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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64화 (64/850)

64화

가느다란 초승달이 어렴풋이 어둠을 밝혀줄 무렵.

적막이 가득해야 할 야영지 한구석이 미묘하게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할 때 로하스가 낮은 어조로 나지막하니 외쳤다.

"조용! 한 명씩 이야기하도록 하게. 아무리 저들이 우리에게 별다른 신경을 쓰지는 않는다 해도 분위기라는 게 있지 않나."

"크흠."

"험험."

로하스의 말에 근처에서 열을 내던 몇몇 선원들이 진정하기 시작했다.

적당히 분위기를 가라앉혔다고 생각한 로하스가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던 젊은 사내를 보았다.

"그래. 자네는 저들을 공격하자는 말인가?"

갈색 머리의 젊은 사내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주위의 선원들을 훑어보며 나지막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렇습니다. 선장님. 언제까지 이곳에서 시간을 보낼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그리고 언제까지 저들이 이렇게 우리를 내버려 둘 거라는 확신도 없고요. 만약 저들이 생각을 바꿔 우리를 노예로 삼으면 어쩔 셈입니까. 아니. 이곳의 원주민 중에는 식인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를 제물로 삼으면 어쩔 생각입니까!"

그러자 조금 전 이 갈색 머리의 사내와 언쟁을 하던 반대편의 금발 머리의 중년 사내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건 너무 심한 비약이라고 보네. 최소한 제물로 삼을 작정이었다면 우리를 치료하기 위해 애쓸 이유가 없지 않나."

이에 교전 당시 가벼운 상처를 입었지만, 원주민 의사들의 도움으로 치료받았던 선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파악한 갈색 머리의 젊은 사내가 주먹을 불끈 쥐면서 낮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거야 모르는 일입니다. 제물로 삼기 위해 치료했을 수도 있어요! 그리고 우리를 잡아먹을 생각이 아니라면 왜 저렇게 우리를 매일 씻기는 데 열중하겠습니까?“

"글쎄...자네 말처럼 저들이 우리를 제물로 생각했다면 다친 친구들부터 제물로 사용했겠지. 그리고 우리뿐만 아니라 저들도 매일 씻는 것을 볼 때 저들의 풍습이라고 보네. 그리고 저들은 심하게 다친 선원들이 죽자 그들의 시체도 훼손하지 않고 관을 만들 수 있게 돕지 않았나. 정말 저들이 식인종이라면 시체를 가져갔겠지."

"으음..."

금발 머리의 중년 사내의 말에 주위의 선원들이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이 자신들을 식량이나 제물로 생각했다면 죽은 자들을 묻어주기 위해 도울 이유가 없었다.

특히나 저들의 도움을 받아 야영지와 조금 떨어진 곳에 묘역을 만들 수 있었으니.

말이 통하진 않았지만, 그 점은 고마워하는 선원들이 꽤 있었다.

조금은 부드러워진 분위기를 느낀 갈색 머리의 젊은 사내는 이러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주제를 돌렸다.

"하지만 지금이 기회라는 건 부정하지 못할 겁니다. 우리를 감시하는 무리는 무척이나 허술합니다만 언제까지 이렇게 허술할 거라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저들의 방비가 강화되기 전에 저들을 공격해서 머스킷을 탈취하고 이를 통해 배를 빼앗아 달아나야 합니다! 이곳이 캘리포니아 섬이라는 것은 확실하니 해안선을 따라 쭉 남하하기만 하면 누에바 에스파냐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이곳에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멍하니 시간을 축내야만 했던 선원들 가운데 몇몇은 이 말에 반응을 보였다.

그들이 보기에도 자신들을 감시하는 원주민 병사들이 만만해 보였기에 이곳에서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낼 바엔 탈출을 감행하는 것도 나쁠 것은 없다는 생각이었다.

이런 분위기가 선원들에게 퍼질까 두려웠던 금발 머리의 중년 사내가 과장되게 어이없다는 제스쳐를 취했다.

"머스킷으로 무장하고 있는데 허술하다니 제정신인가?"

이에 오히려 기회라는 표정으로 재빠르게 조잘거리는 갈색 머리의 젊은 사내였다.

"갑옷도 입지 않았고 근접전에 사용할만한 무기라곤 단검뿐입니다. 거기에 머스킷은 장전하는 데만 해도 시간이 꽤 걸리지 않습니까. 저들이 발사하기 전에 달려든다면 승산은 충분합니다!"

그 말이 끝나자 주위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선원들의 분위기도 슬쩍 변하기 시작했다.

이를 느낀 갈색 머리의 젊은 사내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을 때 금발 머리의 중년 사내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젊은 사내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쯧쯧. 물론 나도 우리를 감시하고 있는 무리와 싸워 이기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하네. 하지만 그다음은 어찌할 건가. 배를 탈취한다? 무슨 배를? 설마 이곳에 물자를 운반하는 작은 배를 말하는 것은 아닐 테지?"

그 말에 갈색 머리의 사내가 슬쩍 열을 내며 강 안쪽을 가리키며 낮게 소리쳤다.

"저 안쪽에 분명 저들의 항구가 있을 테고 그곳에 갤리온 2척이 남아있을 거라는 계산도 못 하십니까!"

하지만 금발 머리의 중년 사내는 과장되게 고개를 흔든 후 주위 사람들을 한번 훑어보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즉 이곳에서 우리를 감시하는 무리와 싸워서 이기고, 그다음 작은 배를 탈취하고, 탈취한 작은 배를 타고 강 안쪽 어딘가에 있을 갤리온을 탈취한다? 그게 승산이 있다고 보는 건가?"

당장 이곳에서 자신들을 감시하는 원주민 병사와 싸우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 이후가 문제라는 금발 머리의 중년 사내의 말에 젊은 사내는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주위의 선원들도 그건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이를 느낀 금발 머리의 중년 사내는 쐐기를 박았다.

"거기에 물자를 운반하는 배에 몇 명이나 타겠나? 기껏해야 2, 30명이 한계일 텐데 고작 그 숫자로 갤리온을 탈취한 후 이곳까지 갤리온을 몰고 온 다라...그게 가능하겠나? 그게 승산이 있다고? 오히려 그건 목숨을 건 도박에 가깝지."

이 말이 끝나자 그동안 조용히 언쟁하는 저 둘을 바라보며 귀를 기울이고 있던 주위의 선원들 대부분이 고개를 끄덕이며 당장 공격하는 것은 무리라는 분위기가 퍼져나갔다.

이에 갈색 머리의 젊은 사내는 마지막으로 발악하듯 낮게 소리쳤다.

"이익! 그렇다고 그냥 손 놓고 있겠단 뜻입니까? 이대로 저 미개인들의 노예로 살아가자는 겁니까?!"

"글쎄...저들을 미개인이라고 부르긴 좀 과한 것 같은데...그건 당장 중요한 게 아니니 넘어가고. 일단 저들과 협상을 하고 싶어도 말이 통하질 않는 만큼 좀 길게 보고 조심스럽게 행동했으면 좋겠단 거네. 만약 섣불리 움직였다가 실패해서 아예 처형당하거나 감옥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나아 보이니 말이지."

몇몇 불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짓는 젊은 선원들을 제외한 대부분 선원들이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이를 느낀 로하스가 결론을 내렸다.

"자자. 이것으로 대충 결정은 난 것 같군. 당분간은 좀 두고 보는 방향으로. 물론 이 결정에 불만족스러운 사람들도 있겠지만 앞서 이야기했던 대로 결정이 난 상황이니 따라주길 바라네. 알겠나?"

로하스는 갈색 머리의 젊은 사내와 그 주변의 선원들을 바라보았고 그는 입술을 깨물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선장님."

"그래. 자. 그럼 이제 슬슬 자자고."

* * *

평소라면 포로들이 조용히 잘 시각인 깊은 밤.

그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보고에 조용히 망루 위에서 포로들을 살피던 조장은 곧 포로들이 하나둘 흩어지기 시작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의 뒤편에 서 있던 병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제야 회의가 끝난 모양이네요."

확실히 포로들 간에 편이 갈려 언쟁한 것처럼 보였으니 회의가 맞으리라 생각한 조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일세. 저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무슨 일로 이렇게 늦은 밤중에 조심스럽게 모여서 회의를 한 것인지 모르겠군. 그나마 분위기가 흉흉하지는 않은 것처럼 보이지?"

"예. 조장님."

조장은 잠시 망루 위에서 아래쪽의 야영지의 분위기를 살펴보았지만 방금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 고요했다.

'혹시 저들이 오판해서 덤비면 어쩌나 싶었는데...당장은 덤빌 것 같지는 않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조장은 병사에게 당부했다.

"자네도 알겠지만, 곧 저들은 새마포 맞은편의 탄광으로 이동할 거야. 그 전에 문제가 생기면 피곤해지는 만큼 당분간은 경계를 철저히 하도록 하게. 알겠나?"

"예. 조장님."

자신 있게 대답하는 경비대원을 보고 희미하게 웃은 조장은 곧 망루를 내려가 다른 경비대원들에게도 경계를 철저히 하라고 당부하며 돌아다녔다.

* * *

로하스가 지내는 천막에는 평소와는 달리 한 명이 더 들어와 있었다.

그는 조금 전 갈색 머리의 젊은 사내와 언쟁한 금발 머리의 중년 사내였다.

"수고했네. 후엔."

후엔이라고 불린 금발 머리의 중년 사내는 로하스의 말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선장님. 선장님의 부탁이 아니었어도 분위기를 바꿀 필요가 있긴 했어요. 당장 저들을 공격해 이곳을 벗어나기엔 위험도 너무 많고...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들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로하스는 당장 이곳을 탈출하는 것보다는 저들의 정체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직접 나서서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비록 그가 포로들 가운데 직위가 제일 높다고는 하지만 이미 그는 한번 오판을 하기도 했었고.

선원들의 분위기도 저들을 공격하고 탈출하자는 쪽이 조금이나마 우세했었으니.

이는 어제 자신들을 공격했던 함대가 태평양으로 빠져나간 후 저 안쪽에 갤리온이 남아있다는 사실이 선원들에게 퍼져나가 탈출할 방도가 생겼다는 분위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원주민 의사에게 치료를 받고 그들에게 호의적이며 다른 호위함의 부선장이라 선원들에게 나름대로 영향력이 있었던 후엔에게 부탁했었다.

판을 깔아줄 테니 분위기를 좀 바꿔 달라고.

그리고 후엔 역시 로하스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기꺼이 그 부탁을 들어주었고.

"나도 그렇게 생각을 하네만..."

말을 흐리며 확신이 없다는 듯 안색이 어두워진 로하스를 보고 후엔이 조심스럽게 그를 위로했다.

"선장님의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후우...모르겠네. 내가 잘못 생각해서 사자의 입에 머리를 들이댄 꼴이 되었으니..."

후엔은 쓴웃음을 지으며 당시 로하스의 판단이 나쁘지는 않았다고 평가했다.

"갑자기 강 안쪽에서 튀어나왔으니 해적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렇다고 제대로 된 국기가 걸려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그리고 선장님의 판단은 나쁘지 않았다고 봅니다. 저들이 정말로 해적이었다면 선장님의 예측대로 호위함으로 길을 열고 함대를 돌파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래. 저들이 정말로 해적이었다면 말이지. 자네도 저들이 해적이라고 생각하진 않는군?"

로하스가 후엔을 보고 그의 생각을 묻자 후엔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해적이었다면 어디에 교역품이 실려있을지도 모르는데 가차 없이 포를 쏘진 않겠지요. 어쩌면 저들은 오히려 우리를 해적이라고 생각하고 대응을 한 것 같습니다."

"역시 그런가..."

어떻게 보면 자신이 저들을 해적이라고 판단한 것 자체가 실수였다는 소리였기에 다시 안색이 어두워진 로하스였다.

북미왕국이 내심 스페인을 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로하스였기에 만약 그들을 보고 속도를 줄이거나 항로를 바꿨다면 저들도 자신들을 공격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로하스를 보고 후엔은 계속 위로해봐야 그에게 와닿지는 않으리라 판단해 주제를 돌렸다.

"선장님. 일단은 언쟁을 통해 분위기를 바꿨습니다만...저들이 계속 우리를 이곳에 격리한다면 선원들은 탈출하려 들 것입니다."

"나도 알고 있네. 그러니 최대한 빨리 저들의 언어를 습득해 최소한의 의사소통이 가능해져야 하네. 무언가 말이 통해야 협상을 할 수 있을 테니."

로하스는 불확실한 탈출보다는 안전하게 협상을 통해 이곳을 벗어나고자 했다.

자신들이 해적이 아님을 밝히고 자신들이 군인이라는 것과 오해를 해서 우발적으로 교전이 벌어졌다는 것, 그리고 포로임을 인정하는 대신 협상을 통해 대가를 지불해서 고국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더 가능성 있다고 본 것이다.

후엔 역시 그 의견에 동의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선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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