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한여름의 강한 햇살이 갑판 위를 내리쬐고 있을 무렵 선장실 안에서 햇빛을 피하고 있던 이 갤리온의 선장이자 이번 항해의 총 책임자인 로하스가 잠시 해도를 바라보다 갑판으로 나왔다.
선장을 대신해서 현재 배의 운항을 책임지고 있던 부선장이 선장실에서 나온 로하스를 보고 급히 다가와 인사했다.
"선장님. 나오셨습니까?"
구름 한 점 없는 창창한 날씨였기에 위에서 내리쬐는 직사광선과 수면에서 반사되는 빛이 눈에 부신 듯 살짝 인상을 찌푸린 로하스가 다가온 부선장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 슬슬 도착할 때가 된 것 같아서 말이네."
이에 부선장이 선장의 말에 맞장구치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예. 슬슬 도착할 때가 되긴 했죠. 그러고 보면 이번 항해는 주님의 축복이 함께한 편안한 항해였던 것 같습니다. 바람과 해류 모두 이번 항해를 축복해주는 것 같았고요. 안 그렇습니까? 선장님?"
"음. 확실히 그렇긴 하군. 덕분에 항해도 굉장히 단축되었지?"
"예. 평소에 비하면 거의 20일은 단축한 것 같네요. 뭐 해적이 없어서 편하게 온 것도 있지만 말입니다. 이게 다 선장님의 계획 덕분이겠지요."
부선장이 해적을 거론하자 이를 듣던 선장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혀를 찼다.
필리핀에서 아카풀코로 향하는 마닐라 갤리온에 실린 값비싼 물품을 노리고 수많은 해적이 달라붙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동안 지속해서 마닐라 주변의 해적들을 소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해적의 일소는 불가능에 가까웠고.
해서 보통은 정확한 출항 날짜를 비밀로 하고 해적들이 예상하지 못하는 타이밍에 마닐라 갤리온을 출항시키곤 했지만 그런데도 어떻게 정보가 새어나가는지 걸핏하면 해적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달라붙기 일쑤였다.
이를 잘 알고 있던 이번 항해의 총 책임자인 로하스는 아예 강수를 두었다.
선원들의 불만이 생길 것을 감수하고 출항 전부터 그들을 배에서 재운 것.
아무리 몰래 출항하려 해도 선원들을 감시만 한다면 충분히 출항 예정일을 파악하기 쉬웠으니 내린 조치였다.
더불어 물자를 배에 싣는 원주민들이나 청국인들 역시 믿기 어려웠기에 예정했던 물자를 배에 다 싣기도 전에 필리핀의 총독에게만 이야기 하고 날을 정해 밤늦게 출항해버렸다.
거기에 항로도 살짝 변경했고.
그런 로하스의 결정 덕분인지 이번 항해에서는 필리핀해 인근에서 함대에 달라붙는 해적들이 전무했다.
이를 거론하며 열심히 아부하는 부선장이었고 로하스는 자신의 계획이 제대로 통했다는 것에 만족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크흠. 확실히 해적을 속이기 위해 물자를 다 싣기도 전에 출발한 것이 주효했던 것 같군. 거기에 평소보다 출발도 빨랐고 이렇게 항해가 단축된 이상 아카풀코에 도착하는 것도 훨씬 빨라질 테니 어지간히 운이 없지 않은 한 해적들을 만날 일도 없을 테지."
"예. 다 선장님의 계획 덕분이죠. 괜히 필리핀의 총독께서 선장님을 이번 항해의 총 책임자로 임명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크흠."
부선장이 입을 열 때마다 나오는 찬양에 로하스의 콧대가 올라갈 무렵 마스트 위쪽 망루에 있던 선원이 갑판을 보고 소리쳤다.
"육지다! 육지가 보인다!"
이에 갑판 위에서 떠들던 로하스와 부선장이 동시에 선수로 이동했다.
잠시 후 눈앞에 보이는 육지를 보면서 로하스가 입을 열었다.
"오. 드디어 도착했나 보군."
"그런가 봅니다. 선장님. 지형을 보아하니 멘도시노 곶이 맞는 것 같죠?"
"아아. 해도 상으로도 그렇고 지형도 그렇고 이곳은 멘도시노 곶이 확실하네."
선장실에서 나오기 전에 다시 한번 해도를 점검하면서 위치를 파악했던 로하스가 이곳이 신대륙의 북위 38도에 해당하는 멘도시노 라고 확언하자 부선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로하스를 바라보았다.
"그럼 어떻게...바로 정박할까요?"
"그러도록 하게. 굳이 이곳에서 오래 머물 일은 없겠지?"
"예. 이번 항해는 순조로웠기에 제대로 배를 수리할 필요도 없고...혹시 모르니 정비만 하고 바로 남하하면 될 것 같습니다."
보통 이곳까지 도달하는 동안 해적의 공격을 받았거나 태평양을 횡단하다 거친 파도를 만나 배가 손상되는 경우가 많았고 그렇기에 이곳에 잠시 머물면서 배를 임시로 수리하곤 했다.
하지만 이번 항해는 해적의 공격도 없었고 태평양을 횡단할 때도 날씨가 도와주었기에 배의 파손은 거의 없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부선장이 자신감 있게 대답했다.
이런 부선장의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로하스는 씩 웃고 선장실로 되돌아가기 전에 큰소리로 외쳤다.
"그래. 그럼 적당히 정비하고 바로 아카풀코로 내려가자고. 마닐라에서는 배 안에서 머물며 고생했었으니 아카풀코에서는 제대로 쉬게 해줄 테니."
이에 부선장을 비롯해 갑판 위에 있던 선원들의 안색이 밝아지며 우렁차게 대답했다.
""예. 선장님.""
* * *
"하와이? 그곳의 원주민들과 교역하자고?"
"그렇습니다. 전하."
"음..."
배를 정비하는 동안 이곳에서 쉬고 있던 김봉길을 집무실로 불러들인 정성국은 김봉길의 요청에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성국은 그동안 김봉길에게 하와이에서는 웬만하면 개입하지 말라고 이야기해두었는데도 불구하고 김봉길이 굳은 표정으로 교역을 요청하니 왜 그런 요청을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교역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하와이에 개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곳에 매년 들르는 김봉길이 더욱 잘 알 테니까.
하와이 제도는 제도(諸島)라는 이름에 걸맞게 수많은 섬과 환초로 이루어져 있었고 각 섬마다 상황은 모두 달랐지만 이 하와이 제도를 제대로 통일된 세력은 아직 없었다.
그리고 이주 선단이 개척촌으로 돌아갈 때 매번 들르는 오하우섬의 경우는 여러 부족이 난립해 서로 다투고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어느 한 집단과 교역을 하게 된다면 그 균형이 깨질 수밖에 없다.
원 역사에서도 유럽인들과 교류한 추장 카메하메하가 그들로부터 구식 머스킷을 구해 폴리네시아 원주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하기 시작했고 결국 하와이섬을 장악하였다.
그 후 다른 섬들을 무력 점령하기 위해 새로운 전쟁을 벌여나갔고 결국 카우아이섬과 니하우섬을 제외한 다른 섬들을 모두 점령하여 하와이 왕국을 세우게 되고.
이 당시 하와이 제도를 통일하겠다고 덤벼든 카메하메하 1세 덕분에 꽤 많은 폴리네시아인들이 피를 흘렸다고 알고 있었기에 함부로 교류했다가 하와이 제도에 피바람이 불까 걱정해 개입을 꺼렸던 정성국이었다.
'아예 개입을 할 거면 작정하고 지원해줘서 단기간에 오하우섬이나 하와이 제도를 장악할 수 있게 돕는 것이 차라리 피를 적게 흘리는 길일 텐데...그러자니 당장 이곳에서 하와이제도까지 오고 갈 선박도 마땅치 않고. 아직은 시기상조인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정성국이 김봉길을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자네도 그곳 사정을 대충 알고 있지 않나?"
"그렇습니다. 전하."
"그런데도 교역을 하자고? 그러다 보면 균형이 깨질 텐데?"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 정성국을 보고 김봉길은 쓴웃음을 짓고는 대답했다.
"그렇긴 합니다만...이미 균형은 깨졌습니다."
"뭐라고? 그게 무슨 의미인가."
의외의 말에 놀란 정성국이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자 김봉길이 대답했다.
그동안 이곳 새김포에서 개척촌으로 돌아갈 때는 매번 중간에 하와이섬에 들러 식수를 얻고는 했다고.
다만 점점 배가 늘어나면서 필요한 식수의 양이 많아짐에 따라 신선한 식수를 공급받는 것에 대한 대가로 일정량의 식량을 제공했다고.
물론 많은 식량을 대가로 내어준 것은 아니지만 주변 부족이 보기엔 어쩌다 방문하는 이방인에게 흔하디흔한 식수를 퍼주는 것으로 대가를 받는 셈이니 자신들이 들르는 해안가를 차지하기 위해 다툼이 벌어졌다고.
그리고 김봉길이 첨언했다.
"지금껏 저희에게 식수를 제공했던 부족과는 달리 다른 부족이 해안가를 차지하게 된다면 원활한 식수 보급이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욕심 때문에 항구를 차지하려는 만큼 식수와의 교환 비율을 조절할 수도 있겠죠. 그런 만큼 차라리 지금껏 저희에게 식수를 제공해주었던 부족을 지원해주는 것이 차라리 나은 선택인 것 같습니다."
김봉길의 설명을 듣던 정성국은 집무실의 책상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면서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일리는 있는데...그건 모르는 것 아닌가? 자네의 추측인 건가? 아니면 누구에게 들은 건가?"
"매번 저희에게 식수를 제공해주는 부족의 추장에게 들었습니다."
"말이 통하던가?"
그러자 김봉길은 모호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처음에는 몸짓을 통해 소통했습니다만...최소한 작년에는 그보다는 나았습니다. 뭐 그 추장은 주위의 부족들은 다 욕심이 많다고. 자신들을 공격할 수 있다고. 자신들을 도와야 한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긴 했습니다만..."
이에 정성국은 잠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우리 선단이 들르는 곳이 바로 오하우섬의 호놀룰루 근방이지. 그리고 이 오하우섬에는 천혜의 항구라는 진주만이 있고. 우리에게 우호적인 부족이 오하우섬을 점령한다면 나쁠 것은 없는데...나중에 중간기착지로 진주만에 항구를 세울 수도 있을 테고. 문제는 가뜩이나 철제 생산량이 빠듯한데...이거 여력이 있으려나?'
당장 여력이 없기에 하와이의 부족과 교류하는 것은 뒤로 미루고 싶은 정성국이었지만 이미 자신들이 1년에 한 번 방문하는 것으로 최소한 오하우섬에서는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는 김봉길의 보고에 결국 결정을 내린 정성국이었다.
'이렇게 된 거 제대로 지원해주고 그에 대한 대가로 최소한 항구를 세울 지역은 확실히 약속받아둬야겠네. 거기에 하와이 제도에는 꽤 많은 백단목이 자생하는 것으로 알고 있으니...추후엔 교역할 수도 있을 테고. 생각해보면 폴리네시아인들은 타고난 뱃사람인 만큼 나중에 이들을 선원으로 고용하는 것도 나쁠 것 같지는 않네.'
"그럼 이렇게 하도록 하지. 이번에 식량뿐만 아니라 철제 무구도 좀 내어줄 테니 가져가게. 그리고 자네가 알아서 부족을 선택해 교섭하게. 그 부족의 현재 상황이 어떨지는 모르니 말일세. 다만 그 대가로 항구를 세울 지역을 받아내게."
정성국의 허락에 김봉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항구를 세울 지역을 받아내라는 말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항구를 말입니까?"
"그렇네. 그렇다고 당장 항구를 세울 여력은 없겠지만...나중에 항구를 건설할 생각이니 미리 약속을 받아두란 소리네."
이에 김봉길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허면 원하시는 지역이라도 있으십니까?"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입을 열었다.
"자네 혹시 기억하나? 나와 함께 하와이 지역의 섬을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 말일세. 그때 원주민들이 우리를 경계해서 식수만 받고 바로 출항하지 않았나?"
이에 기억난다는 듯 히죽 웃으며 대답하는 김봉길이었다.
"그랬었죠. 뭐 지금이야 오히려 반기고 있습니다만..."
"그래. 그때 출항하고 잠시 후에 내가 천혜의 항구라고 감탄한 곳도 기억하나?"
김봉길이 살짝 눈을 찌푸리며 기억을 더듬다가 이내 생각이 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어딘지 알겠습니다. 저희가 항상 들르는 해안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만의 입구를 보고 그런 말씀을 하셨었죠."
"그래. 그곳 말일세. 그 만 안쪽에 적당한 부지를 확보하게."
"알겠습니다.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