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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72화 (72/850)

72화

환한 달빛과 곳곳의 피워진 모닥불로 인해 어두운 밤인데도 불구하고 환한 마쓰마에 성 인근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렸다.

그동안 걱정하던 원정군을 큰 피해 없이 물리쳤고 당분간은 다시 싸울 일이 없어 보이니 자연스럽게 축제가 열렸던 것.

비축해두었던 식량을 풍족하게 풀었을 뿐만 아니라 축제에는 빠질 수 없는 술을 꺼냈다.

“으하하하”

“마셔라! 마셔!”

“술 더 없어?”

“어이! 여기 고기 좀 더 가져와!”

오니비시는 자리를 옮겨가며 병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즐기다가 문득 샤쿠샤인과 박경수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혹시나 해 샤쿠샤인이 머무는 막사로 향했고 그 안쪽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자 혀를 차며 막사 안으로 들어간 오니비시였다.

막사에는 샤쿠샤인 뿐만 아니라 그 휘하의 부하들도 두어 명 있었고 샤쿠샤인은 그들에게 이런저런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이를 보고 혀를 차며 입을 여는 오니비시였다.

“여기서 뭐 하고 있나?”

오니비시의 물음에 보면 모르냐는 듯 턱으로 부하들을 가리키며 대답하는 샤쿠샤인이었다.

“처리할 일이 있어서 말이지.”

“흥. 그런 건 내일로 미루라고. 일단 오늘은 축제를 즐겨야 할 것 아닌가! 저 친구들도 축제를 즐겨야지! 그러고 보면 박경수 그 친구는 또 어디 있는지 아나?”

샤쿠샤인은 고개를 저으며 부하들에게 손짓했다.

부하들은 샤쿠샤인에게 고개를 숙인 후 막사를 빠져나갔다.

“경수 그 친구는 정일신 함장과 할 이야기가 많다면서 저기 커다란 함선으로 향했네. 휘하의 조선인들도 그렇고.”

“응? 정일신 그 친구는 이런 날에도 배에 머물겠다던가? 축제를 즐겨야지! 내가 데리고 와야겠군.”

“놔두게. 조선인들은 샤모들에게 자신들의 정체가 알려지는 것을 꺼리지 않나. 이곳에는 포로들의 눈도 있으니 불편한 모양이야.”

“쯧. 빨리 협상을 해서 포로들부터 처리해야겠군.”

아이누 섬에서 보내온 신식 소총으로 무장한 부대의 태반은 아이누 섬의 아이누인들이었지만 이 병사들을 지휘하는 지휘관들의 절반은 원상에서 보내준 조선인들이었다.

비록 이들의 복장은 아이누인들의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외모는 살짝 달랐다.

그나마 조선인이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 털모자를 써서 상투를 가리고는 있다지만 괜히 이번에 잡은 포로들의 눈에 띄어서 좋을 것은 없었다.

특히 포로들을 구실로 막부와 협상할 생각이었기에.

해서 당분간은 지급 전선에 가 있겠다고 말해 둔 박경수였다.

이를 설명하자 오니비시는 같이 고생해서 승전하고도 배에 숨어있어야 하는 박경수를 안타까워했다.

이에 샤쿠샤인이 너무 걱정말라면서 입을 열었다.

“걱정말게. 곧 아이누 섬에서 파견한 부대는 내륙으로 이동시킬 생각이니.”

그 말에 오니비시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하하하. 당분간은 싸울 일은 없다는 건가?”

“그렇지. 다만...”

“다만?”

잠시 말을 흐린 샤쿠샤인은 살짝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한시적인 평화일 수도 있지. 원상의 생각대로 협상이 잘 끝나면 모를까 아니라면...”

“흠. 다시 샤모들이 쳐들어올 거라는 뜻인가? 지금까지 입은 피해만 해도 꽤 클 텐데?”

샤쿠샤인의 걱정이 너무 과한 걱정이라는 듯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하는 오니비시였다.

그럴 만했다.

지금까지 자신들을 업신여기던 샤모들을 계속해서 물리쳤고 이번의 원정군에 대한 소식을 듣고 무척 걱정했었지만 손쉽게 물리쳤었으니까.

거기에 예전의 지원군 5천과 이번의 원정군 1만을 패퇴시켰으니 군을 더 동원하긴 어렵지 않겠느냐는 표정이었다.

이에 샤쿠샤인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오니비시에게 현실을 알려주었다.

“전에 박경수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네. 약 60년 전에 샤모들이 대규모로 조선을 침공한 적이 있었다고 하더군.”

갑작스러운 이야기의 어리둥절하면서도 오니비시는 샤쿠샤인의 이야기에 흥미를 보였다.

“그래? 처음 듣는군. 그래서 어찌 되었다고 하던가?”

“뭐 꽤 큰 피해를 보았지만 결국 사모들을 물리쳤다고 했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닐세. 그때 샤모들이 조선을 침공하기 위해 동원했던 병력이 20만에 가까웠다고 하더군.”

생각지도 못한 숫자에 오니비시는 눈을 깜박이다가 샤쿠샤인을 보고 진심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20만?”

“그래. 20만.”

“허어.”

20만이라는 숫자에 말문이 막힌 오니비시였다.

이번에 원상이 지원해 준 지급 전선 덕분에 손쉽게 이기긴 했지만, 그 전까지 저들 원정군 1만에 전전긍긍했던 아이누인들이었다.

헌데 20만이나 동원했었다니.

새삼 샤모들의 규모에 놀란 오니비시의 귀에 샤쿠샤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들은 그 정도 병력을 동원할 저력이 있다는 소릴세. 물론 예전과는 상황이 바뀌었으니 절대로 그 정도의 병력을 모아 우리를 공격할 리는 없다고 경수가 이야기하긴 했네만...”

물론 당시 박경수는 이 이야기에 놀란 샤쿠샤인에게 과거의 일일 뿐이고 현 상황에서는 절대로 막부가 이곳을 정벌하는데 그런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지는 못할 거라고 단언했다.

거기에 그런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이곳을 점령해야 할 정도로 에조가 매력적이지는 않은 땅이라고도 이야기했고.

그 의견은 일리가 있었기에 샤쿠샤인도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그가 걱정하는 것은 자신들을 같은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샤모들이 자신들에게 패배한 것에 분노해서 그런 것을 무시하고 덤벼들까 두려웠다.

“흐음...”

“그리고 샤모들과의 협상을 잘 진행해서 이곳을 우리의 영역으로 인정받고 저들과의 전쟁을 그만두기로 합의한다고 해도 이후가 문제일세.”

“그게 무슨 소린가?”

오니비시는 샤쿠샤인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샤모들과 협상해서 이곳을 자신들의 영역으로 인정받으면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닌가.

헌데 문제라니.

그런 오니비시를 보고 샤쿠샤인은 예전에 자신에게 여러 이야기를 해 준 투로시노가 생각났다.

“흐음...이 자리에 투로시노가 있었다면 좋았을텐데...그가 그러더군. 힘이 없다면 결국 평화는 허상에 불과할 것이라고.”

“갑자기 그게 무슨...샤모들이 나중에 다시 침공할 거란 이야긴가? 투로시노는 그렇게 생각한다고?”

인상을 찌푸리는 오니비시에게 샤쿠샤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샤모들이 침공할 수도 있고...아니면 서양인들이 침공할 수도 있다고 하더군.”

“서양인?”

아직 서양 세력들의 주 활동 반경은 동남아와 중국, 일본의 큐슈 정도였기에 아이누인들은 서양인과 접촉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오니비시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에 샤쿠샤인은 전에 투로시노가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그에게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우리에겐 꽤 생소한 이야기네만은...투로시노가 그러더군. 서양 세력이 곧 이곳에 진출할 거라고. 그리고 이들은 꽤 탐욕스러운 존재라고 하네.”

“곧 이곳에 진출할 거라고?”

“그렇다고 하네. 우리가 남쪽의 샤모들을 경계한다면 투로시노는 아이누 섬 북서쪽의 대륙에 진출했다는 서양인들을 더욱 경계하더군. 저들을 무척이나 강대한 세력이라고 하네. 샤모들이 사용하는 철포도 서양인들에게 들여온 물건이고 원상처럼 커다란 배도 무척 많다고 하니 그들의 강대함을 짐작할 수 있겠지.”

“끄응...갑자기 그게 무슨...”

생각지도 못한 세력이 갑작스럽게 이곳에 진출할 것이라는 이야기에 오니비시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샤쿠샤인도 쓴웃음을 지었고.

자신 역시 처음 투로시노에게 들었을 때만 해도 황당했었으니까.

대체 어디에서 그런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느냐는 자신의 물음에 투로시노는 아이누 섬에 방문했었던 원상의 대방을 따라 세상을 둘러보면서 여러 가지를 배웠고 덕분에 알게 되었다고 했다.

저 서쪽에 여러 나라 중 러시아라는 거대한 나라가 있는데 그들이 모피를 위해 꾸준하게 동쪽으로 영역을 확장했고 최근 아이누 섬 인근까지 도달했다는 것이다.

당장은 여력이 없어 이곳에 관심이 없지만, 후에는 샤모들보다 저들이 더 문제가 될 거라고 예언하듯 이야기 한 투로시노를 떠올리고 있을 때 오니비시가 샤쿠샤인을 매서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그래.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낸 저의가 뭔가?”

“우리 아이누인들의 힘만으로 이곳에서 평화롭게 살아갈 수 없다는 이야기일세.”

“...어째 이야기의 흐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군. 결국, 우리들의 힘만으로는 존립할 수 없으니 다른 세력에게 의지하자는 건가? 다른 세력은 결국 원상일 테고?”

슬쩍 분기를 내비치는 오니비시와는 달리 샤쿠샤인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최소한 투로시노는 그러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더군.”

“...자네는?”

“솔직히 처음에는 탐탁치않았네만은...원상의 힘이 생각보다 크지 않던가. 애당초 원상이 돕지 않았다면 샤모들을 이곳에서 몰아내지도 못했을 것이고. 이번에도 원상의 도움이 없었다면 승리하기 어렵거나 승리하더라도 수많은 아이누인들이 죽었겠지. 안 그런가?”

담담하게 사실을 나열하는 샤쿠샤인의 말에 오니비시는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실제로 원상의 도움이 없었다면 샤모들에게 차례차례 점령당해 노예로 살거나 그들과 맞서 싸우다 대부분의 아이누인들이 죽었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그러자 오니비시의 마음도 슬쩍 바뀌었다.

처음에야 원상에 의지한다는 것이 스스로 그들의 노예를 자처한다고 생각한 오니비시였지만 원상이 지금껏 아이누인들을 지원해 준 것이나 그들의 자급자족을 위해 감자라는 새로운 작물을 전파해 준 것을 보면 그들에게 의지하는 것도 나쁠 것은 없어 보였다.

거기에 원상은 식량이 부족한 아이누인들을 위해 감자라는 새로운 작물을 전파해주었고 덕분에 식량이 꽤 풍족해지기도 했으니.

또한, 생각외로 원상의 무력이 대단했다.

특히 고작 한 척의 배라고 생각했던 지급 전선이라는 배에서 쏴대는 화포라는 무기의 위력이란.

정말로 투로시노의 말처럼 강대한 서양 세력이 이곳에 진출한다면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을 점령하고자 한다면 현실적으로 자신들끼리 생존할 수 없으니 힘이 있지만, 자신들에게 호의적인 원상에게 의지하는 것이 나았다.

이는 힘이 없었기에 샤모들에게 그동안 꾸준히 유린당해왔던 아이누인이기에 가능한 발상이었다.

“으음...생각해보니 그렇긴 하군. 분명 원상의 도움 없이는 어려웠겠지. 허면? 원상의 대방을 영주로 모시기라도 하자는 말인가?”

슬쩍 누그러진 오니비시의 반응에 미소지은 샤쿠샤인은 고개를 저었다.

신중히 결정해야 할 문제였다.

아직은 제대로 된 정보도 없었고 아이누인들의 운명이 달린 만큼 제대로 알아봐야 했다.

“글세...생존을 위해서라면 못할 것도 없지. 다만 당장 그러자는 것은 아닐세. 그건 투로시노도 마찬가지였고. 좀 더 상황을 파악한 후에 선택해야겠지. 다만 현실이 이러하다는 것을 자네에게도 알려주고 싶었네.”

“으음...”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앞으로의 걱정 때문에 고민이 깊어진 두 사람이었다.

* * *

나가사키의 인공섬 데지마에 머물던 네덜란드 상인인 요한 판 부르크가 직원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패했다고?”

“그렇다더군요.”

“그래서? 막부의 반응은?”

“좀 당황한 모양이긴 한데...당장 군을 일으킬 것 같지는 않답니다.”

“흐음? 반란군 토벌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막부가 두고 보겠다고?”

의외의 말에 요한은 의아했다.

그가 알기로 막부는 무엇보다 사회 안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가톨릭 교도들이 난을 일으켰을 때 그들을 철저하게 탄압했을 뿐만 아니라 1635년 쇄국 칙령까지 내려 스페인과 포르투칼을 내쫓아버렸다.

그런 막부가 이번에는 반란군을 두고 보겠다니.

"실질적으로 점유하고 있는 땅이 아닌 모양입니다. 그리고 북쪽에 위치해 있어 제대로 식량을 생산하기도 어려운 쓸모없는 땅이라더군요.”

그제야 막부의 대응이 이해가 갔던 요한이었다.

“무슨 의미인지 알겠군.”

“헌데 꽤 흥미로운 소문이 있습니다.”

“뭔가?”

“반란을 일으킨 원주민들 뒤에 서양 세력이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뭐라고? 자세하게 설명해보게.”

의외의 소리에 요한은 직원을 독촉했고 직원은 자신이 일본인들을 상대로 파악한 정보를 그에게 모두 이야기했다.

“으음...원주민에게 머스킷을 지원해주고 병력을 수송하는데 갤리온으로 보이는 범선이 방해했다라...어딘지는 모르고?”

“예. 오히려 저에게 묻더군요. 혹시 북쪽으로 항해한 자들을 본 적 있느냐고. 물론 모른다고 했습니다만...”

직원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요한은 이번 일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묘한 미소를 지었다.

“이건...이용할 수 있겠는데?”

“예?”

“잉글랜드 놈들이 북쪽으로 향한 것을 보았다는 소문을 넌지시 흘릴 수 있겠나?”

막부의 쇄국 칙령으로 인해 이곳에 드나드는 서양 세력은 네덜란드와 잉글랜드뿐이었다.

그리고 이번 일을 잘만 이용하면 다시 일본 교역을 독점하는 것도 가능할 것만 같았고.

요한의 생각을 눈치챈 직원이 탄성을 토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겠습니다. 은근 슬쩍 소문을 내보겠습니다.”

“조심해서 소문을 흘리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직원이 대답하고 상회를 나간 후 요한은 생각에 잠겼다.

‘근데 실제로 누가 원주민들을 지원한 건지는 파악해볼 필요가 있어보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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