생각이었다.
정성국이 생각하기에는 분명 하얀 들꽃은 자신에게 호감 이상을 가진 것처럼 보였으니까.
이런 상황에서 괜히 얼버무렸다가는 전아라를 속이는 꼴이 되어 그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3년 만에 재회한 오늘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적합하지는 않다고 생각했지만, 이왕 말이 나왔으니 전아라에게 제대로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해서 정성국은 전아라를 바라보고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약속한 것도 있고 아직 자신은 하얀 들꽃을 여성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다만 원주민 여성 중에선 가장 가까운 것은 사실이고 어쩌면 원주민과의 화합을 위해 원주민 여성을 받아들인다면 그 대상은 하얀 들꽃일 것이라고.
전아라는 별다른 동요 없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정성국을 보고 웃음을 지었다.
“알겠어요. 솔직히 말해줘서 고마워요. 오라버니.”
“으음. 그래. 미안하다.”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오라버니. 오히려 막무가내로 한 저와의 약속을 아직 기억하고 있어서 기쁜걸요.”
전아라의 말에 쓴웃음을 짓는 정성국이었다.
전아라는 그런 정성국을 보고 쿡쿡거리면서 웃고는 마차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는 호위대장을 보고 입을 열었다.
“저분이 계속 기다리시네요. 일단 내려요. 오라버니.”
“그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