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평소의 정성국이었다면 아마 저들과 접촉하지 말고 사살하라고 명령을 내렸을 것이다.
정성국이 생각하기에 지금 유럽인들은 걸어 다니는 생화학 병기에 가깝다고 판단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특히 이 시기의 유럽인들의 위생관념은 엉망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
비록 정성국이 피를 보는 것을 비교적 꺼리는 성향이라고는 하나 이미 그는 북미왕국의 왕이었고 그렇기에 북미왕국 백성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과감히 손을 쓸 각오도 하고 있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는 이들을 구조하기보다는 사살하는 게 더 안전하긴 했다.
잘못해서 저들이 원주민들이나 새김포에 병균이라도 옮기는 순간 북미왕국은 커다란 타격을 받을 테니 말이다.
특히 김순호가 열심히 제자들과 함께 우두를 접종 중이기는 하나 아직 북미왕국 전체에 접종하지는 못했으니까.
헌데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정성국이 선원들을 구조하라고 명령한 이유는 훗날을 대비해서였다.
이번 일을 계기로 언제까지 운이 좋게 스페인의 눈을 피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정성국이다.
그런 만큼 지금부터 스페인과 한판 붙을 준비를 해야 했고.
그 후를 고려해야 했다.
스페인에게 북미왕국의 힘을 제대로 보여준 후 협상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자면 말이 통해야 할 테고.
그런 만큼 저들을 포로로 대우해 누에바 에스파냐의 정확한 사정을 파악함과 더불어 스페인어를 미리 습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비록 필리핀 총독령이 북미왕국 남쪽에 있는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령의 일부였기에 이들 중에 한자를 아는 사람도 있을 테니 필담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과연 제대로 된 의사소통이 가능할지는 조금 의문이라.
그리고 의외로 원주민들은 언어적인 자질이 뛰어난 편이었기에 차라리 이들 포로를 통해 스페인어를 습득하는 게 추후에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 정성국이었다.
그러한 정성국의 명령이 함대 전체에 알려지고 곧 함대에서 작은 배를 내려 살아남은 스페인 선원들을 구조하는 모습을 보며 정성국은 이들의 거취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혹시 모르니까 일단 격리해둬야 할 것 같은데...아직 새김포 북쪽의 이주민 거주지에 사람이 많은 편이니 그곳에 데려갈 수도 없고.'
잠시 고민하던 정성국의 두 눈에 문득 한 섬이 보였다.
'이것 참...하긴 격리하려면 섬에 가두는 게 최고긴 하지. 앨커트래즈섬에 가둬야겠다. 일단 기선에 경비대원들을 꽤 태웠으니 당분간 이들에게 맡기면 되겠군.'
* * *
뒷정리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혹시 모를 생존자가 살아남아 스페인에 소식을 전한다면 그것만큼 골치 아픈 일도 없었으니까.
이에 한참 동안 주변 해역을 꼼꼼히 살핀 후 더 이상 생존자가 없다고 판단이 들자 그제야 함대의 뱃머리를 돌렸다.
새김포로 회항하는 도중에 잠시 원주민들이 가끔 수렵하기 위해 방문하는 무인도에 들러 포로들과 경비대원들을 내려놓고 각종 물자를 작은 배에 실어 무인도에 내려놓았다.
정성국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경비대의 조장을 보고 당부했다.
"일단 저들을 깨끗하게 씻기고 혹시 모르니 저들의 옷은 모두 수거해 불태워 버리게."
"알겠습니다. 전하."
"그리고 선의가 함께 내렸으니 저들에게 혹시 모를 부상자를 치료하게 하고...그 외엔 저들에게 노역을 시켜 잠시 머물 야영지를 만들게 하게나. 목책도 세우고. 그리고 일단 저들은 포로인 만큼 야영지 주변을 철저히 경계하고 만약 탈출하려 하면 가차 없이 사살하게. 알겠나?"
"알겠습니다. 전하."
정성국에게 큰 소리로 대답한 경비대의 조장이 마지막으로 기선에서 내려 작은 배를 타고 무인도로 향했고 정성국은 이를 잠시 바라보았다.
'이것으로 일단 선원들의 처리는 끝났으니 일단 새김포로 돌아가 자세한 보고를 들어봐야겠군.'
정성국이 탄 기선이 먼저 새김포에 도착했을 때 그 뒤를 따라 이주 선단이 다시 선착장에 하나둘 정박하기 시작했고 정성국은 바로 기선에서 내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남아있던 경비대원들에게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일단 부상자들은 저 비어있는 건물로 옮겨 치료하도록 돕고 그 외에는 일단 다시 한번 씻기도록 하게. 그리고 배도 다시 청소하라고 하고. 아. 그리고 당분간 이곳에 다른 사람들의 출입을 막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전하."
그렇게 명령을 내렸을 때 천급 함선이 정박하면서 김봉길이 내렸고 정성국은 곧장 그에게 다가갔다.
"선장. 피해 상황은?"
"선두에 서서 저희 선단을 돌파하려던 갤리온에서 발사된 조총의 총탄에 맞아 다친 선원들이 6명가량 됩니다."
다행스럽게도 큰 피해는 없었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정성국이 김봉길을 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나마 다행이군. 혹시 모르니 다친 친구들은 모두 하선시켜 치료하도록 하고 그 외에는 미안하네만 씻고 배의 청소를 해야 할 것 같아."
"물론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전하."
정성국이 왜 그런 명령을 내리는지는 잘 알고 있던 김봉길이 당연하다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부선장을 불러 명령을 내렸다.
그 후 정성국에게 상세하게 보고를 하기 시작했다.
이를 듣고 정성국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확인했다.
"저들이 먼저 발포했단 말이지?"
"예. 멀리서 발견했다기보단 갑자기 튀어나와서 그런지 우리를 해적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함대를 발견한 후에도 항로를 바꾸지 않고 선원들이 조총을 꺼낸 것을 보면..."
"그렇군. 뭐 나쁠 것은 없네."
김봉길의 확답에 정성국은 저들에게 이번 교전의 책임이 있다는 것에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들이 먼저 선제공격했다는 것을 빌미 삼아 나중에 스페인의 함선을 공격해도 되겠네. 그렇게 계속해서 마닐라에서 출발하는 갤리온을 잘라먹다 보면 뭔가 반응이 있겠지. 그러자면 제대로 된 전함이 필요한데...'
그런 생각을 하며 정성국은 고개를 들어 선착장에 정박하고 있는 지급 함선을 잠시 바라보고 있을 때 김봉길이 먼저 말했다.
"전하. 이번엔 운이 좋게 스페인의 함선을 모두 격침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정성국은 쓴웃음을 지었다.
"운이 좋다라...운이 좋았다면 이런 일이 없지 않았을까 싶네만. 저들의 함대가 이 시기에 이곳을 지나다 이주 선단과 조우한 것도, 이렇게 해안가에 가까이 붙어 항해하는 것도 말일세."
운이 좋았다면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거라는 정성국의 말에 김봉길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긴 합니다만...어떻게 보면 운이 좋았기에 저들을 모두 격침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만약 저들의 배가 조금이라도 빨라 우리의 함대가 해협을 빠져나오기도 전에 지나쳤다면 저들에게 우리의 존재만 발각되고 놓쳤을 테니 말입니다."
"글쎄...천급 함선의 속도를 생각하면 충분히 추격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네만...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군. 그래서?"
"또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만약을 대비해 이곳을 방어할 함선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허니 이주 선단의 배 중에 몇 척을 이곳에 남겨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으음..."
정성국 역시 당장 이곳에서 커다란 군함을 건조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주 선단의 배 일부를 이곳에 남겨두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었다.
다른 때였다면 한 척의 배라도 이주민을 태우기 위해 거부했을 정성국이었지만 이번 사태를 계기로 전함의 필요성을 깨달았으니까.
이에 정성국은 이번에 개척촌에서 가져온 증기기관과 기동이가 보낸 지급 함선의 개조 안에 대한 보고서를 떠올리고 결정을 내렸다.
"알겠네. 지급 함선 2척을 이곳에 남겨두도록 하지."
"그 정도로 되겠습니까? 최소한 지급 함선 3척은 남겨두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속도가 빠른 천급 함선도 이곳에 남겨두는 것이 어떨지..."
김봉길이 천급 함선을 가리키며 이야기하자 정성국은 살짝 끌리긴 했지만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천급 함선은 좀 아쉽긴 하네. 속도가 워낙 빠르다고 하니. 하지만 천급 함선의 수송량을 생각해보면 차라리 이주 선단에 포함하는 것이 이득이네."
현재 북미왕국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개척촌에서 보내는 이주민과 물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김봉길은 마지못해 수긍하며 지급 함선이라도 더 남겨두기 위해 입을 열었다.
"끙...허면 지급 함선이라도..."
"지급 함선은 이곳에서 기범선으로 개조해 볼 생각이네. 그리고 이번에 개척촌에서 가져온 증기기관의 수를 생각하면 2척이면 충분하다네."
"아. 그 기동이가 말한 지급 함선의 기범선 개조 말이군요?"
"그렇지. 그러니 2척을 남겨두면 충분하네. 대신 다른 배에 장착되어있는 화포 중 일부를 좀 빼야겠네. 당장 이곳에서 후장식 화포를 만들 수는 없으니 말일세. 문제는 선원인데...일단 이주 선단 전체에 내용을 알려 지원자를 받도록 하지. 개척촌에 가족이 남아있는 경우는 이곳에 남기 어려울 테니 말일세."
"알겠습니다. 전하."
* * *
훗날 앨커트래즈라고 불리는 무인도에 격리된 스페인의 선원들은 처음에만 하더라도 꽤 반항적인 눈초리를 보였다.
무인도로 보이는 이곳에서 자신들을 감시하는 무리보다 자신들의 수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고 눈치껏 야영지를 세우고 저들이 시키는 대로 노역을 하는 이유는 전적으로 로하스의 설득 때문이었다.
"그래. 피해를 감수한다면 저들을 모두 죽일 수야 있겠지. 헌데 그 후는 어찌할 건가? 저들이 상황을 파악하고 매일 이곳을 방문해 물자를 제공하는 배를 끊기만 해도 우린 굶어 죽네. 아닌가? 일단은 저들이 우리를 치료해 준 것을 볼 때 죽일 생각은 없어 보이니 상황을 좀 파악하는 것이 어떤가?"
어쨌건 로하스는 이곳에서 가장 높은 지위였고 그의 말도 틀린 것은 없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매일 식수를 공급받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매일 이곳을 방문하는 배를 어떻게 탈취한다 해도 그 조그만 배를 타고 아카풀코까지 노를 저어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해서 일단은 로하스의 명령에 따라, 그리고 자신들을 감시하는 자들의 명령에 따라 일단 자신들이 지낼 야영지부터 건설하기 시작한 스페인의 선원들이었다.
야영지의 건설은 늦으면 늦을수록 자신들에게 불리했기에 열심히 일하는 스페인의 선원들이었으나 로하스와 그의 곁에 선 부선장은 달랐다.
"선장님. 저들의 정체가 대체 뭘까요?"
"글쎄...그걸 내가 어찌 알겠는가."
로하스는 부선장의 물음에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처음 로하스는 이들의 함선을 보고 잉글랜드인이라고 확신했지만, 막상 해전이 끝난 후 구조되어 저들의 배에 올라타 보니 배에 백인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이곳 무인도에서 자신들을 감시하는 무리나 매일 이곳을 방문해 물자를 제공해주는 사람 중에서도 백인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설마 이곳의 원주민들일까요?"
말을 하면서도 부선장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왜 아니겠는가.
그의 상식으로는 이곳의 원주민들은 모두 미개했기에 내심 그럴 리 없다는 확신을 하는 부선장이었다.
그것은 로하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원주민들이 그런 대규모 함대를 가지고 있다는 소린가? 1천 톤이 넘는 갤리온과 비슷한 함선이 10척이 넘던데?"
이에 부선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들의 배를 격침시킨 함대가 강 안쪽으로 들어간 것을 떠올렸다.
"그건 그렇죠. 미개한 원주민들이 그런 배를 직접 만들었을 리는 없긴 한데...설마 잉글랜드 놈들이 강을 타고 내륙에 개척촌을 세운 것 아닐까요? 아까 저희를 내려놓은 함대가 저 안쪽으로 들어가던데?"
"음...배를 생각하면 그편이 그럴듯하긴 하네. 헌데 원주민들에게 총기를 비롯해 대포가 장착된 함선까지 맡긴다고? 뭘 믿고 말인가?"
"하긴 그렇죠. 어휴.“
생각할수록 이들의 정체를 파악할 방법이 없어 한숨을 내쉬는 부선장이었고 로하스 역시 마찬가지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일단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이 없어. 기껏해야 작은 쪽배 몇 척 탈취해봐야 그걸 타고 누에바 에스파냐까지 가긴 어렵다는 것을 자네도 잘 알 테고. 일단은 좀 더 살펴보세."
"알겠습니다. 선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