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처음 정일신이 박경수를 통해 왜국 선단의 규모를 파악했을 때 의아했던 점은 생각외로 왜국 선단의 규모가 작다는 것이다.
대부분 선박이 조운선과 비슷한 크기라면 또 모를까 절반은 어선에 가까운 소형 선박이라고 했으니.
그러한 선단으로 무려 1만 명의 병사와 물자를 옮기기가 과연 쉬울까 싶었고.
그리고 정일신은 깨달았다.
왜놈들 역시 바보가 아닌 이상 정보를 수집했을 거라고.
덕분에 아이누인들에게 제대로 된 전선이 없다는 것을 잘 알게 되었을 테고 어차피 제대로 된 상륙지점만 확보한다면 후에 아무런 방해 없이 물자를 운송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다는 것을 말이다.
어차피 히로사키 번에서 홋카이도 남쪽의 마쓰마에 번 사이에 거리가 그렇게 멀지는 않았다.
거리로는 60km 정도였고 배를 타고 한나절이면 충분히 오갈 수 있었다.
그러니 일단 병력만 왕창 싣고 해협을 건너 홋카이도 남쪽에 내려놓고 돌아가서 물자를 실어 나를 계획이라는 것을 파악하게 된 정일신이었다.
‘결국, 왜군은 해전을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소리다. 그저 한계까지 병력을 태워 나를 생각이지. 그렇다면 위험을 무릅쓰고 적 선단에 뛰어드는 것도 나쁠 것은 없는데...’
정일신이 계획과는 달리 지급 전선을 마치 거북선처럼 돌격선으로 써먹어 볼까 하고 생각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 번째로는 왜놈의 선단으로 돌격해야 지급 전선의 후장식 화포를 최대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급 전선에 장착되어있는 60mm 후장식 화포는 총 12문.
원래 계획대로 외곽을 돌며 공격하면 기껏해야 6문의 후장식 화포를 사용하는 것이 다일 것이다.
하지만 지급 전선을 왜놈의 선단에 돌입하게 되면 주변이 죄다 적이니만큼 12문의 후장식 화포를 모두 사용할 수 있어 원래의 계획보다 화력을 두 배로 올릴 수 있게 되니 더 큰 피해를 줄 수 있었다.
두 번째로는 왜놈의 선단이 어떤 진형으로 움직일지는 모르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안쪽에 커다란 배가, 외곽에는 작은 배가 위치하는 만큼 원래 계획대로 외곽을 돌며 공격해봐야 비싼 포탄을 사용해서 어선을 공격하는 셈이 된다.
위험성은 적을 테지만 효율은 떨어지는 셈이다.
‘일단은 왜놈들의 선단을 직접 보고 결정하자. 상황을 보아하니 저들은 해전을 생각조차 안 하고 있는 것 같은데...잘만하면 왜놈들에게 커다란 피해를 줄 수도 있겠지. 이런 기회를 놓칠 수야 없는 법 아닌가.’
그때였다.
“함장님! 왜놈들의 선단입니다!”
홋카이도에서 출항한 지 고작 2시간 만에 왜놈들의 선단을 발견했다는 견시수의 외침에 정일신은 고개를 들어 남쪽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배가 보였기에 정일신은 허리춤에서 망원경을 꺼내 저들의 진형을 살펴보았다.
“흐음...장관이군.”
비록 지급 함선보다는 작은 배들이라고는 하나 수많은 배가 돛을 펴고 노를 저어가며 올라오는 모습은 꽤 인상적이었다.
이에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은 정일신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적 진형을 살펴보았다.
정일신의 예상대로 진형 안쪽에 대장선으로 보이는 화려하고 커다란 선박들이 모여있었고 그 외곽으로는 조운선과 비슷해 보이는 세키부네가, 최외곽으로는 어선으로 짐작되는 조그마한 배들이 있었다.
‘역시...예상대로군.’
정일신이 망원경을 옮겨 갑판 위의 상황을 파악하자 그의 예상대로 모든 배 위에는 왜인들이 빽빽하게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이러면 좀 과감하게 움직여도 되겠군. 아무리 왜인들이 날렵하다지만 지급 전선에 올라타긴 어려울 테고.’
보통 이 시기의 왜인들의 해전 전술은 간단했다.
갑판 위에서 활과 조총을 사용하여 적 선원을 상하게 하거나 도선 하는 것.
어떻게 보면 수중에서의 공성전과도 같았다.
하지만 정일신이 생각하기엔 저 정도로 빽빽하게 사람들이 갑판 위에 서 있으면 활이나 총을 사용하기도 쉽지 않아 보였다.
다만 지급 전선을 왜놈들의 선단 속으로 돌격시키면 혹시 모를 도선의 위험성이 있긴 하지만 정일신은 지급 전선의 기동성을 믿고 한번 덤벼보기로 했다.
‘한번 아슬하게 부딪쳐 보고 힘들다 싶으면 빠지면 그만이지.’
“부함장. 보일러의 상태는?”
“이미 예열한 지 오래입니다. 함장님.”
“그렇군. 그럼 속도를 올리도록 하게. 전속력으로.”
“알겠습니다. 함장님.”
정일신의 명령을 받은 부함장이 뒤쪽의 선원에게 명령을 내렸고 선원은 곧장 배 밑의 기관실로 향했다.
그리고 곧장 부함장에게 다른 명령을 내렸다.
“부함장. 총원 전투 준비를 하라 이르게. 그리고 원래의 계획과는 달리 저들의 선단을 관통할걸세. 그러니 화포의 발포는 화포장이 책임지라고 하게.”
“헉! 아...알겠습니다. 함장님.”
고작 배 한 척으로 저 수많은 배가 몰려있는 선단을 돌파하겠다는 정일신의 명령에 기겁했던 부함장은 곧 자신을 매서운 눈초리로 노려보는 정일신을 보고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곧장 자신의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선원에게 명령을 내려 포 갑판으로 향하게 했고 동시에 부함장이 갑판 위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총원 전투 준비! 방어판을 장착해라!”
부함장의 외침에 따라 갑판 위의 선원들이 부리나케 몸을 움직여 배 곳곳에 있는 함을 열고 그 안쪽에서 방어판을 꺼내 배 난간에 부착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배를 운용하면서 간혹 해적들과 싸워본 결과 생각보다 근접해서 전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후장식 화포의 명중률 때문이었다.
덕분에 근접 전투 시 갑판 위에서 적이 쏘아대는 머스킷에 선원들이 다치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정성국은 갑판 위의 선원을 보호하는 최소한의 조치로 전투 시에는 방어판을 부착시키는 방식을 떠올렸다.
조선의 수군이 화살을 막기 위해 사용하는 방패판 같은 느낌이랄까.
다만 확실하게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 안쪽에 얇은 철판을 씌웠고 배 난간 안쪽에 이 방어판을 꽂을 수 있게 개조했다.
그뿐만 아니라 방어판 한가운데에 총안을 만들어 안전하게 사격할 수 있게 만들었고.
더불어 방어판을 장착하면 배의 난간이 더 높아지는 셈이라 혹시 모를 도선을 막는데도 약간의 도움을 주었다.
부함장의 명령에 따라 갑판 위의 선원들이 지급 함선의 배 난간에 방어판을 모두 장착하자 시야가 꽤 가려졌다.
이를 보고 슬쩍 혀를 찬 정일신은 선수로 이동했다.
선수에 장착한 방어판에는 무언가를 장착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부함장은 방어판을 꺼낸 함에서 기다란 원통 모양의 잠망경을 꺼내 정일신에게 건넸다.
정일신은 이를 받아들고 방어판에 부착한 뒤 곧장 얼굴을 가져다 댔다.
“잘 보이는군.”
* * *
“어?”
갑판 위에서 지루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던 한 사내가 저 멀리 보이는 한 척의 배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이에 옆에 있던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왜 그래?”
“저기 저건 뭐지?”
“응?”
아이누인들에게는 제대로 된 선박이 없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었기에 꽤 지루한 항해였다.
그런 만큼 사내의 발견에 갑판 위에서 시간을 때우고 있던 왜인들이 관심을 보였다.
“저건...”
그중에 시력이 좋은 한 사내가 희한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생긴 게 어째 흑선 같은데?”
“흑선? 그 서양배?”
“응. 생김새가 흑선 같은데...”
사내의 말에 갑판 위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흑선을 구경하기 위해 한쪽으로 몰리자 선원들이 기겁하며 말렸다.
“어어! 한쪽으로 몰리면 어떻게 해요! 그러다 배가 뒤집힌다고!”
선원의 비명에 움찔한 갑판 위의 사람들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고 선원이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 처음 배를 발견했던 왜인 사내가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근데 왜 이쪽을 향해서 오는 거 같지?”
* * *
“흑선? 서양의 배 말인가?”
“그렇사옵니다. 주군.”
흑선은 이 시기 왜인들이 서양배를 보고 칭하는 단어였다.
이 시기 유럽의 범선들은 방수를 위해 목조 선체에 타르를 잔뜩 칠했기에 선체가 검은색이었고 덕분에 검은 배, 즉 흑선으로 불리곤 했다.
“흐음...”
야마가 소코가 부복하며 전한 정보에 이번 정벌의 총대장을 맡은 쓰가루 노부마사는 신음성을 흘렸다.
그는 총대장인 만큼 여러 정보를 잘 알고 있었다.
아이누인들이 철포를 사용했다는 소식에 놀란 막부는 정보력을 동원했고 덕분에 아이누인들 뒤에 서양 세력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이는 쓰시마 번에서 보낸 정보를 통해 짐작한 것인데 그들이 보낸 정보에 의하면 1년에 한 번 서양의 대규모 선단이 조선과 쓰시마섬 사이의 해협을 통과한다는 보고였다.
이에 혹시나 지방의 번이 막부 몰래 서양 세력과 밀무역이라도 하나 살펴봤지만 그런 기미는 없었다.
허면 이 조선과 쓰시마섬 사이를 통과했다는 서양의 선단은 어디로 향했을까.
조선이 서양 세력과 교역할 일은 없을 테니 결국 이 선단이 갈 곳은 에조 뿐이었다.
즉 이 선단이 아이누인들과 교역해서 아이누인들이 철포를 손에 넣은 것이라고 짐작한 막부였고 이를 이번 정벌에 총대장인 자신에게도 알려왔다.
아이누인들에게도 뒷배가 있으니 조심하라는 의미였다.
그렇기에 갑자기 서양배가 나타났다는 보고에 쓰가루 노부마사는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공격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런 생각이 들자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생각보다 배를 모으기가 쉽지 않아 쓰가루 노부마사는 기껏해야 6, 7천 명을 태우면 만선인 배에 최대한 사람들을 싣게 했다.
이는 아이누인들이 제대로 된 해전을 치를 역량이 전혀 없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헌데 아이누인들과 교역하는 것으로 짐작하는 서양 세력이 아이누인들을 도와 지금 이 상황에서 함대를 공격하면 막대한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이에 쓰가루 노부마사는 자신의 곁에 부복해 있는 야마가 소코에게 급히 물었다.
“혹시 저들의 선박은 몇 척이나 되는가!”
“한 척이옵니다. 주군.”
“고작 한 척?”
“그렇사옵니다. 주군.”
야마가 소코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쓰가루 노부마사였다.
아무리 서양배가 크고 강력하다 한들 고작 한 척으로 덤벼들 거로 생각하진 않았기에.
이에 살짝 안도한 쓰가루 노부마사가 야마가 소코에게 물었다.
“자네는 저 배의 정체를 뭐라고 생각하나?”
“아마도 에미시들과 교역을 하고 저들에게 철포를 판매한 그 서양 세력의 배가 아닐까 하옵니다.”
“그렇겠지. 이 시기에 나타났으니. 허면 인제 와서 나타난 이유는 뭐라고 판단하는가?”
야마가 소코는 잠시 상식적으로 상황을 판단해보고 대답했다.
“저들도 상황을 파악한 거라고 보입니다. 서양놈들은 무척이나 탐욕스러운 자들 아니 옵니까. 무책임하게 에미시들에게 철포를 팔았다가 일이 커지니 눈치를 살핀 것 같사옵니다.”
그러자 일리가 있다는 듯 쓰가루 노부마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렇군. 그리고 에미시들이 우세해 보여서 지금까지는 가만히 있었다?”
“그렇사옵니다. 주군. 그리고 이제는 힘들어 보이니 최소한의 협상이라도 하겠다는 심보 아니겠사옵니까?”
“그래서 배를 보냈다? 연락선으로?”
“아마 그렇지 않겠사옵니까? 고작 한 척으로 덤벼들 리는 없을 거라 여겨집니다.”
야마가 소코의 말에 내심 동의한 쓰가루 노부마사가 그를 보고 물었다.
“그럼 어찌해야 할까?”
“일단 저들의 사신을 만나는 것도 나쁠 것은 없어 보이옵니다. 일단 저들의 정체부터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니 말이옵니다.”
협상하든 말든 일단 만나서 저들의 정체부터 파악하자는 답변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쓰가루 노부마사였다.
“그렇군. 알겠네. 자네는 저들의 연락선이 가까이 다가오면 이곳으로 안내하도록 하게. 내가 저들을 직접 만나보도록 하지.”
“알겠사옵니다. 주군.”
그렇게 대화를 끝내고 부복해있던 야마가 소코가 일어날 때 바깥에서 폭음이 들려왔다.
퍼퍼퍼펑!
갑작스러운 폭음에 대경한 쓰가루 노부마사가 소리쳤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