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개척촌으로 출항하려다 스페인의 선박과 마주쳐 어쩔 수 없이 교전한 후 새김포로 돌아와 정비를 시작했던 이주 선단은 며칠 후 다시 출항했다.
다른 때와는 달리 하와이 제도에서도 원주민과 교섭해야 하는 만큼 더 늦어지면 곤란했기 때문이다.
지급 함선 2척이 이곳에 남아있기로 되어있는 만큼 이곳에 남아 지급 함선을 운용할 선원들을 정하고 남은 선원들의 재배치가 끝나자마자 곧장 닻을 올렸다.
정성국은 내해를 유유히 가로질러 해협 방향으로 이동하는 이주 선단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고 있을 때 호위대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하. 슬슬 돌아가지 않으시면 회의시간에 늦을 것 같습니다."
"아. 벌써 그런가? 알겠네. 바로 돌아가도록 하지."
* * *
선착장에서 군사청으로 돌아온 정성국은 바로 집무실 옆 회의실에 들어갔다.
회의실에는 여러 청장이 대기하고 있다가 정성국이 들어서자 일제히 일어났고 정성국은 회의실 안쪽으로 들어가며 청장들에게 앉으라는 듯 손짓했다.
그러나 청장들은 정성국이 자리에 앉고 나서야 하나둘 앉기 시작했다.
이를 보며 살짝 고개를 흔든 정성국은 바로 회의를 시작했다.
"바로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지. 군사청장. 현재 섬에 격리된 포로들의 숫자는 정확히 얼마나 되나?"
"총 145명입니다. 전하."
정성국의 물음에 군사청장이 대답했고 이에 정성국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이번 교전으로 포로가 된 스페인 선원은 172명으로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부상이 심한 자들이 많았나 보군?"
이에 군사청장이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들을 치료하기 위해 의원들이 노력했습니다만 부상이 심한 선원들이 끝내 견디지 못하고 사망한 탓에..."
이번 교전은 생각보다 짧은 시간 동안의 교전이었지만 생각보다 스페인 선원의 피해가 컸다.
이는 근거리에서 포격을 가했었기에 생각보다 명중탄이 많이 나왔고 작렬탄을 사용한 덕분에 스페인 선원들이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함선이 박살이 나 포갑판에 머물던 선원들이 그 자리에서 몰살당한 탓이 컸다.
그렇기에 정성국이 마음을 바꾸어 선원들을 구조하라고 명령했어도 당시에 172명밖에 구조하지 못했다.
저 172명이라는 숫자가 많은 것 같지만 로하스가 탄 호위함 한 척의 선원 수만 하더라도 200명에 가까웠기에 3척 모두 침몰한 것을 생각해보면 생존자 수가 많은 편은 아니었다.
아직 포로와의 의사소통이 어려운 탓에 저들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이 시기 갤리온 한 척에 탑승하는 선원 수를 대충이나마 짐작하고 있던 정성국이었기에, 생각보다 많은 선원이 죽었다는 것을 짐작했다.
그런 만큼 현재 섬에 격리된 포로들의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해 군사청장에게 물었다.
"허면 현재 포로들의 분위기는 어떠한가?"
"좀 침울한 편인 것 같습니다. 전하."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군사청장에게 정성국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부상자가 죽은 것 때문에 공격적이지는 않고?"
"예. 결국, 죽은 포로들은 모두 크게 다쳤다는 것을 저들도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그냥 방치한 것도 아니고 그들을 치료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을 다른 포로들도 알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의원들에겐 정중한 모습을 보였다더군요."
처음에는 간단하게 선의에게 치료를 명했던 정성국이었으나 생각보다 부상이 심한 포로들이 많다는 보고에 김순호를 비롯한 여러 의원을 보내 치료를 명했던 정성국이었다.
이는 인간으로 해야 할 도리이기도 했지만, 의원들의 경험을 늘릴 기회였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었다.
다만 덕분에 포로들의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는 말에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은 정성국이 주제를 살짝 변경했다.
"그래? 그건 다행이군. 지금 섬에서 포로들을 관리하는 경비대원이 몇이나 되지?"
"50명입니다. 전하."
현재 무인도에 들어가 있는 경비대원의 수가 50명이라는 뜻이었고 이들이 계속 그곳에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교대 인원까지 생각하면 포로를 관리하는데 무려 100명의 경비대원이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이에 정성국은 속으로 혀를 찼다.
'쯧쯧. 당장 우리 북미왕국의 총 병력이 고작 600명인데 그중 1/6을 포로 관리에 투입해야 한다니...나중을 생각해서 선원들을 구조하고 포로로 만든 건데 당장은 타격이 크구만.'
정성국이 그런 생각을 하며 고민하고 있을 때 군사청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하. 현재 포로를 관리하는데 들어가는 인원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계속 이대로 포로들을 관리하실 생각입니까?"
"당분간은 그럴 생각이네만."
정성국의 답변에 행정청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들은 이주 선단을 공격한 죄인들입니다. 헌데 격리한다는 명목으로 저들을 아무런 일도 시키지 않고 식량을 제공해주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생각합니다. 전하."
"그러면?"
"혹시 저들을 탄광으로 보내는 것은 어떻습니까?"
"흐음...탄광이라."
정성국은 행정청장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포로들을 먹여 살릴 수는 없으니 최소한의 일을 시키라는 뜻이니까.
'하긴...생각해보면 꽤 오랜 시간 저들을 돌려보낼 생각이 없는 만큼 그냥 먹여 살릴 수는 없지. 난 천천히 저들을 회유해서 몇몇을 제외하면 선원으로 써먹을 생각이었는데...광부로 만드는 것도 나쁘진 않네.'
정성국은 결정을 내린 후 개발청장을 바라보았다.
"이보게. 개발청장. 기존의 탄광 근처에 새로운 갱도를 만들만한 곳이 있나?"
"기존에 만든 갱도에 들여보내지 않으실 생각입니까?"
"아아. 그러면 관리가 더 어렵지 않나. 차라리 새로운 갱도를 하나 만들고 그 갱도 바깥쪽에 바로 포로들이 거주할 조그마한 마을을 만드는 게 나을 것 같네. 대신 이 마을 주위에 목책을 둘러 이들을 감시하고."
괜히 기존의 탄광에 포로들을 광부로 사용했다가 문제라도 생기면 골치가 아프니 따로 포로들이 사용할 새로운 갱도를 만들라는 정성국의 뜻에 개발청장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의미인지 잘 알겠습니다. 전하. 군사청장과 상의해 그렇게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개발청장의 대답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군사청장을 보고 당부했다.
"그러게. 다만 포로들의 관리는 일단 군사청에서 계속 맡아주게. 혹시 모르니 말일세."
"알겠습니다. 전하."
"그리고 너무 가혹하게 몰아붙이지 말게. 알겠나? 나중에 저들에게 언어를 배워야 하니 말일세."
"명심하겠습니다. 전하."
포로들의 문제를 일단 해결한 정성국은 바로 연구청장을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연구청장. 지급 함선의 개조가 가능하겠나?"
이에 연구청장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전하. 이곳의 장인들 역시 기선을 건조해본 경험이 있으니까요. 거기에 개척촌에서 상세한 보고서와 설계도를 보내왔기에 지급 함선에 증기기관을 장착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해 보입니다. 전하."
"그런가? 허면 어떻게 진행할 생각인가?"
"일단 지급 함선 한 척을 먼저 기범선으로 개조한 후 큰 문제가 없다면 전선으로 개조할 생각입니다. 전하."
"전선으로 개조한다라...어떤 방식으로 개조할 생각인가?"
"일단 지급 함선에 60mm 후장식 화포를 8문 장착할 공간을 확보할 생각입니다. 전하."
그동안 이주 선단으로 수송해 온 후장식 화포는 주로 지상에서 사용하기 위해 만든 후장식 화포였기에 창고에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었다.
물론 이를 적당히 개조해 배에 장착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 후장식 화포들은 훗날 요새에 장착할 화포였기에 정성국은 고민 끝에 이주 선단의 지급 함선에 장착된 후장식 화포들을 절반 떼어냈다.
당장 이번 항해에서 개척촌으로 돌아가다가 해적을 만난다면 조금 위험할 수는 있겠지만 무장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닐뿐더러 이번 교전으로 인해 후장식 화포의 위력을 확실히 깨달았기에 김봉길은 큰 걱정을 하지는 않았다.
거기에 2척의 지급 함선이 빠진다 할지라도 이주 선단에는 9척의 커다란 배가 있었고 이런 대선단을 건드릴 간 큰 해적들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다.
아무튼, 지급 함선에 총 4문이 장착되어 있었기에 이 중 2문을 빼냈고 덕분에 총 16문의 후장식 화포가 생긴 셈이다.
이를 2척의 배에 나누어 장착하는 셈이니 결국은 한 척당 8문의 후장식 화포가 추가되어 총 12문의 후장식 화포로 무장하게 되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정성국은 의례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연구청장이 덧붙일 이야기에 집중했다.
"흐음...그리고?"
"전선으로 개조하는 만큼 배의 내구도를 올릴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해서 함선의 내구도를 위해 배 밑창과 흘수선 아래쪽에만 씌워둔 강철판을 전체적으로 씌울 생각입니다. 전하."
이 시대에 범선들은 밑바닥에서 물이 새거나 부식 손상을 막기 위해 배 밑창에 동판을 씌우곤 했다.
물론 이는 무척이나 비쌌기에 주로 커다란 배에 사용하는 방식이었고.
이를 알고 있던 정성국 역시 초기에는 동판을 사용했지만, 김신철에 의해 강철의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밀무역으로 왜에서 구해야 하는 구리보다는 강철을 사용해 배 밑창에 덧씌웠다.
연구청장은 이를 배 전체적으로 확장하겠다는 뜻이었지만 정성국은 그게 가능하냐는 표정으로 관리청장을 바라보았다.
"강철이 부족하지 않나?"
다른 때였다면 고개를 저었을 관리청장이었지만 이번 교전으로 인해 그도 느낀 바가 많았던지 오히려 어떻게 해서든지 연구청에 물자를 지원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우선순위를 조정해서라도 일단 전선의 개조를 도울 생각입니다. 전하."
"그렇다면 다행이군. 그럼 그렇게 진행하도록 하게. 그럼 다음 보고는..."
* * *
앞날이 불투명했기에 시무룩한 표정으로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고 있던 로하스는 갑자기 주변이 소란스러워지는 것을 느끼며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싶어 주위를 살폈다.
그때 옆에 있던 부선장이 팔을 들며 소리쳤다.
"저기 보십시오. 선장님."
부선장이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자 자신들의 배에 포격을 가한 함대가 다시 나타난 것이 보였다.
왠지 모르게 시무룩해져 있던 다른 선원들도 자신들을 이 꼴로 만든 함대가 눈앞에 나타나자 분노를 나타내거나 움츠러들었고.
로하스는 별다른 반응 없이 어느새 덥수룩하게 자란 턱수염을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음...확실히 강 안쪽에 제대로 된 항구가 있긴 한가 보군."
"그러게 말입니다."
처음 소란스러웠던 선원들은 함대가 점점 가까워짐에 따라 며칠 전 교전이 떠올랐는지 무거운 분위기로 함대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게 함대가 가까워졌을 때 로하스가 함선을 관찰하며 신음을 흘렸다.
"으음..."
"생각보다 갤리온과 비슷해 보입니다."
"그러게 말일세. 헌데 저 맨 앞에 선 배는 조금 다른 느낌이군."
로하스가 생각하기에도 맨 앞의 선도함을 제외한 다른 배들은 갤리온과 느낌이 비슷했다.
다만 선두에 선 함선은 처음 보는 유형이었고.
이를 언급하자 부선장 역시 동의했다.
"그렇군요. 마스트도 무려 5개나 되고...속도에 치중한 배일까요?"
"마스트를 보면 그런 것 같은데...배의 모양은 물고기 모양이 아니로군."
이 시대의 갤리온의 모양이 뭉뚝한 이유가 바로 물고기의 모양을 본떠야 속도를 낼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아. 그렇군요. 그러면 속도에 치중한 배가 아니란 소린데...호위함 일까요?"
"그럴지도."
로하스는 자신들이 격리된 섬을 지나는 함선을 바라보다 문득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음? 갤리온과 비슷한 배가 저번보다 적지 않나?"
"음...총 9척. 2척이 비는군요?"
"우리가 저들의 배에 타격을 주긴 했던가?"
그럴 리 있느냐며 고개를 젓는 부선장의 반응에 로하스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결국, 저 안쪽에 갤리온 2척이 남아 있단 소리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