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을 탈출하라-66화 (66/850)

66화

"후우. 여전히 쌀쌀하군."

동이 틀 무렵 숙소에서 나온 로하스는 자신을 반겨주는 쌀쌀한 공기에 몸을 살짝 떨었다.

로하스는 아침 일찍 숙소에서 나올 때마다 느껴지는 쌀쌀한 공기가 낯설기도 했고 익숙하기도 했다.

그는 어른이 된 후 누에바 에스파냐에 자리를 잡았고 그곳에서 가끔 마닐라를 오갔기에 오랜만에 맛보는 이런 쌀쌀한 공기는 어느덧 낯설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의 고향은 마드리드였고 그곳에서 살 때만 하더라도 겨울엔 쌀쌀했기에 오히려 익숙하기도 했고 이 추위에 간혹 고향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렇게 로하스가 잠시 멍하니 서 있을 때 옆 숙소에서 나온 누군가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일찍 일어났군. 후엔."

"그건 대표님도 마찬가지지요. 편히 쉬셨습니까?"

"글쎄...이곳에서 편히 쉴 수야 있겠는가."

후엔의 인사말에 살짝 쓴웃음을 짓는 로하스였다.

로하스는 이곳 포로들의 대표였다.

어쨌건 간에 로하스보다 높은 직위를 가진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로하스 역시 자신의 잘못된 판단으로 선원들이 이렇게 포로가 되었다는 자책을 하고 있었기에 이에 대해 속죄하고 어떻게 해서든 협상해 포로들을 고향으로 귀환시키겠다는 생각에 대표를 자임했다.

그런 만큼 이곳에서 지내는 한 로하스가 편히 쉬기는 힘들 테고.

이를 짐작하는 후엔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돌렸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시죠. 일단 저들과 제대로 된 의사소통이 가능해져야 협상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건 결국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 아니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로하스는 고개를 끄덕인 후에 식당으로 천천히 이동하면서 후엔을 바라보고 낮은 목소리로 선원들의 분위기를 살폈다.

"아직도 저들에게 대항하려는 생각을 가진 선원들이 있나?"

"글쎄요...최소한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아무래도 다들 현실을 파악한 것처럼 보이더군요."

후엔의 답변에 로하스는 주변을 한번 둘러보고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음에도 더욱 목소리를 낮췄다.

"피엔테와 그 무리는?"

"흐음..."

후엔은 잠시 턱수염을 매만지며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자기 생각을 밝혔다.

"장담할 수는 없지만 피엔테 녀석도 어느 정도 생각을 바꾼 것 같습니다."

"생각을 바꿨다고? 왜? 오히려 그 녀석은 저들의 총기의 성능이 뛰어나니 어떻게 해서든 탈취해서 이곳을 빠져나가자고 주장했던 것 같은데?"

로하스의 말에 후엔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피엔테를 제외한 다른 선원들의 분위기를 떠올리고는 입을 열었다.

"상황이 많이 바뀌었으니까요. 예전이었다면 피엔테가 불씨를 붙이면 방관하던 선원들도 함께할 거라고 생각했겠지만...이제와서 피엔테 무리가 먼저 나서봐야 그 뒤를 선원들이 따르지 않을 거라는 것을 피엔테도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 결국, 개죽음에 가깝습니다."

"그건 그렇긴 한데..."

분명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자면 로하스와 후엔의 주장처럼 이들에게 대항하기보다는 일단 이들에게 순응하면서 언어를 배워 협상하는 것이 나았다.

하지만 피엔테와 그 무리들이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가능했다면 줄기차게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겠는가.

거기에 피엔테는 예전에 원주민 병사의 총기가 자신들의 머스킷과는 차원이 다른 성능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숫자로 밀어붙여 탈취하자고 주장했었는데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로하스가 애매모호한 표정을 짓자 후엔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이번에 물자 보급을 통해 피엔테의 생각도 좀 바뀐 것 같구요."

"음? 무슨 생각?"

"처음에야 이들 북미인을 미개한 인디언이라고 생각한 모양입니다만...이번에 저들이 제공한 도자기 때문에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아마 피엔테는 이들 북미인을 백인으로 인정한 것 같습니다. 마치 청나라 사람들처럼요."

"흠..."

이 당시 백인이라는 것은 단지 피부색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문명의 발달로 인종을 판단했고 덕분에 중국인을 백인으로 분류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중국인들은 화약을 전쟁에 사용할 정도의 문명을 가지고 있고 아직 유럽인들이 만들지 못하는 도자기를 생산할 정도의 문화를 가지고 있으니 중국인은 백인으로 분류되었다.

마찬가지로 자신들을 북미인으로 지칭하는 이들 역시 백인이라고 분류할 수 있었다.

그리고 후엔이 보기에는 피엔테가 결국 생각을 바꿔 이들을 백인으로 인정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피엔테는 꽤 극단적인 백인우월주의자였고 그들 무리 역시 비슷한 성향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자신들을 북미인이라고 지칭하는 이들을 무시했고 위대한 에스파냐의 군인인 자신들이 고작 미개한 원주민에게 포로로 잡혔다는 사실을 못마땅해했다.

비록 이들이 화약을 사용했다고는 하지만 에스파냐 선원들은 당시만 해도 이들을 잉글랜드의 피지배계층이라고 보았다.

애당초 이곳까지 배를 보낼 수 있는 세력은 에스파냐인들이 판단하기에는 잉글랜드가 유일했으니까.

그렇기에 잉글랜드를 통해 화약을 구했을 거라 생각하고 피엔테는 북미인을 백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한 달 전에 있었던 무력시위와도 같은 사냥을 통해 북미인들의 기술력을 총기를 통해 어림짐작했으면서도 오히려 미개한 인디언들이 손재주만은 좋은 것 같다면서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를 탈취해 본국으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을 정도였으니.

하지만 이번 물자 보급품목에 도자기가 포함되자 상황이 변했다.

도자기를 보고 무척 당황해하는 자신들에게 북미인들은 자신들이 사용하고 있는 목제 식기는 더럽다면서 모두 버리고 이 도자기를 사용하라고 말한 것이다.

이 말에 이곳에 선원들은 무척이나 당황했다.

에스파냐라면 귀족은 되어야 조심스럽게 사용하는 이 값비싼 도자기를 고작 포로들에게 보급해줄 정도라니.

물론 귀족들이 사용하는 도자기보다 품질이나 모양은 단순했지만 어쨌건 도자기였다.

그리고 이 도자기로 만든 식기를 사용하면서 선원들은 의문을 품었다.

과연 이 북미인들이 고작 잉글랜드의 지배를 받는 황인일까.

아니면 문명을 지닌 백인일까.

대부분 선원들이 북미인들을 백인으로 내심 인정하고 있는 와중에도 고집스럽게 이를 인정하지 않던 피엔테와 그 무리들도 결국은 북미인을 자신들과 같은 백인으로 인정했다고 보았다.

이를 언급하는 후엔의 말에 로하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들은 백인이지. 마스트 없이 움직이는 배며 머스킷과는 비교할 수 없는 성능을 지닌 총기에 도자기까지.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이들과 협상을 해야 해. 이들의 나라 이름이 북미왕국이라고 했던가?"

"예. 그랬죠."

"부디 우리가 저들의 말을 습득하기 전에 에스파냐와 별다른 충돌이 없어야 할 텐데..."

로하스가 근심하는 것을 보면서 후엔이 고개를 저었다.

"뭐 이런 문명을 지닌 국가가 갑자기 생겨났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헌데도 우리는 지금껏 모르고 있었죠. 이를 생각하면..."

후엔의 말에 로하스는 피식 웃으면서 그의 말을 끊었다.

"그렇긴 하지만 우리의 경우가 있지 않나. 생각해보면 운이 없었던 것 같기는 하지만."

"끙...그러고보면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령에선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파악했겠죠?"

이에 로하스도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후우. 그렇겠지. 12월이 넘었으니."

"어떻게 반응할까요?"

"글쎄?"

* * *

누에바 에스파냐의 수도인 멕시코시티의 총독부 대전에 현 누에바 에스파냐의 부왕인 후안 프란시스코 데 레이바가 대전으로 들어서는 한 사내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부왕전하. 부르셨습니까?"

"왔는가. 아직도 아카풀코에선 연락이 없는가?"

"그렇습니다."

사내의 답변에 후안은 안색을 찌푸리며 콧수염을 매만지다 입을 열었다.

"흐음...아직까지 선단이 도착하지 않은 것을 볼 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지?"

"아무래도..."

사내는 고개를 숙이며 말을 흐렸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이 확실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지금까지 마닐라에서 출항한 교역품을 가득 실은 선단이 아직도 아카풀코에 도착하지 못할 까닭이 없었다.

"필리핀해 인근에서 문제가 생겼다면 필리핀 총독령에서 모르진 않았을 거야. 그리고 바로 예비 함대를 출항시켰겠지. 헌데 지금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태평양을 횡단하다 문제가 발생했을 수도 있고...아니면 신대륙에 도착해 남하하다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 그러니 누에바 에스파냐령의 모든 항구에 입항하는 타국의 선박을 조사하라고 하게. 특히 전투를 벌인 흔적이 있는 선박들을."

만약 태평양을 횡단하다가 문제가 생겼다면 모를까 신대륙에 도착한 후 남하하다 문제가 생겼다면 결국 해적의 소행이라는 뜻이었다.

보통 이러한 경우는 해적의 소행인 경우가 많았다.

호위함까지 대동하고 이동하는 선단이 고작 해적에게 당했다고는 믿고 싶지 않은 후안이었으나 이미 상황이 벌어졌으니 만약을 대비해 명령을 내렸다.

이에 사내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부왕전하."

하지만 이 명령을 내린 후안도, 사내도 이를 통해 해적선을 찾아 교역품을 회수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교역을 하면서 이런 경우가 간혹 있었지만 교역품을 회수한 적은 없었으니까.

그리고 분명 1년에 한차례 오고가는 교역선이 도착하지 않은 것은 분명 불행한 일이다.

하지만 이 다음 항해를 성공시킨다면 어느정도 손해를 메꿀 수 있었다.

그렇기에 후안은 곧장 사내에게 다른 명령을 내렸다.

"일단은 예비 함대를 곧바로 마닐라로 출항시키게. 그리고 이건 필리핀 총독에게 보내는 서한일세. 꼭 전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부왕전하."

* * *

정성국은 얼굴을 때리는 쌀쌀한 바닷바람을 견디면서 저 멀리 보이는 기범선을 바라보았다.

모든 돛을 접었음에도 유유히 바다를 가르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신기해 보였다.

기선이라면 애초에 돛이 없을 테니 상관없겠지만 돛이 있음에도 돛을 접고 증기기관으로만 움직이니 말이다.

정성국은 뒤편의 연구청장에게 물었다.

"지금 저렇게 증기기관으로만 항해하면 속도가 얼마나 나오지?"

"평균 4노트 수준입니다. 전하."

"4노트라...느리긴 하군."

"송구하옵니다. 전하."

연구청장의 대답에 살짝 투덜거리는 정성국이었다.

이는 어쩔 수 없긴 했다.

박기동이 시험 삼아 건조한 400마력의 기선은 500톤급인 인급 함선을 베이스로 선체 모양까지 살짝 변경해 만들었기에 10노트가 넘는 속도가 나왔지만 저기 보이는 기범선은 상황이 달랐다.

애초에 1천 톤급의 지급 함선에 400마력의 증기기관을 장착한 셈이었으니 아무래도 속도가 확 떨어질 수밖에.

그나마 기범선인 만큼 돛을 사용한다면 속도를 늘릴 수 있다는 점이 다행이랄까.

"허면 돛을 모두 펼친다면?"

"바람과 해류가 도와준다면 10노트도 무난하게 나왔습니다."

"그래? 그건 다행이군."

정성국을 슬쩍 미소를 지으면서도 속으로는 잠시 고민했다.

'이래서야 지급 함선을 기범선으로 개조해도 북방 항로를 이용하기엔 효율이 떨어질 것 같긴 한데...뭐 어쩔 수 없나? 꾸준하게 증기기관을 개량하는 것은 결국 시간이 필요하니...그리고 당장 써먹기엔 그럭저럭 괜찮아 보이고.'

그렇게 생각한 정성국이 연구청장에게 명령했다.

"그럼 남은 지급 함선 한 척도 기범선으로 개조하도록 하게. 얼마나 걸리겠는가?"

"한 달 안으로 개조 작업을 끝내겠습니다."

"그래? 기대하도록 하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