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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61화 (61/850)

61화

산기슭에 있는 나무로 위장된 관측소에 근무하고 있던 병사들.

보통은 교대해가면서 한 명은 계속해서 망망대해를 바라보고 나머지 병사들은 적당히 쉬거나 잡담을 하고 있었지만, 오늘은 한 곳에 모여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곳은 내해를 유유히 가르며 이동하는 11척의 커다란 범선.

혹시 모를 스페인의 선박에 대비해 세운 관측소였지만 1년에 한 차례 정도만 아주 먼 바다에서 이동하는 소규모 함대를 관찰해 보고하면 끝인 심심한 업무였기에 이런 구경거리를 놓칠 수 없었던 병사들이 몽땅 모여 이주 선단을 바라보며 떠들고 있었다.

"이렇게 보니까 장관이네."

"그러게 말여. 크으. 저게 다 우리 북미왕국의 배 아닌가?"

"뭐 엄밀히 이야기하면 원상의 배긴 하지만..."

"원상이나 북미왕국이나 한통속이나 마찬가지니까."

"저거 타고 올 때만 해도 지겨워서 꼴도 보기 싫었는데 저렇게 보니까 좀 멋지긴 하네."

병사들은 그렇게 떠들어대며 한참을 이주 선단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주 선단이 슬슬 해협을 지나 태평양으로 빠져나갈 때쯤 문득 한 병사가 고개를 돌렸다가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옆에 있던 병사의 팔을 쳤다.

"어라? 야야. 저거 뭐냐?"

"뭐가? 헉!"

볼거리가 워낙 적은 곳이었기에 눈을 떼지 못하고 이주 선단을 바라보고 있던 병사는 표정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가 보이는 광경을 보고 기겁했다.

웬 3척의 범선이 북쪽에서 남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병사의 반응에 근무시간이 아님에도 이곳에 나와 이주 선단을 구경하고 있던 다른 병사들도 고개를 돌렸다 기겁했다.

"이런 젠장. 저거 뭐야!"

"아니. 왜 하필 이 시기에? 보통 늦가을 넘어서 지나가더니!"

"거기에 왜 이렇게 근접해 항해하는 거야? 평소엔 굉장히 멀찍이 떨어져서 항해하더니?"

"어쩌지?"

병사들이 우왕좌왕하며 떠들다가 곧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하나둘 조장을 바라보며 무슨 명령이라도 내려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를 깨달은 이곳 병사들의 조장은 잠시 입술을 깨물다가 명령을 내렸다.

"...봉화 올려."

"예? 봉화를?"

"그래."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준비해두었던 봉화를 피우라는 조장의 명령에 그곳에 있던 병사들이 놀라 조장을 말리려 했다.

"하지만 봉화는 다른 배들이 저 내해로 들어올 때만 피우기로 되어 있잖습니까?"

"그렇긴 한데...지금은 비상상황이잖아? 이주 선단들이 외해로 빠져나가다 마주친 상황이니 이미 발각되었다고 봐야지. 그러니 피워서 당장 알려!"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병사들이 서로 얼굴을 바라보다가 다들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재빠르게 봉화가 마련되어 있는 장소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 * *

견시수에게 보고 받은 후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김봉길은 선수에서 망원경으로 북쪽에서 순풍을 받고 내려오는 범선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아무리 봐도 전하께서 예전부터 이야기하던 스페인의 선박 같은데? 특히 해적선의 경우는 남쪽에서 올라온다고 했으니 저 배는 교역품을 실은 배와 호위함이겠네. 흐음...어쩐다.'

김봉길은 현재 망원경에서 보이는 배가 스페인의 함선임을 확신하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김봉길은 정성국의 대략적인 계획이나 생각에 대해 들을 기회가 많았다.

과거에는 정성국과 함께 북미 대륙을 탐사를 위해 같이 항해하기도 했었고 현재는 1년에 한 번 보는 상황이었지만 이곳에 머무를 때마다 보고서에 담기지 않은 개척촌의 동향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그의 생각이나 북미왕국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직은 이곳이 스페인에 발견돼선 안 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북미왕국은 당장 스페인과 싸울 여력이 없어. 스페인을 공격하고 싶어도 제대로 된 전투용 함선조차 없는 실정이니...전하께선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해군도 만들 생각이라고 하셨지만 그게 하루아침에 될 문제도 아니고...결국 무슨 일이 있어도 저 배들을 놓치면 안 된단 소린데...'

김봉길이 생각을 끝내고 망원경에서 눈을 떼자 뒤쪽에 있던 부선장이 굳은 목소리로 김봉길에게 물었다.

"선장님.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일단 총원 전투 준비하라고 함대 전체에 전하게. 그리고 최대한 끌어들여서 일제 포격을 한다. 어떻게 해서든 모든 배를 격침해야 하니 확실히 주지시키게!“

"예! 선장님!"

부선장은 고개를 끄덕인 후 갑판 위의 선원들에게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 * *

처음에는 로하스의 명령에 따라 해적선을 향해 돌진하던 갤리온이었으나 조금씩 가까워지면서 저들의 배가 예상외로 크다는 것을 깨닫고 당황하기 시작한 선원들이었다.

그들이 만나는 해적선들은 500톤 미만의 배들이 대부분인데 저 배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이 타고 있는 갤리온과 비슷하거나 한 척은 명백히 더 큰 것 아닌가.

갑판 위의 분위기를 느낀 로하스가 큰소리로 갑판 위의 선원들에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괜찮아! 저들은 해적이다! 함부로 대포를 쏘지 못한다! 거기에 저들은 대포도 별로 없어! 너무 걱정하지 마라!"

배의 모양이 자신들이 타고 있는 갤리온과 무척이나 흡사했지만 2열 포 갑판을 자랑하는 자신의 배와는 다르게 저 해적들의 배에는 포문이 별로 없었다.

이를 확인한 로하스가 선원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소리쳤고 선원들이 이를 확인한 후 동요가 가라앉으며 해볼 만하다는 분위기가 조금이나마 생기기 시작했다.

이에 만족한 로하스가 다시 소리쳤다.

"저들이 절대 붙지 못하게 속도를 내면 그만이다! 그냥 뚫고 지나가면 된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바람이 우리를 돕고 있다! 저들이 제대로 선회하고 속도를 내기 전에 지나치면 그만이다!"

그렇게 소리치며 갑판 위 선원들의 사기를 올린 로하스는 동시에 점차 가까워지며 저들의 배 모양을 파악한 후 생각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단순히 해적이라기엔 한 척을 제외한 나머지 10척의 배가 동일한 모양이야. 그나마 포문이 적은 것을 볼 때 상선 같긴 한데...그래도 이곳까지 저런 규모의 함대를 보낼만한 국가라면...역시 잉글랜드 놈들인가. 빌어먹을.'

로하스가 아는 상식으로는 이 신대륙까지 대형 함선으로 구성된 사략 함대를 보낼 수 있는 국가는 오직 잉글랜드뿐이었다.

'탐욕스러운 섬나라 놈들 같으니라고. 아무리 교역품이 탐나도 그렇지 이곳까지 사략 함대로 파견하다니. 네덜란드와의 전쟁을 치룬지 얼마나 되었다고.'

로하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순풍을 탄 갤리온들이 속도를 유지하며 강 안쪽에서 막 나온 함대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100미터.

"머스킷 사수들은 발포 준비!"

로하스의 명령에 따라 갑판 위에서 머스킷을 들고 있던 선원들이 발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80미터.

점차 갑판 위의 선원들이 곧 있을 전투로 인해 긴장하기 시작했을 때 로하스가 외쳤다.

"혹시 갈고리가 걸리면 가차 없이 잘라 버려! 절대로 저들이 붙을 여지를 주지 마라!"

60미터.

로하스는 포 갑판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서 있는 부선장을 보고 명령했다.

"대포 발사 준비! 교차하는 순간 한 방 먹여준다!"

"예. 선장님."

명령을 받고 곧장 포 갑판으로 살짝 내려가 선장의 명령을 전달하는 부선장이었다.

40미터.

"머스킷 사수들은 발포!"

타타타타탕!

갑작스러운 총격에 해적선 갑판 위의 선원들이 몸을 숙이는 것을 보면서 로하스가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외쳤다.

"좋았어! 봐라! 기껏해야 해적 놈들일 뿐이다! 그냥 지나치면서 대포로 한 방 먹여주고 도망치면..."

퍼퍼퍼퍼펑!

총알의 보답으로 해적선에서 일제히 포탄이 발사되자 로하스가 기겁했다.

"헉!"

* * *

정성국이 이주 선단을 배웅하고 나서 다시 집무실이 있는 군사청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차를 타고 이동하고 있을 때 갑자기 마차가 멈춰섰다.

정성국은 도착했나 싶어 무의식적으로 마차 문을 열려는 순간 갑작스레 마차 문이 열리며 호위대장이 다급한 표정으로 외쳤다.

"전하!"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호위대장을 보고 정성국은 안색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호위대장? 무슨 일인가?"

"저기! 관측소에서 봉화가 올라왔습니다."

"뭐라고?"

호위대장의 말에 정성국은 급히 마차에서 내려 관측소가 위치한 내해에서 태평양으로 나가는 해협 부근의 산을 바라보았다.

그 산기슭에서는 준비되어있던 봉화가 활활 타오르며 검은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저 봉화가 올라왔다는 것은 스페인의 함선이 내해로 돌입...아. 젠장. 이주 선단과 마주쳤나 보군.'

정성국은 그 즉시 상황을 파악하고 다시 마차에 오르며 호위대장에게 명령을 내렸다.

"지금 즉시 일반 선착장으로 가세."

"예. 전하."

곧 마차가 급하게 덜컹거리면서 빠르게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그 마차 안에서 정성국은 조급한 마음을 표현하기라도 하듯 허벅지에 올린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이며 생각에 잠겼다.

'하필이면 이주 선단이 출항할 무렵에 스페인의 배와 조우할게 뭐야. 후우. 만약 스페인의 배를 모두 잡지 못한다면 바로 스페인과 한판 붙을 수밖에 없는데...이건 김봉길 선장의 능력을 믿는 수밖에 없군.'

그러면서 정성국은 이주 선단을 떠올렸다.

이주 선단을 구성하는 배는 천급 함선 1척과 지급 함선 10척.

비록 함선 한 척당 고작 4문의 화포 뿐이라지만 이 화포가 강평화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60mm 후장식 화포였기에 화력에서 밀릴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관건은 과연 스페인의 함선이 이주 선단과 교전을 하는가.

그동안의 보고를 생각하면 저들은 주로 3척 내지 4척의 함선이 함대를 구성해 이동하는 만큼 이주 선단의 규모를 보고 교전을 회피하면 골치 아파지니 말이다.

'그래도 천급 함선도 있고 후장식 화포도 있으니 놓치지 않고 다 격침할 수 있을 거야. 김봉길 선장이라면 내가 원하는 바를 잘 알고 있을 테니 믿자.'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정성국이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며 계획을 변경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지금까지는 운이 좋았던 거야. 원 역사에서야 100년 후에나 이곳이 발견된다지만 지금은 이미 역사가 바뀌었는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대비를 하지 못했군. 역시 사람은 막상 눈앞에서 일이 터져야만 실감하는 법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쓴웃음을 짓는 정성국이었다.

분명 매년 이곳을 한 차례 지나가는 스페인의 함선을 생각하면 먼저 만약을 대비해 그들을 쫓아가 요격할 수 있는 빠른 전선을 만들었어야 했다.

그런데도 원 역사에서 100년 후에나 이곳이 발견되었고 직접 관측했던 결과는 오직 한차례뿐인데 그 당시의 스페인 함대가 먼바다로 이동했다는 이유만으로 안도하고 해군 육성을 뒤로 미뤘으니.

'북미왕국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서라도 당장 전선을 만들어야겠네. 힘들다면 이주 선단의 배 한 척을 빼서 개조하는 한이 있더라도.'

* * *

다행스럽게 새김포와 새마포를 오가는 기선이 선착장에 머물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곧 새김포를 떠났을 기선이었지만 봉화가 올라오면서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보일러만 예열해두었을 뿐 새마포로 떠나지 않았다.

거기에 봉화를 확인한 경비대원들이 선착장에 도착하기 시작했고.

이에 정성국은 약간의 경비대원들을 기선에 태우고 곧장 배를 출항시켰다.

처음에는 위험한 장소에 왕이 직접 간다는 것에 호위대장의 반대가 심했지만, 정성국은 교전 장소에 가까이 갈 것이 아니라고 단언했기에 마지못해 호위대장이 고개를 끄덕였고.

해협까지 이동하는 도중에 포탄이 발포되는 소리가 들렸기에 혹시라도 해전에 휘말릴까 긴장하던 호위대장이었지만 곧 조용해졌기에 호위대장이 별말 하지 않았다.

잠시 후 도착한 해협의 도착한 정성국과 호위대장의 두 눈에 비친 광경은 스페인의 함선으로 추정되는 갤리온 3척이 모두 불에 타고 있는 광경이었다.

그리고 침몰하는 함선에서 뛰어내린 선원들이 나무 조각을 붙잡고 자신들을 살려달라는 듯 소리치고 있었고.

해적이었다면 가차 없이 사살했을 김봉길이었지만 상대가 스페인의 군인이라고 생각했기에 구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던 중에 새김포에서 기선을 타고 접근하는 정성국을 보고 김봉길은 선택을 미뤘다.

정성국은 주변의 광경을 보고 잠시 고민하다 명령을 내렸다.

“일단 생존한 적 선원들을 일단 구조하라고 전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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