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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68화 (68/850)

68화

정성국은 강에서 불어오는 훈훈한 바람이 얼굴을 간지럽히는 것을 느끼면서 생각했다.

‘생각보단 괜찮구나. 적당히 돛을 사용하니 너무 느리지도 않고. 언제 새남포를 한번 방문해야 하는데 그때도 그냥 이 배를 타고 움직여야겠다.’

정성국은 현재 지급 전선을 타고 새한강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정성국이 이번에 움직인 이유는 당분간 수도로 사용할 새로운 도시가 들어설 장소를 직접 보기 위해서였는데 일단은 왕이 되다 보니 만약을 대비한 호위대원의 숫자만 해도 꽤 되었다.

거기에 정성국을 따라나선 인물들까지 생각하면 정기적으로 오가는 수송선에 타기 힘들었기에 새김포의 선착장에 정박 중이던 지급 전선에 올라탔다.

정성국은 딱히 새크라멘토강을 새한강이라고 명명하지는 않았지만, 강 하류에 만든 마을 이름을 새마포로 정해서 그런지 자연스럽게 조선인들은 이 강을 새한강이라고 불렀다.

처음에 이를 알게 된 정성국은 속으로 투덜댔었다.

‘매번 나보고는 무성의하게 이름을 짓는다고 구시렁거리더니...’

그때 뒤쪽에서 탄성과 함께 하얀 들꽃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 이곳은 볼 때마다 대단한 것 같아요.”

정성국이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리자 강 근처에 정갈하게 조성된 논밭이 보였다.

논밭에는 여러 사람이 파종하느라 바쁜 것이 보였다.

정성국은 이를 잠시 바라보다가 자신의 뒤쪽에 있는 개발청장을 바라보았다.

“이보게. 개발청장.”

“예. 전하.”

“저들은 개척단 소속이 아니지?”

정성국의 물음에 빙그레 웃으며 답하는 개발청장이었다.

“그렇습니다. 이젠 개척단 소속이 아니지요.”

“분배는 끝났나?”

“그렇습니다. 전하. 겨우내 행정청과 함께 미리 일을 해두었던지라.”

“그렇군.”

지금까지 새한강을 따라 조성된 논밭을 관리했던 인원들은 모두 개척단 소속이었다.

이 개척단은 이주 초기 효과적으로 인력을 사용하기 위해 만든 단체로 주로 기술보다는 이곳에서 농사를 짓길 원하는 이주민이나 원주민들이 일괄적으로 소속된 단체였다.

북미왕국은 개인의 토지 소유를 허용하지 않았기에 개간된 논밭을 임대받기 위해서는 개척단에 소속되어 일정 기간 일을 해야 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이곳에 정성국과 함께 이주했던 이주민들과 그들을 돕기 위해 개척단에 소속된 원주민들은 정해진 기간을 다 채웠기에 이번에 원하는 논밭을 임대받게 되었다.

당연히 이들은 이곳에서 가장 생산성이 높은 논밭을 선택했고.

그곳이 지금 정성국이 바라보고 있는 강 근처에 조성된 논밭이었다.

“분위기는 어떤가?”

“당연히 좋습니다. 전하. 개척단에 소속되었을 때와는 상황이 달라졌으니까요.”

개척단에 소속되어 논밭을 경작했을 때는 논밭에서 얼마나 수확하든 간에 그 수확물은 모두 행정청에서 가져갔다.

물론 개척단에 소속되었을 때는 개척단에 소속된 일꾼에 가까웠고 그 대가를 충분히 지급했었기에, 그리고 일정 기간만 일하면 잘 개간된 땅을 임대받을 수 있었기에 이들은 별다른 불만을 품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제 저들은 임대한 땅에서 나온 수확물의 일정 비율을 세금으로 내기만 하면 나머지는 자신들의 것이니 아무래도 더 의욕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긴 했다.

“그래? 다행이군. 세금 때문에 반발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처음에야 이런저런 말이 있긴 했습니다만 행정청에서도 잘 설명하니 이제는 오히려 나쁠 것은 없다는 분위기입니다.”

이번에 임대한 토지에서 나오는 소출의 4할을 세금으로 내야 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개척단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은 살짝 동요하긴 했었다.

조선인들은 이 세금을 처음에는 전세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세로 소출의 4할을 내고 다른 잡세를 낼 것을 계산하니 과연 개척단을 나와 땅을 임대받는 것이 개척단에 계속 소속되어 일한 대가를 받는 것보다 이득인지 계산하기 애매했던 것이다.

그나마 개척단에 소속되어 그동안 이곳에서 농사를 지어보았기에 이곳의 생산력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강력하게 불만을 표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곳은 조선과는 달리 역과 공납이 없고 다른 잡세들도 없이 그저 임대한 토지에서 나오는 소출의 4할만 세금으로 내면 끝이라는 행정청의 설명에 조선인들은 그 말이 정말이냐며 확인하기 바빴다.

그리고 행정청에서 확답해주자 조선인들은 천세가 아닌 만세를 외쳤고 말이다.

정성국은 행정청장의 답변에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강가에 조성된 논밭에서 일하고 있는 농민들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는 고생한 만큼의 보답도 받지 못했지만, 이곳에서는 충분히 누리고 살 수 있겠지.’

* * *

“이곳이로군.”

“그렇습니다. 전하.”

새한강을 거슬러 한참을 올라가자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새로운 도시의 위치는 결국 정성국이 기억하는 예전 새크라멘토가 존재했던 곳이었다.

이곳은 원래 마이두 족의 영역으로 이곳에 새로운 도시를 세우고 정성국이 살 궁궐을 만든다고 하자 마이두 족이 굉장히 좋아했다.

자신들이 살던 지역이 그만큼 좋은 곳이라는 방증이라나.

강 오른편에는 임시로 만든 선착장이 보였고 그 선착장에는 수송선으로 사용하는 200톤급 기선이 한 척 정박되어 있었다.

그리고 선원들이 열심히 물자를 내려놓고 있었고.

선착장 주변에는 창고로 사용하는 목조건물들과 이곳에 제대로 된 도시를 건설할 때까지 일꾼들이 머무는 수많은 목조건물이 세워져 있었다.

이번 도시 건설은 꽤 장기적으로 진행되는 만큼 당장 일꾼들이 거주할 마을부터 만드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리고 곳곳에 임시로 가마를 세워 열심히 벽돌을 굽고 있는지 굴뚝으로 연기가 솟아오르는 것이 보였고.

처음에는 다른 마을처럼 목조건물을 세울 생각이었지만 조선 출신의 청장들이 결사반대했다.

그래도 명색이 수도인데 개척촌처럼 벽돌을 사용해 괜찮은 건물을 짓기를 바라는 조선 출신의 청장들이었다.

개척촌의 풍경은 기존 조선의 풍경과는 이질적인데 이들이 조선풍의 건물을 짓길 원하는 것이 아니라 개척촌의 건물을 짓길 주장하자 내심 만족스러웠던 정성국은 흔쾌히 동의했고.

덕분에 이 도시는 벽돌을 사용해 지은 건물들이 들어설 예정이고 이는 정성국이 기억하는 근대 유럽의 도시 풍경과 흡사할 것이다.

정성국이 지급 전선에서 주변 풍경을 둘러보고 있을 때 어느덧 지급 전선이 선착장에 정박했고 정성국이 일행들과 함께 지급 전선에서 하선했다.

그러자 미리 준비라도 했던 것인지 선착장 앞에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정성국이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마차는 궁궐이 들어설 지역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정성국은 마차 안에서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곳의 땅덩이는 무척이나 넓었고 그런 만큼 도로도, 건물의 면적도 꽤 크게 잡았다.

그런데도 한적하다기보다는 꽤 북적거리는 느낌이 있었는데 이는 어떻게 보면 북미왕국이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동원해 건설하는 도시였기 때문이다.

이를 보고 마차에 함께 올라탔던 하얀 들꽃이 감탄사를 토했다.

“굉장히 역동적인 곳이네요.”

“그러게나 말이다.”

“근데 이곳은 새김포보다 도로가 더 큰 것 같아요.”

“도로는 도시의 혈맥과도 같으니까. 그리고 나중에 확장하겠다고 고생할 바에는 처음부터 크게 만드는 것이 나아. 어차피 땅이야 넓으니.”

이미 근대 시대부터 개발된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 독일 베를린 같은 역사가 깊은 대도시의 경우는 훗날 도로 확장공사를 하고 싶어도 도로 주변의 초고층 건물들이나 예전부터 그 자리를 지켜온 고풍스러운 건물들을 철거할 수 없어 교통 체증에도 불구하고 도로 확장을 포기하는 경우가 있다고 알고 있는 정성국이었기에 이곳의 도로는 새김포보다도 폭을 넓게 잡았다.

처음 새김포에서 도시 건설을 할 때만 해도 도로가 너무 넓은 것이 아니냐며 불만을 제기한 사람들도 슬슬 마차가 오가고 나니 정성국이 왜 그렇게 도로의 폭을 넓게 잡았는지 깨달았기에 더는 반발하지도 않았고.

“와! 저곳이군요! 궁궐이 들어설 자리가. 굉장히 넓은데요?”

“그러게 말이다.”

하얀 들꽃의 감탄사에 정성국은 궁궐이 들어설 자리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저 넓은 공터에 궁궐을 지을 생각을 하니 암담했기 때문이다.

“언제쯤 이곳으로 이사하나요?”

“예정대로라면 3년 후가 아닐까 싶다만...”

당연히 그 3년 안에 저 넓은 공터에 그럴싸한 궁궐을 짓겠다는 것이 아니다.

당장 회의실과 집무실로 사용할 건물과 뒤편에 정성국이 머물 건물을 우선하여 짓기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공터는 천천히 채우기로 했고.

“3년 후가 기대되네요!”

넓은 공터를 보고 방긋 웃는 하얀 들꽃을 본 정성국은 속으로 생각했다.

‘여기는 새김포보다 더 넓은 만큼 내 심부름을 하려면 더 고생해야 할 텐데...쯧쯧.’

* * *

“날씨가 무척이나 좋군.”

지급 전선의 함장인 정일신은 갑판 위에서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아이누 섬에서 선원들을 훈련시키며 시간을 보내던 정일신은 곧 아이누 섬에 도착한 박헌수가 투로시노를 만나고 온 후 건네준 한 장의 서류를 보고 곧장 지급 전선을 출항시켰다.

개척촌을 출발할 때 정평국에게 슬쩍 언질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이곳 아이누섬에 머문 지도 꽤 되었고 덕분에 어떻게 배를 운용해 홋카이도에 상륙하기 위해 배를 띄우는 왜놈들을 상대할지도 정해뒀으니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아이누 섬에서 출항한 지급 함선은 바람의 힘으로 남하했다.

식량이나 식수는 중간에 임시로 보급받을 수도 있겠지만 석탄은 그게 힘들었기에 최대한 아끼기로 한 정일신이었다.

그렇게 홋카이도를 따라 남하한 지급 전선은 아이누인들이 모여있고 박경수가 머무는 마쓰마에 성 인근의 해안가에 지급 전선을 잠시 정박하고 박경수를 만나 정보를 교류했다.

최근의 보고에 따르면 남쪽에서 추가로 배가 이동해 히로사키 번 전체가 부산스럽다는 보고였기에 아이누인들은 곧 있을 왜놈들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전투를 준비 중이었다.

이를 파악한 정일신은 박경수에게 건투를 기원한 후 바로 남하를 시작했다.

아직 저들이 준비 중이었다면 기습을 통해 정박 되어 있는 선박들을 박살 낼 수 있었겠지만, 상황을 보아하니 조금은 늦은 것 같았다.

그런 만큼 저들이 해협을 건너는 동안 공격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이누 섬에서 선원들을 훈련시키면서 지급 전선의 전투력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여러 상황을 상정해 계획을 짜 둔 정일신이었기에 출항명령에는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정일신도 박경수에게 왜놈들의 동태를 듣고 한 가지 의아한 점이 있었다.

박경수가 건네준 정보에 따르면 왜놈들의 배는 100척에 가깝다고 했다.

임란 직후 에도 막부는 제일 큰 크기를 자랑하는 안택선의 건조를 금지했다.

이는 지방 영주들의 무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였다.

물론 지방 영주들은 그 대안으로 안택선보다 한 체급 작은 세키부네의 크기를 키웠지만, 이는 영주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한 배였기에 많지는 않았다.

덕분에 히로사키 번에서 홋카이도로 병사들을 수송할 선박 대부분은 조운선과 비슷한 크기의 세키부네가 절반, 그보다 작은 어선이 절반에 가깝다는 보고였다.

이를 듣고 정일신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배가 적었기 때문이다.

이에 정일신은 바람을 타고 남하하는 지급 전선의 갑판 위에서 계속해서 고심했다.

예전에 계획한 대로 왜놈들의 선단 외곽을 공격해 적당한 피해를 주느냐.

아니면 지급 전선을 믿고 돌격해 최대한 큰 피해를 주느냐.

그것이 지금까지 정일신을 괴롭히는 고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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