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히로사키 번에서 에조까지 배를 타고 한나절이면 도착한다지만 워낙 많은 사람이 배에 타고 있어 자리가 부족해 편히 쉬지도 못하던 상황이었다.
그렇게 지루하게 어서 에조로 도착하기만을 기다리던 왜인들은 이쪽으로 다가오는 생소한 모양의 선박을 보고 지루함을 달랠 겸 떠들어대고 있었다.
“허어. 정말 배가 크긴 크네.”
“서양배들은 다 저렇게 커다란 건가?”
“글쎄...”
왜인들은 커다란 서양 선박을 구경거리로 생각하고 열심히 떠들어댔지만, 곧 의아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근데 저거 어째 방향을 틀지를 않네?”
“그러게?”
“이쪽에 무슨 용건이라도 있나?”
“그런가 본데?”
자신들의 선단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는 서양 선박을 보고 왜인들은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저 커다란 범선이 속도를 줄이지 않고 계속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어? 저거 너무 속도가 빠른 것 아닌가?”
“그...그런 거 같은데?”
점점 빠르게 다가오던 커다란 범선은 곧 선단 외곽에 포진한 조그마한 어선과 충돌할 것 같았다.
“어? 어어!”
“저...저거!”
“아이고! 저러다!”
“피해라!”
커다란 범선이 선단 외곽에서 항해하고 있는 조그마한 어선과 충돌할 것 같았지만 아슬하게 스쳐 지나가자 이를 지켜보던 왜인들은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 쉴 때였다.
퍼퍼퍼펑!
갑작스럽게 폭음이 들려왔다.
선단 외곽의 어선을 깔아뭉갤 기세로 덤벼들던 커다란 범선 양쪽에서 화포를 발사했는지 그 주변에 있던 몇몇 선박이 박살 나고 갑판 위에 머물러있던 왜인들이 충격에 튕겨 나가는 것이 보였다.
“저...저...”
“저게...무슨...”
갑작스러운 공격에 왜인들이 경악하고 있을 때.
콰콰콰쾅!
무언가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서양 선박에 공격받았던 어선들이 폭발하며 침몰하는 것이 보였다.
* * *
콰콰콰쾅!
정일신은 선수에서 잠망경을 통해 포탄이 명중한 조그마한 선박이 뒤늦게 폭발해 침몰한 것을 확인하고 씩 웃으면서 크게 소리쳤다.
“봐라! 왜놈들은 숫자만 많을 뿐! 결코, 이 지급 전선을 상대할 수 없다! 그러니 이대로 계속 전진한다! 이대로 저들의 선단을 돌파할 테니 다들 마음 단단히 먹어라!”
갑판 위에서 갑오 소총을 들고 총안으로 바깥 풍경을 살피던 선원들은 침몰하는 선박들을 보고 기세등등해져서 답했다.
““예! 함장님!””
선원들의 사기가 나쁘지 않자 만족한 정일신은 자신의 뒤편에서 굳은 표정을 짓고 있는 부함장을 바라보았다.
“부함장!”
“예! 함장님!”
“기관실에 전해서 계속 이 속도를 유지하라고 전하게. 그리고 돛의 조정은 자네가 맡고. 절대 속도를 늦추지 말게. 배의 속도가 떨어지면 왜놈들이 도선 할 수도 있네.”
“알겠습니다. 함장님.”
정일신의 명령에 부함장이 뒤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정일신은 곧바로 방어판 뒤에서 갑오 소총을 들고 있는 선원들을 바라보며 외쳤다.
“방어판을 믿어라! 고작 왜놈들의 조총 따위에 뚫리지는 않는다! 갑오 소총을 든 선원들은 왜놈들을 보이는 족족 쏴 버려!”
“”예! 함장님!“”
* * *
“저게...무슨...”
갑작스러운 폭음에 놀란 쓰가루 노부마사와 야마가 쇼고는 대경실색하여 대장선 안쪽의 누각에서 나와 폭음이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선단 외곽에서 항해하고 있던 조그마한 선박 5척이 침몰하고 주변에 잔해와 더불어 수많은 병사가 물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더불어 이 사단을 초래한 것으로 보이는 커다란 서양 선박은 기세를 올려 거침없이 선단 안쪽으로 파고드는 것이 보였다.
그러자 커다란 서양 선박 근처에 있거나 선박의 이동 경로에 있던 선박들이 기겁해서 방향을 틀고 피하느라 혼란스러워하는 광경이 보였고.
2층 누각에서 그 광경을 목격한 쓰가루 노부마사는 분기를 터트리려 할 때였다.
퍼퍼퍼펑!
다시금 서양 선박의 양 현에서 화포가 발사되었고 3척의 선박이 포탄에 맞은 듯 갑판 위의 선원들이 충격에 날아가고 조그마한 어선의 경우는 직격당하자마자 구멍이 뚫린 듯 침몰하기 시작했다.
“이...이런...”
콰콰콰쾅!
그나마 포탄을 맞고 버티던 세키부네 한 척이 갑작스럽게 폭발하면서 침몰하기 시작하자 정신을 차린 야마가 쇼고가 곧바로 소리쳤다.
“주군! 일단 피하시옵소서!”
야마가 쇼고의 발언에 쓰가루 노부마사는 분노해서 그를 바라보고 소리쳤다.
“그게 무슨 소리냐! 적은 고작 한 척이다!”
“그 배 한 척의 공세가 무척이나 거세옵니다! 그리고 흑선은 크기가 클수록 많은 화포를 장착하고 있사옵니다. 저 정도 크기의 흑선이라면 굉장히 많은 화포를 장착하고 있을 것이옵니다.”
야마가 쇼고의 간언에도 쓰가루 노부마사는 고개를 돌려 마치 양 떼 무리에 덤벼든 늑대처럼 거침없이 달려드는 커다란 범선을 보고 손을 들어 가리켰다.
“그래 봐야 한 척의 배일 뿐이다! 이 쓰가루 노부마사가 고작 배 한 척이 두려워 피하란 말이냐!”
그러나 야마가 쇼고는 다시 한번 부복하며 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외쳤다.
“맞사옵니다. 고작 배 한 척이옵니다. 그 한 척의 배를 상대하기 위해 수많은 희생을 감수하실 생각이시옵니까! 주군! 보십시오! 잠깐 사이에 벌써 8척의 선박이 침몰했사옵니다.”
2번의 포격으로 인해 100척의 배 가운데 8척의 배가 침몰한 상황이었다.
비록 포탄에 맞은 대부분의 선박이 병력을 수송하기 위해 징발한 어선이라고는 하나 피해가 컸다.
그런 상황에서 저 배를 상대하기 위해 덤벼들었다가 잘못하면 막대한 피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해전은 생각지도 않았던 상황 아닌가.
야먀가 쇼고는 일단 어떻게 해서든 피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쓰가루 노부마사의 생각은 달랐다.
“침몰한 선박들은 어선을 병사들을 수송하기 위해 징발한 것이 아니냐. 전선이 아니니 무력하게 당했을 뿐이다. 세키부네라면 다를 것이야.”
퍼퍼퍼펑!
다시 한번 서양 선박에서 화포가 발사되는 소리가 들려왔고 자신들을 공격하는 서양 선박을 피해 달아나던 세키부네 2척의 갑판 위에 포탄이 떨어져 수많은 혈화가 피어났다.
이에 이를 악물면서 방금 포탄에 맞은 것으로 보이는 세키부네를 가리키며 소리치는 쓰가루 노부마사였다.
“보라! 세키부네만 하더라도 충분히 적의 포격을 견...”
콰콰콰쾅!
쓰가루 노부마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금 무언가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방금 공격받았던 세키부네 2척의 갑판이 박살이 나며 배가 기울기 시작했다.
이에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세키부네를 바라보는 쓰가루 노부마사였다.
“저...저게...어찌...”
고작 포탄 몇 발에 세키부네가 침몰하자 야마가 쇼고 역시 당혹스러워했지만, 지금이 자신의 주군을 설득할 절호의 기회라는 것을 파악하고 곧장 큰소리로 외쳤다.
“주군! 소신 목숨을 걸고 간언하옵니다. 주군은 이번 원정군의 총대장이시옵니다. 총대장의 임무는 에미시들의 토벌이지 서양 선박의 격퇴가 아니옵니다. 주군의 말씀처럼 세키부네를 모두 동원한다면 저 주제를 모르고 덤벼든 서양 선박을 징치할 수 있겠으나 수많은 피를 흘릴 수밖에 없사옵니다. 이곳에서 병력을 잃게 되면 무슨 수로 에미시들을 정벌하겠나이까.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주군!”
야마가 쇼고의 충언에 쓰가루 노부마사는 분기를 참지 못하고 괴성을 질렀다.
“으아아아!”
* * *
퍽!
살벌한 소리와 함께 방어판에 무언가가 박히는 소리가 들려오자 갑오 소총을 장전하고 있던 젊은 선원이 흠칫했다.
‘조총인가?’
방어판은 꽤 두꺼운 나무판 안쪽에 얇은 강철로 코팅을 해 두었기에 고작 조총 따위에 뚫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자신을 노린 것이든, 아니면 우연히 날아온 것이든 간에 자신이 몸을 숨기고 있는 방어판에 총탄이 날아와 박히자 혹시라도 뚫리진 않을까 걱정이 될 수밖에.
이를 눈치라도 챈 듯 뒤편에서 정일신의 외침이 들려왔다.
“적들의 조총은 절대로 방어판을 뚫지 못한다! 걱정하지 말고 적을 쏴라!”
잠시 주춤했던 선원은 정일신에 말에 용기라도 얻은 듯 다시 장전한 갑오 소총을 총안에 걸쳤다.
곧 지급 전선을 향해 돌진하는 조운선과 비슷한 크기의 왜놈들의 배가 보였고 젊은 선원은 그 배의 갑판에서 조총을 들고 있는 왜놈에게 조준한 후 방아쇠를 당겼다.
탕!
* * *
어느덧 적 선단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렀기에 총소리와 화포의 발사음으로 가득했던 지급 전선에 적막이 찾아왔다.
이에 정일신은 갑판 위에 머무르고 있던 선원들을 바라보고 큰소리로 외쳤다.
“잠시간의 휴식이니 일단 재정비부터 해라! 다들 탄환부터 보충하고!”
“예! 함장님!”
정일신의 말이 떨어지자 방어판 뒤에서 갑오 소총으로 사격하던 선원들은 떨어진 탄환을 보충하기 위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갑판 밑에서 몇몇 선원들이 물병과 육포가 든 바구니를 들고 올라와 선원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보였고.
이를 바라보고 있을 때 선미에 머물며 배를 운용하고 있던 부함장이 다가왔다.
“함장님. 선회할까요?”
“그러도록 하게. 아. 혹시 포탄의 소모량은 알고 있나?”
“방금 보고를 받기로는 120발을 소모했다고 합니다.”
“그래? 알겠네.”
보고를 끝낸 부함장이 멀어지자 정일신은 속으로 자신이 확인한 침몰한 왜선의 수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28척 정도로 기억하는데...나쁘지는 않군.’
사용한 포탄의 수를 생각하면 조금은 아쉬운 결과였다.
일반 쇳덩어리 포탄과는 다른 작렬탄을 사용했으니 말이다.
명중률도 명중률이지만 한 배에 여러 발의 포탄이 명중한 경우도 꽤 있었으니.
하지만 정일신은 충분히 만족했다.
단 한 번의 전투로 큰 피해 없이 적 선단의 3할을 침몰시킨 셈이니까.
물론 침몰한 선박의 절반은 조그마한 어선에 가까웠지만, 절반은 저들의 주력함이라고 할 수 있는 세키부네였으니.
그때 배의 속도가 살짝 줄어들고 선회하는 것이 느껴졌기에 정일신은 목을 축이고 육포를 우물거리는 선원들에게 외쳤다.
“조금 있으면 다시 전투가 시작될 것이다. 준비하도록!”
“”예! 함장님!“”
정일신은 배가 완전히 선회했다는 것을 깨닫고 잠망경을 통해 왜놈들의 선단을 확인하고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원형진을 유지하며 항해하던 왜놈들의 선단이 진형을 풀고 흩어지기 시작한 것이 보였다.
뿐만 아니라 몇몇 세키부네는 상륙을 대비해 배 양쪽에 묶어두었던 작은 배들을 띄우고 수송하던 병사들을 내리게 한 후 지급 전선을 향해 달려드는 것이 보였다.
‘이것 봐라? 병력의 피해를 최대한 줄이겠다 이건가? 저 세키부네는 시간을 끌기 위한 미끼고?’
정일신은 왜선들의 움직임을 통해 저들의 생각을 파악하고 잠시 고민하다 결정을 내렸다.
‘당장 저들을 추격하기에는 달려드는 전선들이 부담스러우니 일단 저들부터 빠르게 격침하고 북상해야겠군. 이곳에서 2시간 거리이니 저들을 빠르게만 처리한다면 왜놈들이 상륙하기 전에 몇 번은 더 공격할 수 있을 테고. 확실하게 왜놈들의 수를 줄일 수 있겠군. 이거 잘만하면 왜놈들의 태반을 수장시킬 수도 있겠는데?’
정일신의 예상보다 왜선들의 전투력이 약했다.
물론 저들이 해전을 생각하지 않고 병사들을 최대한 수송하기 위해 배에 병사를 꽉 채웠기에 제대로 전투를 벌이기가 어려웠다는 점은 알고 있었다.
배에 태운 병사수가 많은 만큼 만약 지급 전선에 달라붙었다면 또 모를 일이지만 이를 경계해 방어판도 장착하고 최대한 속도를 냈던 지급 전선이었기에 저들이 올라타지 못해 별다른 위협은 없었다.
저들이 갑판 위에서 어쩌다 쏘는 조총은 방어판에 막혔고.
정신이 없던 것인지 준비를 안한 것인지 제대로 된 포탄 하나 날아오지 않았으니.
해서 정일신은 지급 전선을 향해 달려드는 세키부네를 만만하게 생각하고 빨리 격침하기 위해 세키부네 사이로 배를 몰았다가 기겁했다.
바로 전에 선단을 관통할 때만 해도 어떻게 해서든 거리를 벌리려고 했던 왜선들과는 달리 이 세키부네들은 지급 전선과 충돌까지 생각하고 달려들었던 것이다.
이에 살짝 놀란 정일신이 지급 전선을 선회시켜 최대한 저들의 접근을 막으면서 포격을 가했지만, 포탄을 맞고도 달려들던 세키부네 한 척이 인접해서 터지는 바람에 피해를 볼 뻔 했다.
정일신은 이를 갈고 최대한 거리를 벌려가며 달려드는 세키부네를 처리하기 위해 지급 전선을 지휘할 수 밖에 없었고 덕분에 정일신이 생각한대로 지급 전선 한 척으로 대부분의 왜선을 침몰시키는 일은 물 건너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