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을 탈출하라-73화 (73/850)

73화

봄바람이 슬슬 더워질 무렵 정평국은 집무실의 창문을 통해 묘하게 부산한 개척촌을 슬쩍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준비는 다 끝났지?”

“그렇습니다. 대방 어르신. 곧 천급 함선이 출항할 예정입니다.”

지금까지는 한 번에 대규모 선단을 구성해 이동했었다.

하지만 점점 선박의 수가 늘어나고 선박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속도가 제각각 다른 만큼 이를 한데 묶어 대규모 선단을 구성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라는 의견이 올라왔다.

이 의견에 정평국 역시 동의했고 결국 효율적인 이주를 위해 이번 이주 선단의 경우는 총 3개의 선단으로 구성되었다.

뿐만 아니라 선단이 출항하는 시기도, 이동하는 항로도 달랐다.

처음으로 출항하는 선단은 천급 함선으로 이루어진 선단으로 총 4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범선이고 속도가 빠른 만큼 기존의 항로를 따라 항해할 계획이었다.

두 번째로 출항하는 선단은 지급 기범선으로 이루어진 선단으로 총 4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선단을 구성하는 지급 기범선은 아예 처음 선박을 건조할 때부터 기범선으로 건조된 선박들로 기범선도 생각보다는 괜찮다는 판단하에 최근 개척촌에서는 지급 함선 대신 이 지급 기범선을 건조하고 있었다.

그리고 처음부터 기범선으로 건조하면서 속도를 중요시해 설계를 살짝 변경했기에 기존의 지급 함선을 개조한 지급 전선과는 모양이 조금 달랐다.

마치 길쭉한 선형의 천급 함선의 축소판에 가깝달까.

이 때문에 배의 명칭을 달리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배의 크기로 천, 지, 인급을 결정하는 것 아니었냐는 이야기에 일단 지급 기범선으로 명명했다.

이 지급 기범선으로 구성된 선단은 배의 속도를 최대한으로 내기 위해선 중간에 연료의 보급이 필요한 만큼 기존의 항로에서 조금 벗어나 중간에 카무이 반도와 새남포에 들를 예정이었다.

이를 위해 작년부터 카무이 반도와 봉길 섬에 열심히 석탄을 실어날랐다.

새남포의 경우는 정성국이 알아서 연료를 채워 놓기로 했었고.

마지막으로 출항하는 선단은 기존의 지급 함선으로 이루어졌으며 총 6척이 기존의 항로를 따라 항해할 예정이었다.

그동안 건조했던 지급 함선은 더 많았지만, 북미왕국에 2척을 남겨두고 왔었을뿐더러 최근 아이누 섬을 통해 정일신 함장이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생각외로 지급 전선의 전투력이 굉장했다고 한다.

특히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은 왜선들을 상대하는 데 효과적이라는 보고였고.

다만 한 척으로는 한계가 명확했고 선원들의 휴식 문제도 있었기에 고민 끝에 지급 함선 한 척을 더 개조하기로 결정했다.

덕분에 작년만 해도 이주 선단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10척의 지급 함선은 6척으로 줄어들었고.

하지만 그보다 빠른 천급 함선과 지급 기범선이 이주 선단의 주력이 되었고 이 배들은 빠른 만큼 1년에 2차례를 왕복할 예정이라 북미왕국으로 떠나는 이주민의 수는 더 늘어났다.

물론 이주민의 수가 더 늘어나는 만큼 개척촌과 원상이 감당해야 하는 업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후우. 이거 생각보다 일이 너무 많아. 거기에 계속 선박이 증가하니...쯧.”

혀를 차는 정평국의 말에 보고를 위해 집무실에 올라온 이천호 도방이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이번에는 원상의 핵심인 연구원들이 이주하는 만큼 일이 더 많아질 수밖에요. 그리고 예정대로 천급 함선과 지급 기범선이 도착한다면 다시 정비해서 추워지기 전에 한번 더 출항할 예정이니...”

정성국이 북미 대륙의 원주민들을 통합하여 결국 나라를 세웠고 북미 대륙의 개발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연구소의 연구원들과 장인들 대부분을 북미왕국으로 보내라고 했기에 특히나 할 일이 더 많았다.

연구원의 빈 자리를 메꾸는 것은 불가능해도 장인들의 빈 자리는 최대한 메워야 했기에.

특히 다른 것은 몰라도 현재 개척촌과 북미왕국을 지탱하고 있는 수많은 상품의 생산에 차질을 빚어선 안 되니 말이다.

이 때문에 정평국과 그를 보좌하는 이천호 도방이 일에 파묻혀 살았다.

또한, 정평국은 북미왕국이 안정적인 궤도에 오를 때까지는 무엇보다 이곳에서 보내는 이주민과 물자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배의 건조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런 노력 덕분에 어느덧 1년에 천급 함선 3척과 지급 기범선 4척을 꾸준하게 건조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큰 문제가 없다면 매년 7척의 배가 계속 늘어난다는 의미였고 동시에 원상의 업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는 의미였다.

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정평국은 최대한 이른 시일 안에 원상의 대방 자리를 벗어나 북미왕국으로 떠나고 싶어 했고.

“어휴. 빨리 북미왕국으로 이동하지 않으면 일에 치여 죽겠네.”

뒷목을 붙잡고 투덜거리는 정평국을 보고 이천호 도방의 표정이 뚱해졌다.

정평국이 북미왕국으로 이동하면 그를 대신해 원상의 대방이 되어 이 일을 총괄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역시 상황을 모르지 않았기에 이곳을 벗어나려는 정평국을 얄미운 듯 바라보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그가 애써 외면하는 사실을 말했다.

“...대방 어르신. 북미왕국은 일이 없을 것 같습니까? 어차피 그곳에서도 쉬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만...”

이천호 도방의 말에 정평국은 움찔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원상의 일이나, 새로 나라를 세워 할 일이 넘쳐나는 북미왕국이나 업무 강도는 비슷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에 정평국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며 탄식을 토했다.

“젠장...”

* * *

“추마시 족과 통바 족이라...”

정성국은 용건이 있다면서 자신을 찾아온 외무청장인 조용한 곰을 바라보고 까끌까끌한 턱을 매만지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껏 외무청에 소속된 대추장들의 활동은 주로 북미왕국 북쪽에 집중되었다.

아무래도 북쪽에 위치한 새남포의 건설과 더불어 새로 건설하는 수도 역시 새김포에서 북쪽에 위치해 있었으니 대부분이 원주민 대추장으로 이루어진 외무청의 관리들은 내가 북쪽에 관심이 있다고 여긴 듯했다.

덕분에 북미왕국의 영역은 계속해서 북쪽으로 확장되었고 어느덧 정성국이 기억하고 있는 캘리포니아의 중앙평원 중 북쪽 지역은 모두 북미왕국의 영역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북쪽에 수많은 소규모 부족들을 북미왕국에 합류시켰고 덕분에 어느덧 북미왕국의 인구수가 18만에 가까워졌다.

그리고 그들이 북미왕국에 합류함에 따라 그들이 알고 있던 여러 정보를 파악해 탐사대의 도움을 받아가며 탐사 영역을 더 넓히고 있다고 들었고.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외무청 소속 관리들이 주로 북쪽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고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추마시 족과 통바 족의 이야기를 꺼내는 조용한 곰의 말에 살짝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정성국이었다.

추마시 족과 통바 족은 캘리포니아 남서쪽 해안가에 자리를 잡은 부족들로 그들의 존재는 정성국도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괜히 그들과 교류했다가 스페인에 알려질까 두려워 당분간 접촉을 최소한으로만 유지하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원주민들을 평화적으로 합류시키려면 북미왕국으로 합류하는 것이 저들에게도 이득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려주어야 하는데 당장은 그럴 여력이 없었고 저들이 합류해봐야 스페인에게 알려질 우려가 있으니 그리 명령했던 것이다.

헌데 조용한 곰이 찾아와 북미왕국의 남쪽, 옛 요쿠츠 족의 영역에 추마시 족과 통바 족이 자주 방문한다면서 지금이 그들과 우호적으로 교류할 기회라고 주장했다.

그의 말로는 그들과 인접한 요쿠츠 족이 북미왕국으로 합류한 후 지금까지처럼 수렵 생활이 아닌 농경 생활로 바뀌는 것이 인상적인지 꽤 관심을 두고 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저들에게 외무청의 관리들을 보내 북미왕국의 실상을 알려준다면 저들도 충분히 북미왕국으로 합류할 거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는 조용한 곰이었다.

“으음...”

조용한 곰이 자신 있게 이야기했음에도 고민이 깊은 얼굴을 하는 정성국이었고 조용한 곰은 그런 정성국의 반응이 의아한 듯 보였다.

지금까지 정성국은 외무청의 활동으로 북미왕국의 영역과 인구가 늘어나는 것을 몹시 만족스러워했다.

헌데 꽤 커다란 부족이라고 할 수 있는 추마시 족과 통바 족을 합류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도 꺼리는 것이 의아할 수밖에 없었고 이에 조심스럽게 입을 여는 조용한 곰이었다.

“전하. 설마 추마시 족과 통바 족이 꺼려지시는 겁니까?”

“음? 아. 오해하지 말게. 딱히 그들을 꺼린다기보다는 그들과 교류하다가 스페인에게 우리의 존재가 알려질까 봐 그러네.”

정성국의 대답에도 조용한 곰은 의아한 기색을 거두지 못했다.

“아. 그 남쪽에 있다는 자들 말입니까. 하지만 알려져도 상관없지 않습니까? 그에 대비해 계속해서 군사청의 병력을 늘리지 않았습니까.”

작년 새김포에서 출발하던 이주 선단이 스페인의 교역 선단과 교전한 직후부터 정성국은 급격하게 군사청의 규모를 키워왔다.

덕분에 현재 군사청 소속의 병사가 5천이 넘었다.

이 중 1000명이 해군 훈련대에 속해 있으며, 500명이 탐사대에, 100명이 호위대에, 나머지는 경비대에 소속되어 북미왕국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매번 회의에 참여했던 조용한 곰이었기에 이를 잘 알고 있었고 스페인과의 교전을 꺼리는 정성국을 의아하게 생각했던 것이고.

이런 반응에 정성국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직 해군이 부족하네. 고작해야 지급 전선 2척일 뿐이니까. 전선의 숫자를 늘리려면 시간이 필요해. 그리고 당장 발전하느라 바쁜 와중인데 괜히 스페인에게 알려져 신경을 분산시키고 싶지도 않고.”

“아...이해했습니다.”

그제야 정성국이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이해가 된 조용한 곰이었다.

“하지만...자네 말대로 저들과 교류하기에 적당한 시기임은 분명하지. 어차피 곧 있으면 새남포 일대의 개발이 끝나고 그들을 남쪽으로 내려보낼 생각이었으니.”

“허면...”

잠시 정성국은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적대적이거나 경계심이 강한 부족이라면 모를까 우호적인 행동을 하는 부족을 배척할 필요는 없지. 하물며 로스앤젤레스 지역은 절대 포기할 수 없고. 어차피 아직은 저들도 호기심일 거야. 지금 저들과 교류를 터 놓고 나서 가을에 요쿠츠 족이 수확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그들이 풍족하게 겨울을 나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소규모 부족들을 빠르게 합류시키기 위해 한 것처럼 물자를 퍼 줄 필요 없이 요쿠츠 족처럼 북미왕국으로 합류하길 원할테니까...’

스페인이 걸리기는 하지만 그 때문에 좋은 기회를 날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워낙 벌려놓은 일이 많기에 좀 버겁긴 하지만 곧 개척촌에서 새로운 이주민들이 도착할 테고.

특히 이번 이주민들은 연구원들과 장인들이 많이 포함되어있을 것이기에 이들만 도착한다면 숨통이 좀 트이리라 생각한 정성국이 결정을 내렸다.

“허락하겠네. 다만 추마시 족과 통바 족은 큰 부족인 만큼 당장 저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물자를 풀기는 어렵네. 일단은 차근차근 교류하는 방안으로 진행하게.”

정성국의 결정에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는 조용한 곰이었다.

“알겠습니다. 전하.”

인사를 하고 집무실을 떠나려는 조용한 곰에게 정성국이 덧붙였다.

“아. 그리고 남쪽에 새로운 마을을 건설하는 것과 동시에 탐사대를 내려보낼 테니 그들과 협력해서 동쪽을 탐사하고 원주민들을 합류시켜 북미왕국의 영역을 넓혀보게.”

일거리를 늘리는 정성국이었지만 오히려 조용한 곰은 북미왕국의 영역을 넓힐 수 있어 만족스러운지 밝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전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