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이주 선단을 구성하는 배들의 정비가 다 끝났다는 소식에 그동안 새김포에서 쉬고 있던 선원들이 다시금 태평양 횡단을 위해 출항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다만 다른 때와는 달리 이 출항 준비에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정성국의 결정에 따라 하와이 제도에서 교역할 이런저런 물품들을 제작하는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특히나 다른 물품과는 달리 철제 무구는 만들어 둔 것이 거의 없었기에 모두 새로 제작해야 했으니 연구청의 장인들이 잠을 줄여가며 만들어야 했다.
이런 연구청 소속 장인들의 노력 덕분에 더 늦기 전에 출항 준비가 끝났다는 보고가 들어왔고 정성국은 김봉길과 선원들을 배웅하기 위해 선착장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정성국은 배에 올라타는 선원들을 격려해주었고 마지막으로 김봉길을 보았다.
"조심히 가게. 선장."
김봉길은 정성국을 보고 걱정 말라는 듯 예전처럼 헤헤거리면서 대답했다.
"헤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하. 뭐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 정도 대규모 선단이면 해적들도 감히 덤비지 못할 겁니다."
정성국은 그보다는 오히려 혹시 모를 폭풍우나 태풍 같은 기상이변이 더 두렵긴 했다.
지금까지야 운이 좋았지만, 바다 날씨는 변덕스러웠고 언제까지나 순조롭게 항해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러고 보면 망망대해에서 태풍을 맞이하는 것보다는 날씨가 좋지 않을 때 태풍을 피할 곳이 많은 북방 항로가 더 안전하긴 해.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기선으로 싹 바꿔버리든가 해야지.'
정성국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김봉길을 보고는 다른 주제로 돌렸다.
괜히 날씨를 언급했다가 말이 씨가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렇겠지. 아. 혹시 유구에서는 별다른 문제는 없나?"
"아. 예. 별다른 문제는 없습니다. 유구인들이야 저희가 항구를 이용하면 약간의 돈을 챙길 수 있다 보니 당연히 좋아하니 말입니다."
그거야 당연한 이야기였기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가 유구의 나하를 방문했을 때 무척이나 경계하던 사쓰마 번의 관리를 떠올리고 물었다.
"왜놈들은?"
"살짝 경계하는 기색이 없진 않은데...점점 선단을 구성하는 배가 늘어났기 때문인지 전하께서 유구에 방문했을 때처럼 나대지 못하더군요."
"그래?"
살짝 의외라는 표정을 짓는 정성국에게 김봉길이 자세하게 대답했다.
"예. 그렇다고 저희가 유구와 제대로 교역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곳에 상륙하지도 않잖습니까. 괜히 시비가 일어날까 봐. 그저 식수나 식량 약간 보충하고 바로 출항하다 보니..."
"딱히 왜놈들과 문제가 생길 여지는 적다는 거군."
김봉길의 답변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정성국이었지만 곧 김봉길이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는 내용을 듣고 기겁했다.
"그렇습니다. 전하. 그리고 점점 선단을 구성하는 배의 수가 늘어나는 만큼 전하께서 명령만 내리신다면 유구에서 얼쩡거리는 왜놈들 정도는 선원들만으로도 쓸어버릴 수 있습니다만..."
"큰일 날 소리."
"예?"
단호하게 거절하는 정성국의 답변에 의아한 표정을 짓는 김봉길을 보고 정성국은 쓴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이거 전에도 한 번 이야기 했던 것 같은데...그 때 잘 알아듣게 이야기했고. 그런데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역시 아이누인들 때문일까?'
물론 김봉길이 유구인들과 친분이 깊다면 모를까 애초에 유구 섬에 제대로 상륙도 하지 않고 물자만 보급받고 이동한다고 했으니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아이누인들을 돕기 위해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닐까 싶은 정성국이었다.
막부의 시선을 분산시킨다면 아이누인들이 받을 압력이 줄어들 테니 말이다.
다만 김봉길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유구에서 문제가 일어난다 해도 막부의 시선이 분산된다기보다는 원상이 제대로 지원해주지 않는다면 사쓰마 번 선에서 정리될 것이라는 점이다.
‘지금쯤이면 아마 사쓰마의 석고가 70만 석이 넘을 텐데. 오키나와에 개입해서 막부의 시선을 분산시키려면 정말 원상의 모든 여력을 다 동원해야 할 테니 의미가 없지.'
정성국은 그렇게 생각하며 김봉길을 바라보고 당부하기 시작했다.
"당장 유구에서 얼쩡거리는 왜놈들이 문제가 아닐세. 그 뒤에 있는 사쓰마 번이 문제지."
"하지만...아이누인들을 도운 것처럼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아이누인들이 상대해야 하는 마쓰마에 번과 유구인들이 상대해야 하는 사쓰마 번의 규모는 전혀 다르네. 아이누인들을 도운 것처럼 쉽게 생각할 문제가 전혀 아니야."
"그렇습니까?"
"눈치를 보아하니 유구인들을 돕기보다는 왜인들을 곤란하게 할 방도로 생각한 모양인데...개입하면 오히려 우리가 곤란해지네. 아이누인들을 지원하고 이주 선단을 구성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치지 않는가. 그러니 절대 유구엔 개입하지 말게. 알겠나?"
무척이나 단호한 어조로 말하는 정성국을 보고 김봉길은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전하."
정성국은 김봉길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 입을 열었다.
"그래. 믿도록 하지. 슬슬 배에 오르게. 잠깐 당부한다는 게 선원들을 너무 기다리게 하는 것 같군."
"알겠습니다. 그럼 내년에 뵙겠습니다. 전하."
그러면서 선착장 위에서 정성국이 말릴 새도 없이 절을 한 김봉길이 다시 일어나자 고개를 저은 정성국이 마지막으로 덧붙여 말했다.
"아. 혹시 모르니 선원들의 입단속을 철저히 하도록 하게. 물론 선원들을 믿고 있네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개척촌에 입항하기 전까지 다시 한번 철저하게 입단속을 시킬 테니 말입니다."
이에 정성국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김봉길은 그를 기다리고 있던 천급 함선에 올라탔다.
그리고 잠시 후 천급 함선이 먼저 선착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하자 그 뒤를 이어 지급 함선들이 하나둘 선착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성국은 곧 몸을 돌렸다.
* * *
갤리온의 선원들이 갑판 위에서 잠시 잡담을 나누며 쉬고 있었다.
"오우. 날씨도 좋고. 바람도 도와주고. 여러모로 참 좋은데?"
"그러게. 이렇게 날씨가 도와주는 만큼 빨리 아카풀코에 도착했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아카풀코에 도착하기만 하면...으흐흐흐."
"쯧쯧."
중년의 선원이 무엇을 떠올린 것인지 음흉한 표정을 짓는 젊은 선원을 보고 혀를 차고 있을 때 망루의 견시수가 무언가를 발견한 듯 두 손을 눈 위에 올려두고 인상을 찌푸리며 계속해서 바라보다 깜짝 놀라서 밑을 보고 소리쳤다.
"10시 방향에서 새로운 배 발견!"
갑작스러운 견시수의 보고에 선미에서 잠시 쉬고 있던 부선장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견시수를 바라보았다.
"뭐? 이곳에 배가 있다고? 그럴 리가."
부선장은 현재 위치를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현재 위치는 멘도시노에서 대략 200km떨어진 곳인데...이곳 캘리포니아 섬은 원주민을 제외하면 빈 땅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설마 원주민들의 카누를 보고 호들갑 떠는 것은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부선장이 견시수가 올라가 있는 망루 근처로 이동했을 때 견시수가 다시 갑판을 향해 소리쳤다.
"한 척이 아닙니다! 다수의 범선이 강 안쪽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범선? 야! 확실해? 원주민의 조각배가 아니라 범선이 맞아?"
"예! 범선입니다!"
견시수의 답변에 부선장은 표정을 구기면서 갑판 위에서 쉬고 있다 견시수의 보고에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는 선원들을 보고 소리쳤다.
"젠장! 혹시 모르니 전원 전투 준비! 거기! 빨리 선장님 모셔와!"
"예! 부선장님!"
부선장이 명령을 내리자 곧 선원들이 부리나케 움직이면서 배 안에서 쉬고 있는 선원들에게 소식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부선장은 선수로 달려가 허리춤에서 꺼낸 망원경으로 견시수가 이야기 한 범선을 찾기 시작했다.
'젠장. 진짜 범선이로군. 강 안쪽에 숨어 있다가 우리를 보고 나온 것을 보면 해적이 확실해. 근데 뭔 놈의 해적들이 저리 많은 거야. 10척? 11척이나 되네? 이런 미친. 저 많은 해적선이 태평양을 누비게 놔두다니.'
부선장이 망원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면서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을 무렵 선원에게 보고받고 급히 갑판 위로 올라온 로하스가 부선장에게 다가왔다.
"부선장. 무슨 일인가. 설마 해적선인가?"
로하스가 나타나자 망원경을 그에게 건네주며 대답하는 부선장이었다.
"그런 것 같습니다. 딱히 국기가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강 안쪽에서 대기하고 있다 저희를 보고 급히 강에서 나오는 것을 볼 때 해적선일 확률이 무척 높아 보입니다."
부선장의 보고에 망원경으로 캘리포니아 섬의 중간에 있는 커다란 강 안쪽에서 나오는 여러 척의 범선을 보고 인상을 찌푸리며 로하스가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많군. 정확히 몇 척이지?"
"11척이나 됩니다."
"끙..."
부선장의 대답에 탄식하면서도 망원경에 눈을 떼지 못하는 로하스를 보고 부선장이 조심스럽게 그의 의중을 물었다.
"어쩔까요. 지금이라도 일단 항로를 틀어 먼 바다로 나갈까요?"
부선장의 말에 로하스는 계속해서 망원경으로 이제 막 강 안쪽에서 하나둘 나오는 범선을 바라보다가 내심 결정을 내린 듯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
"음...아닐세. 바람이 우리를 도와주고 있으니 그냥 뚫고 나가지."
"예?"
이런 답변에 부선장이 무슨 개소리냐는 듯 황당하게 쳐다보았지만, 망원경에 집중하고 있는 로하스는 이를 모르는지 대답했다.
"생각해보게. 이대로 항로를 틀어 먼 바다로 나간다 해도 저들의 추적을 피할 수 있을 거라고 보나?"
부선장은 내심 선장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부선장 역시 모르지는 않았다.
교역품을 가득 실은 마닐라 갤리온을 호위해야 하는 만큼 약탈을 위해 배를 가볍게 하고 달려드는 해적선을 속도로는 떨쳐내기는 어렵다는 것을.
그런 해적선을 퇴치하기 위해 따라붙은 호위함의 부선장인 만큼 해적들과의 전투가 두렵지는 않았지만 그건 일반적인 경우였다.
이번 경우는 해적선이 너무 많지 않은가.
이에 로하스를 보고 불안한 듯 떨리는 어조로 입을 열고 이야기하다 언성이 높아지는 부선장이었다.
"그렇지만...이대로 나아가면 저들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속도를 생각해보면 저들과 제대로 맞붙을 것 같은데요? 거기에 저들의 측면에 함선을 들이미는 상황이 되잖습니까! 저들이 대포라도 발사하면 어쩌려고요!"
"잊었나? 저들은 해적일세. 함부로 대포를 사용하진 못할 거야. 물건이 상하면 안 되니까."
해적선의 목표는 결국 배에 실린 화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해적선들은 주로 빠른 배를 타고 접근해 근접전을 펼치는 편이고.
특히나 저렇게 많은 해적선이 모였으니 어떻게든 교역품에 피해가 가는 행동은 피하려 들 테고 결국 어지간하면 대포를 사용하지는 않을 거라고 보았다.
이에 로하스는 아예 저들이 접근해 갑판에 올라 근접전을 벌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제일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자면 접현하기 어렵게 최대한 속도를 내는 게 최선이었다.
해적선의 숫자를 생각하면 잠시 속도를 늦추는 순간 다른 해적선들이 득달같이 달려들 테니 오히려 속도를 살려 그냥 지나치되 나머지는 운에 맡기는 게 낫다고 생각한 로하스였다.
이에 새햐얗게 질린 부선장이 로하스에게 소리쳤다.
"물론 그렇긴 하겠지만 저들이 마스트를 노리고 대포를 쏠 수도 있잖습니까!"
"그건 운에 맡겨야지. 방법이 없지 않은가. 저들은 이제 막 강 안쪽에서 나오는 상황이니 차라리 속도를 최대한 내면서 돌파하는 게 최선이야. 이건 이 함대의 총 책임자인 내 명령일세. 잔말 말고 뒤따라오는 함선들에도 전투 준비를 하라고 전하게.“
단호한 어조로 명령을 내리는 로하스를 잠시 바라보던 부선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선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