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목책 바깥쪽에 있는 망루의 시선을 피하기라도 하듯 야영지의 구석에서 갈색 머리의 젊은 사내와 커다란 덩치를 자랑하는 순박해 보이는 사내가 목소리를 낮추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봐. 피엔테. 정말 할 거야?"
"그래."
단호한 어조로 대답하는 피엔테를 보고 커다란 덩치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저번의 회의에서 일단은 상황을 파악하자고 결정했잖아? 그리고 그 당시 선원들의 분위기도 일리가 있다는 반응이었고."
이틀 전 밤늦게 그나마 영향력이 있는 선원들이 모인 회의에서의 결정을 언급하자 피엔테는 그때의 일을 떠올리고 화가 난 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 풀며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긴 하지. 하지만 우리가 일을 벌여도 가만히 두고 볼까? 우리가 먼저 나서서 저들을 공격한다면 다른 선원들도 어쩔 수 없이 우리를 도와 저들을 공격할 거야. 이미 일이 벌어진 후니까 말이야."
"하지만...그러기까지 너무 위험하지 않아? 우리를 도와 함께 움직일 친구들은 기껏해야 20명 내외잖아."
"흥. 그 정도면 불씨를 피우기엔 충분해. 그리고 우린 에스파냐의 군인이야. 고작 원주민 따위 몽둥이만으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끄응..."
피엔테의 말도 일리는 있지만, 그 과정에서 살아남은 선원들이 피해를 볼 수도 있었다.
비록 저들이 허술한 무장을 하고 있다고 한들 저들 역시 어느 정도 훈련을 받은 병사로 보였으니까.
그렇기에 다들 일단은 두고 보자고 결정했던 것이고.
그러나 피엔테는 어차피 원주민일 뿐이라며 일축했고 그런 피엔테의 반응에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는 커다란 덩치의 귀에 피엔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몰라. 내가 보기엔 영 이상해. 매일 물자를 보급해주던 배도 이틀간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전처럼 형식적으로 씻기는 게 아니라 비누까지 줘가면서 꼼꼼하게 씻기고 있다고! 왠지 불안해..."
이 시기 지중해 연안 국가에서는 올리브유와 해초를 태운 재를 사용해 비누를 만들어 사용했기에 비누의 존재를 모르지는 않았던 스페인 선원들이었다.
다만 옷을 세탁할 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몸에 직접 비누를 사용해 씻겼기에 꺼림칙해 했고.
이들은 더러운 때가 병균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줄 하나의 보호막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으니 말이다.
헌데 원주민 병사들의 명령에 따라 비누를 사용해 구석구석 씻다 보니 몸에 달라 붙어있는 더러운 때가 모두 사라질 수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불안해하는 선원들이 꽤 있었다.
피엔테도 그중에 한 명이었고.
"후우. 알았어. 피엔테. 우리를 도울 친구들에게 미리 말해둘게. 그럼 어?"
"음?"
그때 한 선원이 달려와 이야기를 잠시 중단되었고 그 선원은 달려가면서 그들을 보고 소리쳤다.
"거기서 뭐 해! 나와봐! 저기 신기한 배가 있어! 좋은 구경거리가 될걸?"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다른 선원들에게 알리기 위해 달려가는 선원이었고 영문을 모르는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구석에서 나와 임시로 만든 선착장으로 걸어갔다.
야영지를 세운 이후론 거의 방치되어 지루한 것은 사실이고 선원이 말한 신기한 배가 대체 뭔지 궁금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선착장 방향으로 걸어간 둘의 눈에 곧 선착장으로 다가오는 한 척의 배가 보였다.
지금까지 물자를 옮겨주던 어선에 가까운 조그마한 배와는 달리 100톤은 되어 보이는 선박이었다.
이를 보고 둘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선박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당연했다.
그들의 상식으론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저건...뭐지?"
저 정도의 선박이 움직이려면 동력원이 필요했다.
그게 풍력이든 인력이든.
허나 저 배는 마스트도, 노도 없이 유유히 물길을 가르고 선착장으로 다가왔다.
이에 내심 원주민들을 만만하게 생각하던 피엔테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건 대체 어떻게 움직이는 거지? 마법인가?"
* * *
섬에 격리되어 있던 포로들이 경비대원의 통제에 따라 100톤급 기선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다만 한 번에 모든 포로가 기선에 올라탄 것은 아니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일단 절반의 인원이 기선에 탑승했고 이를 감시하기 위해 새김포에서 미리 탑승한 50명의 경비대원이 기선 곳곳에서 날카로운 눈빛으로 포로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포로들의 절반만 태우고 기선을 출발시키자 기선에 이미 올라탄 선원들도, 섬에 남는 선원들도 반발하는 분위기가 역력했지만 이미 무언가 행동을 하기에는 늦었다고 판단한 선원들이 일단 지켜보자면서 선원들을 달랬다.
그렇게 포로들이 두 차례에 걸쳐 기선을 타고 이동해 도착한 곳은 바로 새마포 남쪽에 있는 조그마한 선착장이었다.
처음 이곳에서 내린 포로들은 선착장과 그 뒤쪽의 마을을 보고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곧 경비대원들이 건네준 밧줄로 인해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하지만 자신들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는 다른 경비대원들이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경비대원들이 건네준 밧줄로 자신들의 팔을 적당히 묶고 경비대원을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선착장에서 길을 따라 한참을 남하해 도착한 장소는 산기슭에 위치한 목책으로 둘러싸인 꽤 커다란 공터였다.
* * *
"샤스타 족이 합류 의사를 밝혔다고?"
"그렇습니다. 전하."
"고생했네. 외무청장."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노고를 위로하면서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이것으로 캘리포니아의 금광지대는 모두 손에 넣은 셈이군. 뭐 당장 캘 마음은 없지만, 금광지대를 소유하고 있으니 든든한걸?'
초기에 합류했던 마이두 족과 우티 족으로 인해 시에라 네바다에 묻혀있던 캘리포니아 금맥은 자연스럽게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외무청의 꾸준한 노력으로 인해 캘리포니아 북쪽에 인접한 샤스타 족이 합류하게 되었고 덕분에 캘리포니아 북부에 묻혀있는 금맥도 확보하게 되었다.
당장 이 금들을 채취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정성국이 기억하기로는 캘리포니아 골드러시 당시 금이 발견되고 난 후 5년간 캐낸 금의 양이 약 370톤에 가까웠다고 하니 아무래도 든든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들의 거취는 어쩔 셈인가?"
"이들의 영역은 농사짓기에 적합한 곳이 아닌 만큼 이주를 권할 생각입니다. 특히 인력이 부족한 철광과 탄광 근처의 마을쪽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행정청장의 답변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눈앞의 서류를 살펴보다 의외라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생각보다 철 생산량이 꽤 늘었군?"
"예. 계속해서 광부의 수를 늘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에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생각이 난 듯 군사청장을 바라보는 정성국이었다.
"아. 그러고 보면 포로들은 잘 지내고 있나?"
"그렇습니다. 전하. 처음에는 조금 반항적이긴 했습니다만...자신들이 캐는 석탄의 양에 맞추어 그들이 받는 물자의 양이 달라진다는 것을 깨닫게 된 후에는 묵묵하게 일을 하더군요."
군사청장의 말에 정성국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다행이긴 한데...반발하지 않고 묵묵히 일한 다라...그건 좀 의외인데?"
그러자 군사청장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마 갑오 소총 때문일 겁니다."
"응? 그게 무슨 소린가? 그들이 반항하거나 도망쳤다는 보고는 못 들은 것 같은데?"
정성국이 혹시 보고를 누락했느냐는 표정을 지으며 군사청장을 바라보자 화들짝 놀라 손을 저었다.
"그건 아니고...한창 분위기가 흉흉할 무렵 무력시위를 좀 한 모양입니다."
"무력시위?"
"예. 망루에 있던 병사가 갑오 소총을 사용해서 사슴을 사냥했다고 합니다. 그것도 여러 마리를. 그 후 사슴을 해체해 포로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군사청장의 대답에 정성국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포로들이 보는 앞에서?"
"예. 그 이후로는 잠잠해졌답니다."
"허."
그제야 포로들이 잠잠한 이유가 짐작이 간 정성국이었다.
머스킷과는 달리 화승 없이 방아쇠만 당기면 나가는 것을 보고 기겁했겠지.
거기에 재장전도 빠른 만큼 함부로 덤비기엔 어려웠을 것이다.
이에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한 정성국이었다.
괜히 저들이 병사들을 만만하게 보고 덤비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그나저나 동물을 사냥해 포로들의 기를 꺾다니...누군지 몰라도 나중에 포상이라도 해야겠구만.'
그런 생각을 하며 정성국은 군사청장을 보고 말했다.
"그건 그렇고 혹시 아직도 포로들과의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나?"
"일단 최소한의 의사소통은 가능합니다. 전하."
"그래?"
정성국이 반색하자 군사청장은 그의 기대가 부담스러운지 잽싸게 말을 덧붙였다.
"그렇습니다. 전하. 해서 저들의 대표에게 이런저런 것을 묻고 있긴 합니다만...아직은 깊은 이야기를 할 수준은 아닙니다. 다만 저들도 할 말이 있는지 우리의 언어를 배우고 싶어하고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인지라 시간이 흐르면 제대로 된 의사소통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런가. 알겠네."
생각해보면 그들을 붙잡은 지 겨우 4개월째였다.
고작 4개월 만에 원활한 의사소통이 가능할 거로 생각하진 않았기에 마음을 가라앉힌 정성국은 연구청장을 보고 입을 열었다.
"배의 개조가 모두 끝났다면서?"
"그렇습니다. 일단 한 척의 개조는 마무리한 상황이고 시범 항해의 결과에 따라 남은 한 척의 개조도 진행할 생각입니다."
"다행이군. 헌데 생각보다 많이 늦었군?"
정성국의 문책에 연구청장은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전하. 동시에 건조하던 기선들 때문에 인력을 집중할 수 없다 보니 많이 늦어졌습니다. 다만 이번 시범 항해의 결과가 만족스럽게 나온다면 남은 한 척의 개조는 인력을 집중해 최대한 빠르게 진행하겠습니다."
지급 함선의 개조는 꽤 즉흥적으로 결정이 된 사항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는 연구청장의 변명이었다.
말이나 소의 숫자가 충분하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아무래도 물자를 대량운송하는 데는 배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언제까지 탐사대에 소속된 배를 수송선으로 써먹을 수는 없었기에 여러 척의 기선을 건조하라는 지시를 내렸는데 이 때문에 지급 함선의 개조가 늦어졌다는 소리였다.
결국은 연구청에 소속된 장인과 숙련된 일꾼의 수가 부족해서 생긴 문제였기에 한숨을 내쉰 정성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알겠네. 하지만 계속해서 많은 배를 건조해야 하는 만큼 인력 충원에 힘써주길 바라네."
"알겠습니다. 전하."
정성국은 고개를 돌려 다시 군사청장을 바라보았다.
전선이 생겼으니 이를 운용할 해군의 훈련 상황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전선에 태울 병사들의 훈련은 어찌 되었는가?"
"아직 진행 중입니다. 전하."
서류상으로만 존재했던 해군 훈련대였다.
다만 갑작스럽게 지급 함선을 이곳에 두기로 결정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당장 범선인 지급 함선을 써먹을 일도 없었고 한 척은 개조 중이었기에 지급 함선을 운용하기 위해 남았던 경험 많은 선원들이 시간적 여유를 갖게 되었다.
이에 이들을 해군 훈련대로 소속시켜 교관으로 삼아 해군을 모집해 병사들을 훈련시키기 시작했다.
동시에 해군 훈련소를 건설하기 시작했고.
"그래? 허면 이번 시범 운항은 어쩔 생각인가?"
이에 군사청장이 이미 다 계획을 세워놨다며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이번 전선의 시범 운항은 해군 훈련대에 소속된 교관과 병사들이 나설 생각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하."
"그래? 알겠네. 그럼 다음은..."
그렇게 밤늦게까지 회의가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