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왜놈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라...”
“그렇습니다. 대방 어르신.”
봄바람이 솔솔 불어올 무렵 정평국은 개척촌에 있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박헌수 선장의 보고에 가볍게 인상을 찌푸렸다.
박헌수의 보고에 따르면 홋카이도 맞은편에 위치한 히로사키 번에 왜놈들의 병사들이 집결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아이누인들은 이들이 홋카이도로 넘어올 것을 대비하고 있었고.
동시에 원상에게도 이를 알렸다.
말은 안 했지만 지원해달라는 의미였다.
투로시노가 보낸 편지를 내려놓은 후 박경수가 보낸 보고서를 살펴본 정평국이 고개를 들어 박헌수 선장을 보고 입을 열었다.
“꽤 비관적인 보고인데...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정평국이 이를 묻기라도 기다렸다는 듯 냉큼 입을 여는 박헌수 선장이었다.
“저 역시 이번에는 왜놈들을 물리치기 어렵다고 봅니다.”
“그래?”
“예. 작년 쿤누이 전투에서의 승리는 저들이 방심한 탓이 컸습니다. 덕분에 손쉽게 적 기마부대와 조총병을 처리할 수 있었고 왜놈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던 정예부대가 허무하게 녹아내리자 당황했지요. 이때를 노려 아이누인들이 덤벼들었기에 손쉽게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랬지. 허면 이번은 다를 거라는 의미군.”
“그렇습니다. 저들도 이젠 방심하지 않을 겁니다. 이미 제대로 깨졌으니까요. 거기에 저들도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했을 테니 아이누인들이 화약 무기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겁니다. 거기에 병력의 수도 비슷하지요. 결국, 병력의 수는 비슷한데 무장이나 훈련상태는 왜놈들이 더 좋을 겁니다. 그나마 저들이 상륙할 시점에 공격한다면 타격을 줄 수는 있겠습니다만...”
“그게 쉬울 리는 없다는 거군?”
“그렇습니다.”
박헌수는 최대한 상황을 비관적으로 이야기했다.
정평국이 지원을 결정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박헌수 선장은 지금껏 아이누섬을 오가면서 아이누인들과 많은 친분을 쌓았고 원상이 홋카이도의 아이누인들을 지원하면서 그들과도 친분을 쌓았다.
그런 만큼 아이누인들이 왜인들에게 패해 짓밟히는 것을 원치 않았다.
물론 원상이 힘이 없었다면 외면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아니지 않은가.
배 한 척만 동원해서 저들이 홋카이도로 향할 때 적절하게 포탄만 날려줘도 충분했다.
그리고 애초에 상황에 따라 원상이 직접 개입할 예정이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던 박헌수였으니.
이에 정평국은 고민하듯 보고서를 살피면서 혼잣말을 내뱉었다.
“결국, 아이누인들을 포기할 수는 없으니 개입해야 한다는 건데...”
안정적인 항로는 무엇보다 중요했고 그렇기에 아이누인들을 지원해왔던 원상이었다.
그런 만큼 이제 와 저들을 포기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면 이왕이면 확실하게 개입해 아이누인들의 피해를 줄이는 것도 나쁠 것은 없었다.
정평국이 개입하기로 결정한 것처럼 보이자 박헌수는 혹시 누가 이야기를 엿들을까 봐 걱정이라도 되는 듯 주변을 한번 살펴보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 기회에 북미왕국의 이름으로 개입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만...”
박헌수의 말에 잠시 움찔하던 정평국은 고개를 저었다.
“자네 뜻은 알겠네만 그건 너무 성급한 것 같군.”
애초에 원상이 직접 개입하더라도 형식적으로는 원상에서 아이누섬의 아이누인들에게 선박을 매각하는 방식으로 개입할 생각이었다.
어쨌거나 원상은 조선의 상단이었기에 나중에 왜인들이 조선에 항의라도 하면 골치 아파질 수밖에 없으므로 최소한의 변명거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헌데 박헌수는 어차피 북미왕국을 세웠으니 그 이름을 내세워 개입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것이다.
어차피 아이누인들이 총기를 사용한 이상 이들의 뒤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왜놈들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원상의 이름이 밝혀지기 전에 북미왕국의 이름으로 개입하는 것이 나쁠 것은 없다 싶은 박헌수의 생각은 알겠지만 정평국은 잘못했다간 일이 더 복잡해질 거라고 판단했다.
괜히 북미왕국의 이름을 들먹이며 개입했다가 훗날 아이누인들을 도운 것이 원상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일이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정평국은 단호하게 이를 거부한 후 박헌수를 바라보고 물었다.
“박헌수 선장. 자네가 보기엔 개입한다면 얼마나 지원을 해야 할 거라 보는가?”
“이번에 개조한 지급 전선 1척이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김봉길 선장이 개척촌으로 돌아온 후 보고를 통해 스페인의 함대를 전멸시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전선의 필요성을 깨닫고 지급 함선을 전선으로 개조하리라는 것도.
이를 알게 된 박기동은 이곳에도 전선이 필요할 수 있다면서 지급 함선을 개조하길 원했다.
어차피 아이누인들을 돕기 위해 개입하려면 쓸만한 전선이 필요하기도 했던 정평국은 이를 승낙했고.
해서 시범적으로 한 척의 지급 함선이 기범선인 지급 전선으로 개조되어 아이누섬에 가 있었다.
아무래도 꽤 많은 화포를 장착한 전선이었기에 개척촌에 내버려 두기는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비록 조선 인근에서는 포문을 닫고 상선으로 위장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박헌수가 이를 언급하자 정평국은 그것으로 되겠느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한 척으로 되겠는가? 더 지원해줄 수 있네만.”
보고에 따르면 히로사키 번에 집결된 왜국의 병사 수는 1만에 가깝다고 했다.
그리고 1만이라는 병력을 홋카이도까지 수송하려면 수백 척의 배가 동원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지급 전선이 후장식 화포로 무장하고 있다고는 하나 달랑 한 척으로 무슨 타격을 주겠느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박헌수는 고개를 저었다.
만약 정평국이 북미왕국의 이름으로 개입을 선언했다면 개척촌에서 정비중인 배들을 몽땅 끌고 왜놈들을 수장시켜 홋카이도엔 접근도 못하게 막아버리겠지만 그게 아닌 이상 가장 전투력이 뛰어난 지급 전선을 적절이 운용하는 것이 나았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기는 합니다만...그럴수록 이주 선단의 규모가 줄어들 것 아닙니까. 그리고 지급 전선 한 척으로 저들을 모두 수장시키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치고 빠지면서 최대한 타격을 주겠다는 뜻이지요. 왜놈들의 배는 생각보다 약하다고 들었고 지급 전선은 60mm 후장식 화포 12문으로 무장하고 있으니 충분할 겁니다.”
박헌수 선장의 말에 정평국은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후 서류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서류를 다 작성한 후에 정평국은 이를 박헌수 선장에게 넘겨주면서 입을 열었다.
“이건 지급 함선의 매매계약서일세. 이번에 가서 투로시노의 서명을 받아오게. 이걸로 형식적으로는 원상에서 아이누인들에게 지급 함선을 판 것일세. 대가로 항구 이용권을 받고. 그 후에 저들이 전선으로 개조한 것이고. 알겠나?”
“알겠습니다. 대방 어르신.”
박헌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 후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에 그의 마음을 짐작한 듯 피식 웃은 정평국이 말을 이어나갔다.
“어차피 투로시노는 해전에 대해선 잘 모를 테니 모든 것은 지급 전선의 정일신 함장에게 일임한다고 전해주게. 충분히 포탄을 보급해줄 테니 최대한 왜놈들에게 타격을 가하라고 전해주게나.”
“알겠습니다. 그리 전하지요. 대방 어르신.”
* * *
막부의 4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쓰나의 귀에 그의 앞에 부복한 무사시 오시번의 초대 번주인 아베 다다아키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쇼군 전하.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단번에 에미시들을 쓸어버리고 에조 지역을 바치겠나이다.”
“흐음...”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는 아베 다다아키의 보고에 침음을 삼켰다.
마쓰마에 번에서 작년에 구원을 요청하는 전령이 당도한 직후에는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에미시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중과부적이라는 보고에 아베 다다아키의 조언대로 막부의 이름으로 마쓰마에 번에 인접한 번들에게 병력을 동원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이들을 지휘할 사람으로 마쓰마에 야스히로를 지목했다.
그것으로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쓰나 뿐만 아니라 아베 다다아키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고작 미개한 에미시들 아닌가.
비록 에미시들이 반란을 일으켜 그 숫자가 많다고는 하나 주변 영지에서 동원한 5천의 정예병이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고 여겼다.
특히 예전에도 에조지역에서 에미시들이 반란을 일으킨 적이 있었지만, 본토에서 보낸 병사들로 충분히 진압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북쪽의 일을 잊고 있었는데 뒤늦게 전령을 통해 전해진 소식은 무척이나 경악스러웠다.
들판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본토에서 보낸 병사들이 고작 에미시들에게 참패했다는 것이다.
본토에서 보낸 병사들 중에는 기마병도 있었고 철포병도 있었는데도 말이다.
이에 어처구니가 없어진 막부에서 상황을 파악하는 도중에 다른 전령이 소식을 보내왔다.
마쓰마에 성이 결국 에미시들에게 점령당했다고.
그리고 에조 지역에 살던 왜인들이 내쫓겼다고.
해서 혹시나 기세를 탄 에미시인들이 남하하는 것은 아닌지 잔뜩 경계했던 막부였지만 그럴 기미는 없어 보였다.
그리고 쫓겨난 왜인들을 통해 정보를 수집한 결과 저들은 왜인들을 내쫓을 때 한마디만 했다고 한다.
이곳은 자신들의 영역이니 다시는 침범하지 말라고.
즉 에조 지역을 포기하라는 뜻이었다.
이 사실이 전해지자 감히 미개한 에미시 따위가 막부와 맞먹으려 한다면서 분노했던 로주들이었으나 도쿠가와 이에쓰나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뭐 대단한 땅이라고.
이 시기 에조 지역은 쌀을 재배할 수 있는 땅이 아니었다.
홋카이도에서 쌀을 재배하는 것은 평야를 개간한 근대 이후에나 가능했던 것이고 이 시기에는 그저 쓸데없이 넓은 섬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홋카이도, 사할린, 쿠릴 열도를 모두 포함하는 에조 지역의 무역을 독점하는 마쓰마에 번이 고작 1만 석 규모였던 것이고.
만약 이들이 계속해서 남하했다면 또 모를까 자신들의 영역을 보장해달라고 주장하는 것이라 여겼던 도쿠가와 이에쓰나는 차라리 이를 승낙하는 것도 나쁠 것은 없다고 여겼다.
그는 꽤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니까.
그리고 아베 다다아키도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정보를 수집한 결과 의외로 에미시들의 힘이 만만하지 않았다.
난잡하게 덤비는 것이 아닌 진형을 이루어서 꽤 체계적으로 전투를 치렀다는 보고가 있었다.
거기에 미개한 에미시들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철포병을 양성하고 있었고.
이에 당혹해 알아본 결과 아무래도 에미시와 교역하는 서양 세력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이는 에조 지역을 다시 찾기 위해선 생각보다 많은 지출이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특히나 에조 지역과 가까운 곳에서 병력을 동원했었는데 이 병력이 사라짐에 따라 에조 지역을 정벌하려면 더 먼 곳에서 병력을 이동시켜야 한다는 것이고 이는 비용이 더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
그렇기에 도쿠가와 이에쓰나와 아베 다다아키는 이 기회에 에조 지역에 손을 떼고 싶어했지만 명분상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도쿠가와 이에쓰나의 직위는 바로 세이이타이 쇼군.
즉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이었기 때문이다.
이 정이대장군은 정이(征夷)라는 한자에서 알 수 있듯이 동쪽의 오랑캐인 에미시를 정벌하기 위해 임명된 장군이었다.
애초에 혼슈의 동쪽은 에미시들의 땅이었고 이들의 땅을 빼앗기 위해 정이대장군을 임명해 에미시들을 꾸준히 토벌했다.
지금이야 조정을 통제하는 일본의 실질적인 통치자를 의미하는 직책이 되었지만.
그런 만큼 아무런 명분 없이 자신들이 먼저 나서서 에조 지역에 손을 떼자고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그나마 에미시들이 막부에게 적당히 굽히는 척이라도 했으면 모르겠지만 이미 홋카이도에 살고 있던 왜인들을 몽땅 내쫓고 그들에게 이곳은 자신들의 영역이라고 선언했으니.
해서 어쩔 수 없이 병력을 동원해 저들을 제압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에서 막부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은 이번에 동원한 병력으로 저들을 제압하고 에조 지역을 다시 장악하는 것이고 차선은 저들의 기세를 꺾은 후 협상을 해서 명목상의 항복이라도 받아내는 것이다.
다행히 에미시들이 본토로 상륙할 낌새가 전혀 없었기에 막부는 여유를 갖고 동북지방의 번주들에게 명령해서 적당히 병력을 모았다.
그렇게 편성한 1만의 병력이 동북지방의 최북단인 히로사키 번에 집결을 완료했다는 소식에 이를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쓰나에게 보고하는 아베 다다아키였고.
둘 다 내심 탐탁지는 않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일단은 에미시들을 한번은 꺾어야 했다.
이에 도쿠가와 이에쓰나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출병을 허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