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정성국의 집무실에 도착한 김봉길은 정성국과 그동안에 있었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오. 그렇습니까? 본격적으로 원상의 기반을 옮기겠다는 뜻입니까?"
"아무래도 이곳에 새로운 나라를 세운 이상 이곳의 발전에 더 집중해야 하지 않겠어? 그러니 최소한 연구소의 주요 인력들은 이곳으로 이주해야 할 것 같아."
정성국이 담담하게 대답했지만, 김봉길은 정성국을 보며 히죽거리고 있었다.
이에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은 정성국이 김봉길을 바라보고 물었다.
"왜?"
"아닙니다. 전하. 다만 그분이 참 좋아하실 것 같아서요."
김봉길의 말에 오히려 정성국은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다음 이주 선단을 통해 연구 인력의 대부분을 이쪽으로 불러들일 예정이긴 하나 전아라의 경우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른 연구 인력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전아라의 경우는 쉽게 자리를 비우기가 어려웠다.
전아라가 현재 맡고 있는 업무는 무연화약의 제조를 비롯한 각종 탄환이나 포탄을 생산하는 업무를 총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당분간은 막부와 다투는 아이누인들을 지원해줘야 하는 만큼 탄환 생산에 차질을 빚으면 곤란했다.
다만 정성국은 마차에서 김봉길이 전해준 아직 읽지 않은 두툼한 전아라의 편지를 떠올리며 고민했다.
'자리를 잡았다고 연구소의 인력 대부분을 이주시키면서 전아라만 남겨두기도 못 할 짓이긴 하지. 문제는 화약 생산이긴 한데...이곳에서 제대로 화약을 생산하기 전까지는 평화가 남아서 고생을 좀 해줘야겠네. 어차피 당장 새로운 80mm 화포의 개발이 시급한 것도 아니니.'
그렇게 정성국이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렸을 때 김봉길은 오히려 기대했던 반응을 보이지 않는 정성국의 표정을 보고 어리둥절했다.
"어...전하? 안색이 왜 그러십니까?"
"아. 아닐세. 모든 연구 인력들을 한꺼번에 옮길 수는 없으니 아라의 거취에 대해 잠시 고민 중이었네만...불러들여야겠군.“
"아. 그렇군요. 하긴 그것도 그렇네요. 어라? 그러면 장인들은 어떻게 됩니까?"
"당장 모든 장인을 옮겼다간 생산에 차질이 있을 테니...그건 적당히 조율해야겠지."
"그렇군요."
* * *
마지막으로 지급 함선에서 내린 이주민들은 홀몸으로 이곳 북미 대륙으로 이주한 사람들이다.
그런 이주민들이 선착장 앞에서 모여있을 때 한 젊은 사내가 그들에게 다가와 소리쳤다.
"안녕하십니까!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날이 더운 만큼 바로 씻고 숙소로 이동하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세요!"
그 말을 끝으로 젊은 사내는 바로 서쪽으로 이동했고 선착장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그 젊은 사내를 따라가면서 주변을 살펴보았다.
"아따. 확실히 이곳은 조선이 아니구먼. 마을 풍경도 그렇고. 사람들의 모습도 그렇고 영 생소하구만?"
”뭐 마을 풍경이야 개척촌과 비슷하긴 한데.“
"배 안에서 선원들에게 미리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참말로 이곳의 사람들은 상투가 없네? 저들이 정말 조선인들 맞아?"
"조선말을 저렇게 잘하는데 당연히 조선인이겠지. 다만 저렇게 머리를 자르니 영 생소하구만. 조선인 같지가 않아."
그런 말을 하면서 이주민들은 젊은 사내를 따라 먼저 목욕탕에 들러 오랜 시간 항해하면서 제대로 씻지 못해 찝찝하던 몸을 깨끗하게 씻고 미리 마련되어 있던 새 옷을 입고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목욕탕 앞에서 이주민들을 기다리고 있던 젊은 사내는 씻고 나오는 이주민들을 4명씩 묶어 패를 하나씩 쥐여주며 목욕탕 주위의 숙소를 가리켰다.
"여러분은 저곳으로 가시면 됩니다. 숫자는 읽으실 줄 아시죠?"
그 말에 패를 받아든 중년 사내가 패에 적혀있는 글자와 숫자를 확인하고 안내해주는 젊은 사내에게 물어보았다.
"읽을 줄 아는디 아-1-1은 무슨 의미여?"
그러자 젊은 사내는 손을 들어 목욕탕 주위에 있는 한 2층 목조 건물을 가리키며 이야기했다.
"아는 건물 이름인데 저곳으로 가시면 되고요. 가운데 1은 1층이란 소리고 맨 뒤에 1은 1호실이라는 뜻입니다. 건물은 개척촌의 숙소와 비슷한 구조로 되어있어요."
"아하. 그렇구만. 헌데 개척촌의 숙소는 한 방을 2명이서 같이 쓰지 않던가?"
이에 젊은 사내는 살짝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주민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렇긴 하죠. 다만 이곳은 임시로 머무는 숙소다 보니 방 하나에 4명이 들어가 자는 겁니다. 좀 불편하시겠지만 잠시만 참아주세요. 조금 쉬시다 보면 바로 새로운 숙소로 안내해 드릴 겁니다. 혹시 질문 있으십니까?"
그러자 이주민 뒤쪽에 있던 한 장년의 사내가 질문을 던졌다.
"자네 조선인 맞는감?"
그 질문에 젊은 사내는 잠시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젊은 사내는 자신은 이제 조선인이 아닌 북미인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를 지금 설명하기엔 시간이 촉박했기에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조선인이라...일단 저도 출신은 조선인입니다. 개척촌에서 2년 전에 이곳으로 왔으니까요."
"헌데 이곳 사람들은 머리 모양도 그렇고 복식도 다른데 우리도 따라 해야 하는감?"
그 질문에 이주민들이 살짝 긴장하는 것을 느낀 젊은 사내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딱히 강제하진 않습니다. 편한 대로 하세요. 다만 개척촌보다 이곳에서는 위생에 더욱 신경 쓰셔야 합니다. 그 부분은 배에서 선원들이 미리 일러줬을 테지요?"
"그렇긴 한디..."
"그래서 이곳에서 지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머리를 자르게 됩니다. 매일 머리를 감고 상투를 트는 것보다는 편하니까요."
"으음..."
"그리고 지금도 느끼실 겁니다만...조선보단 이곳 기온이 더 높아요. 덥거든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머리도 자르고 복식도 좀 가벼워지고 그런 겁니다. 누가 강제한다기보단 편해서 자연스럽게 바뀐 겁니다만 불편하시면 굳이 따라 하지 않으셔도 돼요."
안내인인 젊은 사내가 강제성은 없다고 다시 한번 확인해주자 살짝 경직되어 있던 이주민들의 표정이 풀렸다.
"아하."
젊은 사내는 슬슬 해가 질 무렵임을 깨닫고 바로 입을 열었다.
"아. 일단 궁금한 점은 나중에 물어보세요. 더 늦어지면 식사시간이 늦어지겠네요. 일단 숙소를 배정받으신 분은 바로 들어가 계세요."
* * *
이번에 이주 선단을 통해 이곳 북미 땅을 밟은 이주민들은 5천이 살짝 넘었다.
다행히 새로 조성한 구역이 꽤 넓은 편이긴 했지만 계속해서 이 5천 명이 이곳에서 머무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이들의 소속을 배정하여 분산시키기 위해 관리들이 일에 치여 살았다.
동시에 정성국 역시 개척촌에서 보내온 각종 보고서를 확인하느라 바빴고.
개척촌에서 보내온 보고서 가운데 정성국이 가장 흥미롭게 읽은 보고서는 바로 박기동이 보낸 트랙터에 관한 보고서였다.
박기동은 일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정성국이 개척촌을 떠나기 전에 그에게 슬쩍 이야기 한 트랙터에 관한 연구를 개인적으로 해왔나 보다.
그리고 이 연구에 약간의 진척이 있어 그에 관한 내용을 정성국에게 보냈고.
정성국은 이를 자세히 읽어보고 트랙터보다는 오히려 증기기관차를 떠올렸다.
'비록 설계뿐이지만 충분히 가능성 있어 보이긴 하네. 문제라면 트랙터는 증기기관의 소형화가 필요한 만큼 아직은 어려울 테고...오히려 극도로 소형화할 필요가 없는 증기기관차를 우선 만들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특히 무슨 일이 있어도 텍사스는 확보할 생각이니 그때를 대비해서 지금부터 증기기관차를 만들어 운용하면서 기술력을 확보하는 것도 괜찮겠군.'
정성국은 북미왕국을 캘리포니아 왕국으로 만들 생각이 없었고 그런 만큼 일차적인 목표는 바로 텍사스였다.
이곳을 확보해야 멕시코만을 통해 대서양으로 진출이 가능하니 말이다.
더불어 텍사스에 있는 수많은 석유도 확보할 수 있고 아직은 어떠한 유럽 세력도 없는 상황이었으니.
문제라면 텍사스까지 진출한다고 해도 그곳에 도시를 세우려면 필요한 각종 물자의 운송이다.
대량의 물자를 운송하는 데는 선박만 한 것이 없긴 한데 아직 파나마 운하가 없는 시기이다 보니 이곳 새김포에서 물자를 싣고 텍사스까지 가려면 남미를 빙 돌아가야 하는 만큼 최소 2.8만km를 이동해야 했다.
거기에 남미는 적대적인 누에바 에스파냐의 땅이었고.
그런 만큼 선박으로 물자를 운송하긴 현실적으로 어려웠고 결국 내륙으로 물자를 운송해야 하는 만큼 아직 말과 소의 숫자도 많은 편이 아니라 철도의 개발이 필수였다.
'문제는 선로를 깔기 위해 들어가는 막대한 강철의 생산이 문제일까?'
현재 새마포 남쪽에 조그마한 제철소를 만들고 강철을 뽑아내고 있긴 하지만 생산량이 많지는 않았다.
당장 북미왕국에서 사용하는 철의 생산량을 간신히 감당하는 정도이다 보니 선로의 생산은 꿈도 꾸기 어려웠다.
'일단 내년까지는 철 생산량을 증대시키는 데 집중해야겠군. 철광과 탄광에도 사람의 투입을 더 늘리고 제철소도 확장하고. 그렇게 철 생산량을 늘리면서 꾸준하게 선로를 생산해 저장해둬야겠다.'
이곳에서 텍사스까지의 거리를 생각해보면 철로를 깔면서 들어가는 철의 양이 장난이 아닐 것을 짐작한 정성국이었다.
그런 만큼 미리 철의 생산량을 늘리면서 여유가 되는 강철을 선로로 만들어 저장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나마 외무청에 소속된 대추장들의 활동 덕분에 꾸준히 원주민들이 합류하고 있어 광부의 수를 손쉽게 늘릴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정성국은 결정을 내린 김에 제철소의 확장과 광부의 수를 늘려 철의 생산량을 높이라는 명령이 담긴 서류를 작성해 한쪽에 놓아둔 후 다른 보고서를 읽어보고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하삼도엔 고구마가, 강원도와 한성 이북에는 감자가 꽤 퍼졌다라...나쁘진 않은데 과연 이걸로 경신대기근을 막을 수는 없을테고...그나마 피해가 줄어들면 다행이겠지.'
정성국은 원상을 통해 하삼도에는 고구마를, 그리고 한성 이북의 황해도와 평안도, 강원도에는 감자를 퍼트렸다.
앞으로 7년 후에 조선에 닥칠 경신 대기근 때 얼마나 많은 조선인이 굶어 죽는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성국의 처지에서 이 경신 대기근 때 굶어 죽는 100만이 넘는 조선인들을 몽땅 이 북미왕국으로 이주시켰으면 참 좋겠지만 그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산술적으로만 계산했을 때 경신 대기근은 2년에 걸친 대기근인 만큼 1년에 50만에 가까운 조선인을 북미 땅으로 이주시키려면 지급 함선 기준으로 무려 1천 척이 필요했으니까.
물론 이 경신 대기근 전까지 정성국은 최대한 많은 배를 건조할 생각이지만 그래도 한계는 명확했다.
거기에 이곳 북미왕국의 식량 생산량이 늘어나면 이곳에서도 쌀을 운반할 계획이긴 하지만 역시나 운송량의 한계가 있는 만큼 조선의 식량 생산도 늘릴 필요가 있었다.
해서 정성국은 원상을 통해 곳곳에 적당히 땅을 사들인 후 이곳의 소작농들에게 새로운 작물을 심게 해서 조선에 감자와 고구마를 퍼트렸다.
이를 통해 굶어 죽는 조선인들의 피해가 그나마 줄어들길 바라면서.
'다만 경신 대기근 때는 이상기온 때문에 심었던 작물이 몽땅 죽어서 기근이 생기는 거로 알고 있으니 감자는 몰라도 고구마는 그다지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은데...뭐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