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파악했나?”
쓰가루 노부마사는 다가오는 야마가 쇼고의 발소리를 듣고 그가 부복하기도 전에 급히 입을 열었다.
계속되는 흑선의 공격을 피해 죽어라 노를 저어 결국 에조 지역에 상륙할 수 있었던 원정군이었다.
해안가에 상륙하고 나서 쓰가루 노부마사는 재빨리 야마가 쇼고에게 상륙한 병사의 수를 파악하라고 명령을 내렸고.
이에 야마가 쇼고는 안색을 흐리며 대답했다.
“지금까지 파악한 바론 4천의 병력뿐이옵니다. 주군.”
“하.”
야마가 쇼고의 대답에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흘리는 쓰가루 노부마사였다.
출항할 때만 하더라도 1만의 병력을 자랑하던 원정군이 지금은 4천뿐이라니.
바다를 건너는데 무려 6천의 정예병이 사라진 셈이다.
그것도 고작 배 한 척 때문에.
악몽과도 같은 현실에 쓰가루 노부마사가 절망하고 있을 때 야마가 쇼고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직 희망을 버려선 아니 되옵니다. 주군. 뒤따라오던 오니같은 흑선을 피해 선단이 흩어져서 아직 이곳으로 집결하지 못했기에 수가 적은 것이옵니다. 다들 이곳 지리를 모르지 않으니 시간이 흐르면 병사의 수도 늘어날 것이옵니다.”
하지만 절망하고 있던 쓰가루 노부마사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 봐야 얼마나 더 모이겠는가. 1천? 2천? 이 상황에선 그들이 이곳으로 모인다 해도 당장 보급이 문제네. 허어...고작 에미시 따위를 토벌하는 일에 실패할 줄은...”
한탄하는 쓰가루 노부마사를 보고 야마가 쇼고는 이를 깨물며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찌해야 하나. 주군의 말씀도 틀리지 않다. 애초에 에미시들이 우리의 상륙을 최대한 방해할 것을 우려해 보급품을 줄이고 병력을 최대한 태웠던 것이 패착이 되었구나.’
애초에 모든 계획은 에미시들에게 제대로 된 배 한 척 없다는 가정하에 세워진 계획이었다.
수송로의 안전을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기에 상륙할 때 혹시 모를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보급품을 실을 공간에도 병사들을 태웠던 쓰가루 노부마사였다.
수송에 사용할 배가 많지 않고 상륙시 피해를 줄이기 위한 방책이었다.
생각보다 반기를 든 에미시들의 수가 많았고 그들의 전투력을 얕볼 수도 없었기에 축차 투입했다가 먼저 상륙한 병력이 큰 피해를 볼까 저어했기 때문이었다.
해서 한꺼번에 병력을 모두 상륙시킨 후 보급품을 실은 배가 도착할 때까지 버틴 후 보급을 받고 우선 마쓰마에 성을 탈취할 계획이었지만 모든 것이 어그러져 버렸다.
무시무시한 흑선이 버티고 있는 한 보급이 원활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아무리 흑선의 전투력이 대단하다고 한들 한 척만으로 완벽하게 바다를 통제할 수는 없을 거다. 하지만 분명 보급에 차질이 있을 수밖에는 없어. 거기에 침몰한 선박도 많은 관계로 얼마 버틸 수도 없고.’
도중에 흑선에 의한 피해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병사들을 작은 배로 옮겨 태우게 명령했던 야마가 쇼고였다.
덕분에 병사들의 피해는 줄일 수 있었지만, 보급품을 실은 선박은 침몰해 보급품의 부족이 심각했다.
원래대로라면 최대 3일은 버틸 수 있었을 테지만 방금 확인한 보급품으로는 잘해야 2일이 한계였다.
이에 이곳에서 흩어진 병사들을 기다리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야마가 쇼고는 침중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주군. 보급이 떨어지기 전에 마쓰마에 성을 함락시켜야만 하옵니다. 그것만이 원정군이 살길입니다.”
작금의 현실에 의욕을 잃은 듯 헛웃음을 짓는 쓰가루 노부마사였다.
“허허허. 가능하겠는가? 사기가 바닥인 병사들을 데리고?”
그런 주군의 반응에 야마가 쇼고는 고개를 들고 자신의 주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곱게 죽어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니 옵니까. 죽기 살기로 덤빈다면 또 모를 일이지요. 아니면 에미시들에게 항복하는 방법 외엔 없사옵니다.”
그랬다.
현 상황에서 항복할 생각이 아니라면 어떻게 해서든 싸워 이기는 수밖에 없었다.
현실을 일깨워주는 야마가 쇼고의 말에 쓰가루 노부마사는 정신을 차렸다.
“그래. 그럴 수는 없겠지. 이곳에서 마쓰마에 성까지 하루 거리인가?”
“그렇사옵니다. 주군.”
“그럼 바로 움직이도록 하지. 과연 하루 만에 마쓰마에 성을 함락시킬 수는 있을지 모르겠네만.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봐야겠지.”
“알겠사옵니다. 주군.”
* * *
마쓰마에 성 인근에 아이누인들이 머물며 곧 있을 왜인들과의 전투를 준비하고 있을 때 해안가 곳곳을 살피기 위해 파견해 둔 정찰병이 소식을 전했다.
이곳에서 동쪽에 샤모들이 상륙했고 이곳 마쓰마에 성으로 진격하고 있다고.
이에 이곳에 머물고 있던 아이누인들의 지휘관인 샤쿠샤인과 오니비시, 그리고 박경수가 막사에 모였다.
“샤모들이 동쪽 해안가에 상륙했다고?”
“그렇다고 하더군.”
샤쿠샤인의 대답에 오니비시는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이곳에 제대로 된 포구가 있고 자신들은 이곳을 방어할 배가 없는 만큼 곧장 포구로 들이칠 줄 알았던 것이다.
“허. 이곳으로 바로 올 줄 알았더니만. 그래서 저들의 병력은?”
이에 샤쿠샤인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5천이 채 안 된다고 하더군.”
이에 오니비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응? 그렇게 적다고? 예전 보고로는 저들 본거지에 1만에 가까운 병력이 집결했다고 들었는데? 설마 나눠서 이동한 건가?”
“그럴 수도 있지.”
그러자 오니비시가 자리에서 일어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허면 뭐 하고 있나! 바로 저들을 들이쳐야지! 수가 더 늘기 전에!”
분명 1만에 달하는 원정군은 부담스러웠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샤모들이 모두 모이기 전에 최대한 타격을 줘야 한다고 생각한 오니비시였고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샤쿠샤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박경수를 바라보았다.
“흐음.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샤쿠샤인의 물음에 박경수는 잠깐 고민했다.
이곳에서 오늘 아침에 출항한 지급 전선과 오늘 오후에 마쓰마에 성 동쪽에 상륙한 왜놈들의 병력.
이를 생각해보면 시기상 분명 지급 전선이 남하해서 북상하는 왜선들을 공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아는 정일신 함장이라면 충분히 왜선들에게 피해를 주었으리라 믿었다.
문제는 지급 전선 한 척이 얼마나 피해를 줄 수 있었겠느냐는 점이다.
박경수는 지급 전선을 오늘 아침에 처음으로 보았고 정일신 함장과도 자신들이 파악한 정보를 전해주었을 뿐 이야기를 길게 하지 못했다.
해서 지급 전선의 전투력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시기가 묘하군요. 오늘 아침 정일신 함장이 지급 전선을 몰고 남하했으니 말입니다. 혹시 저들의 사기는 어땠답니까?”
박경수의 말 속에는 샤모들이 이곳으로 오는 동안 공격당하지 않았느냐는 물음이 담겨 있었다.
그동안 자신들에게 보급품을 전해주던 돛도 없이 움직이는 신기한 선박도 큰 편이었지만 오늘 아침에 불쑥 나타나 아이누인들을 놀라게 만든 선박은 더욱 거대했고 수많은 돛이 달려있어 꽤 화려했다.
‘하지만 고작 한 척의 배가 아닌가. 아무리 용맹하다 해도 100척이 넘는 샤모들의 배를 공격한다? 가능한 일인가? 하지만...’
샤쿠샤인은 전령의 보고를 떠올렸다.
이상할 정도로 사기가 저하되어 있다는 보고였다.
‘아까 보고를 들었을 때는 배를 타고 이곳까지 오느라 고생한 모양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설마?‘
“왠지 모르게 기세가 꺾여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하네.”
“그럼 오늘 아침 출항한 지급 전선이 왜놈들에게 타격을 준 것이 확실하군요. 허면 이곳에서 저들을 맞이하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샤쿠샤인의 대답에 박경수가 미소지으면서 단정적으로 말하자 오니비시는 그게 무슨 소리냐며 다시 한번 출병을 요청했다.
“분명 자네들의 배가 무척이나 거대하긴 했지만...고작 한 척으로 얼마나 큰 피해를 줄 수 있겠나! 샤모들이 나뉘었을 때 공격을 해야 하네!”
하지만 박경수는 고개를 저으며 오니비시를 설득했다.
“생각해보시죠. 정말 저들이 두 차례에 걸쳐 병력을 수송하려 했다면 굳이 이곳으로 진군할 필요가 없지요. 안 그렇습니까?”
“으음...그것도 일리는 있는데.”
박경수의 말에 샤쿠샤인은 일리가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오니비시는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샤모들이 우리를 무시하니 그런 것 아니겠나?”
오니비시의 대답에 박경수는 움찔했다.
솔직히 그럴 수도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껏 몇 번이고 깨졌던 왜놈들이었기에 그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을 거로 생각한 박경수였다.
그리고 박경수가 이곳에서 왜놈들을 맞이하려고 하는 이유는 또 있었다.
만약 정일신이 제대로 타격을 주지 못했다 하더라도 보급을 이곳에서 하기로 결정한 만큼 시간이 지나면 보급을 위해 지급 전선을 몰고 이곳으로 회항할 것이 분명했다.
지급 전선엔 후장식 화포가 장착되어 있으니 해안가에서 포탄을 날려 왜놈들에게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소리였다.
“어...그럴수도 있습니다만...저들은 벌써 몇 번이고 패배했습니다. 그런 만큼 이번에는 어떻게 해서든 승리하길 원할 겁니다. 잠깐만 기다렸다가 공격하면 그만인데 굳이 적은 병력으로 이곳을 칠 이유가 없지요.”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그리고 샤쿠샤인은 일리가 있다며 동의했기에 오니비시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이곳에서 저들을 상대하도록 하지.”
* * *
쓰가루 노부마사는 야마가 쇼고를 통해 해안가를 따라 빠르게 이동하는 병사들에게 현실을 알려줬다.
현재 자신들의 보급품이 별로 없다는 것과 살기 위해서는 에미시들을 죽이고 그들의 식량을 빼앗는 것이 유일한 살길이라는 것을.
배수진을 친 격이었는데 나쁜 방도는 아니었다.
이곳은 섬인 만큼 도망칠 곳도 마땅치 않았고 왜인들은 아이누인들을 에미시라고 부르며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기에 병사들이 독기를 품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진군하여서 해가 떨어질 무렵 마쓰마에 성이 보이기 시작하자 쓰가루 노부마사는 일단 경계를 세우고 병사들을 쉬게 했다.
아무리 보급품이 많지 않아 최대한 빨리 마쓰마에 성 주위의 에미시들을 물리치고 물자를 노획해야 한다지만 제대로 쉬지도 못한 병사들로 야간에 전투를 치를 수는 없으니 말이다.
다음 날 아침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자 곧바로 병사들을 정비한 쓰가루 노부마사는 마쓰마에 성 주위에 목책을 세우고 단단히 방어 준비를 하고 있는 에미시들을 향해 병력을 이동시키며 외쳤다.
“오늘 저 에미시들을 모조리 주살하고 저기 보이는 마쓰마에 성에서 저녁을 먹을 것이다! 그것이 유일한 살길이니 죽기 살기로 저들을 죽여라!”
“”와아아아!“”
쓰가루 노부마사의 명령과 함께 독기를 품은 병사들이 목책으로 달려들기 시작할 때였다.
퍼퍼퍼펑!
어제 왜인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화포 소리가 들려오자 목책으로 달려들던 병사들이 기겁해서 소리가 들려온 뒤편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어제 그들을 괴롭혔던 바로 그 서양 선박이 있었다.
“저...저...”
이에 다들 당황하고 있을 때 서양 선박에서 발사한 화포가 왜인들에게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끄아악!”
재수 없게 몇몇이 날아온 포탄에 맞아 깔렸다.
그리고.
콰콰콰쾅!
폭음과 함께 포탄이 터졌다.
그것으로 승부는 갈렸다.
해안가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화포 소리에 왜인들은 기세가 꺾이고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뒤편에 서 있던 왜인들은 포탄을 피해 흩어졌고.
그나마 쓰가루 노부마사가 고래고래 소리질러 왜인들을 추스르고 기마무사들과 함께 아이누인들을 향해 돌격했다.
산으로 도망쳐봐야 희망은 없었고 저들에게 붙는다면 함부로 포탄을 날리지 못할 거라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이미 기세가 꺾인 3천 남짓의 병력으로 미리 왜인들을 상대하기 위해 포진하고 있던 아이누인들을 이기기엔 무리였다.
더불어 제대로 진형을 짜고 왜인들을 공격할 준비를 하던 신식 소총으로 무장한 아이누섬의 아이누인들이 대활약했고.
그렇게 도호쿠 지방 영주들의 정예병력을 긁어모아 만든 에조 원정군은 무참하게 패배해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