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총독 어르신! 강녕하셨습니까!"
"오랜만이군. 선장."
천급 함선에서 가장 먼저 내린 김봉길 선장이 정성국을 보고 몹시 반가워하며 정성국의 안부를 물었다.
정성국이 오랜만에 보는 김봉길을 보고 피식 웃으며 받아주었을 때 정성국의 뒤쪽에 자리하고 있던 호위대장이 김봉길을 보고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허! 이젠 전하라고 부르시게."
"예? 오오! 드디어!"
김봉길은 호위대장의 말에 잠시 멈칫하다가 그 말의 의미를 깨닫고 탄성을 질렀다.
드디어 이곳에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는 뜻 아닌가.
김봉길도 어리석은 인사가 아닌 만큼 정성국이 이곳에서 새로운 나라를 세우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측하였다.
그리고 김봉길은 하루빨리 정성국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길 바라고 있기도 했다.
아무리 원상에서 조정대신들에게 뇌물을 먹여가며 개척촌을 유지하고 있다고 해도 언제 상황이 바뀔지는 아무도 몰랐다.
현재 개척촌의 실체를 아는 조정대신들이나 수령들은 개척촌을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생각하고 있기에 내버려 두고 있지만 분명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이득임을 알면서도 욕심 때문에 거위의 배를 가르는 경우가 없지는 않으니까.
허나 고작 이곳에 도착한 지 3년 만에 새로운 나라를 세울 줄은 몰랐다.
'새로운 나라를 건국했을 정도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는 뜻이니...이 기회에 우리 가족들도 이주를 하는 게 좋을까? 천급이라면 우리 아들 녀석도 뱃길을 감당할 수 있을 것도 같고...'
지금까지는 지급 함선밖에 없었기에 배 위에서 보내는 시간이 오래 걸리기에 아무래도 건장한 사람 위주로 이주민을 선발해 보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천급 함선의 건조로 인해 항해시간이 획기적으로 줄어든 만큼 아이나 노인들도 이주할 수 없을 것 같지는 않았다.
김봉길은 이곳에 이주했던 이주민들의 반응을 통해 이곳에서의 생활이 나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만큼 내년에는 자신들의 가족을 이주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동시에 괜한 말을 했다며 호위대장을 타박하는 정성국이 왕이라는 사실이 떠오르자 김봉길은 곧장 엎드려 절을 할 기세였다.
정성국은 그런 김봉길을 보고 혀를 차며 그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쯧쯧. 됐네. 그냥 호칭만 바뀐 거라고 생각하게. 괜히 과한 예를 차릴 필요는 없어. 그것보다 자네 결국 저 천급 함선의 선장 자리를 차지한 건가?"
그런 정성국의 말에도 왕이라는 말에 살짝 긴장한 김봉길이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사옵니다! 전하!"
"쓰읍! 하던 대로 하라니까."
정성국이 김봉길을 째려보면서 단호하게 말하자 분위기를 살핀 김봉길은 고개를 끄덕였다.
"헤헤. 아무래도 새로 건조한 함선이다 보니 노련한 선장이 필요한지라...개척촌에서 저보다 노련한 선장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그래. 헌데 왜 같이 온 건가? 생각보다 천급 함선의 속도가 나오지 않던가?"
심각한 표정으로 김봉길을 바라보는 정성국의 물음에 김봉길은 고개와 손을 동시에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그건. 생각외로 무시무시하게 빠르던데요? 바람을 잘만 타면 15노트까지 나오더군요. 이 배는 정말 빠르더군요."
그런 김봉길의 답변에 정성국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래? 예상했던 속도가 나온단 말이지?"
"예. 적당히 바람만 불면 10노트는 가볍게 나오긴 하더군요. 지급 함선은 차마 못 따라오더군요."
그거야 당연하다는 듯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고기의 모양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해 선수가 뭉뚝한 갤리온의 설계도를 본떠 만든 지급 함선과 함선의 건조기술이 발달하면서 선수가 V자 형태를 띠게 된 클리퍼의 형상을 본떠 만든 천급 함선이었으니.
거기에 선체 모양뿐만 아니라 천급 함선은 마스트도 훨씬 많았고.
"결국 두 배의 속도가 전혀 다르다는 건데...어떻게 같이 도착한건가?"
"아. 봉길 섬에서 이곳으로 올 때 일부로 속도를 늦추어 함께 이동했습니다."
"음? 봉길 섬?"
의아한 표정을 짓는 정성국을 향해 김봉길이 자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예. 이번에 이곳으로 이주하는 이주민들이 워낙 많다 보니...한꺼번에 식량 조달하기가 쉽지 않을 것은 명확했습니다. 작년에도 그러지 않았습니까. 해서 제가 천급 함선에 봉길 섬에 정착할 이주민들과 물자를 싣고 한발 먼저 봉길섬에 도착해 식량을 조달하며 나중에 도착할 지급 함선을 기다렸고 그들과 함께 이곳으로 온 겁니다."
"그런가?"
"예. 전하."
김봉길의 설명을 듣고 정성국은 시선을 돌려 기다란 천급 함선을 바라보며 아쉬움을 표했다.
"천급 함선이 건조되고 나면 1년에 2번 오갈 수 있다고 생각했더니...좀 아쉽군."
"지금이라도 제가 바로 개척촌으로 갔다 다시 올까요?"
웃으며 이야기하는 김봉길을 보며 정성국은 피식 웃었다.
"됐네. 이 사람아.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하긴."
"헤헤. 내년에 천급 함선이 늘어나면 따로따로 선단을 구성해 움직일 테니 전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2차례 오고 갈 수 있을 겁니다."
"알겠네. 일단 이동하지."
천급 함선을 따라온 10척에 지급 함선들이 선착장에 하나둘 정박하면서 곧 이곳이 혼잡해질 거라고 생각한 정성국은 일단 김봉길을 통해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기에 그를 끌고 마차에 올라탔다.
김봉길은 조선에선 보기 힘든 마차를 보고 신기한 듯 안을 확인하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 정성국이 궁금해하던 여러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잠깐. 아이누인들이 홋카이도에서 왜놈들을 모두 몰아냈다고?"
정성국의 물음에 김봉길은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자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예. 홋카이도에 사는 아이누인들을 왜놈들이 수탈하려 했고 이에 아이누인들이 일제히 봉기했었습니다. 워상에서 무기와 식량을 지원해 준 덕분인지 그들을 물리쳤고요."
김봉길의 대답을 듣고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 이후의 상황을 물었다.
"허나 막부에서 홋카이도를 그냥 내버려 둘리가 없었을 텐데?"
"예. 올해 봄에 본토에서 주변 지역의 병사들을 지원해줬답니다. 그리고 칸누이라는 곳에서 왜놈들과 제대로 한판 붙었는데 이 전투에서도 아이누인들이 승리했답니다."
김봉길의 답변이 만족스러운지 미소를 띤 정성국이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래? 본토에서 보낸 지원부대와 말이지?"
"예. 포로나이에서 듣기로는 투로시노가 이끄는 신식소총으로 무장한 부대가 맹활약했답니다. 덕분에 아주 손쉽게 이겼다더군요."
이에 정성국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제 몫을 해준 모양이군. 다행이야. 만약 이번 전투에서 패했다면 홋카이도의 아이누인들이 흔들릴 수도 있었을뿐더러 이를 막으려면 더 많은 지원을 해야 할 테니 무척 골치 아팠을 텐데.'
그렇게 생각한 정성국은 왜놈들이 아이누인들에게 깨진 것이 통쾌하다는 듯 무척 흥분한 김봉길을 보고 피식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래? 신식소총을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싶긴 한데...그래도 박경수가 아이누인들을 제대로 훈련을 시킨 모양이군."
"예. 그런 것 같습니다."
"그 후엔 어떻게 되었는가?"
정성국의 물음에 김봉길은 신이 나서 계속해서 설명했다.
"본토에서 지원 나온 부대를 손쉽게 이겼으니 기세를 탄 아이누인들이 그대로 남하해서 홋카이도에 왜놈들의 근거지인 와진치를 그대로 들이쳤답니다. 그 기세에 눌린 왜인들은 감히 저항하지 못했다더군요. 다만 마쓰마에 성에 남아있던 병력이 성에 틀어박혀 농성을 했고 결국 마쓰마에 성을 장악하긴 했지만 이때 아이누인들도 좀 상한 모양입니다."
결국, 왜놈들에게 승리했다는 사실에 무척 기뻐하는 김봉길과는 달리 정성국은 아이누인들의 피해가 좀 있다는 소식에 안색을 찌푸렸다.
'막부가 고작 한번 깨졌다고 에조를 포기할 것 같지는 않은데...아이누인들의 피해가 적어야 할텐데...'
"끙...설마 신식소총으로 무장한 부대도?"
정성국의 안색을 보고 김봉길도 분위기를 눈치챈 것인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별로 피해를 보지는 않았답니다."
이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정성국이었다.
"휴우. 그건 다행이군. 허면 저항하지 않은 왜인들은?"
아무래도 지금까지 아이누인들이 왜인들에게 지속해서 당한 것이 있었기에 혹시 그들에게 화풀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정성국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김봉길에게 물었다.
하지만 김봉길은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포로나이에 도착했을 때 들었던 소식이 거기까지입니다."
"그렇군."
정성국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그동안 아이누인들이 왜인들에게 당한 것이 있긴 하지만...그렇다고 저항하지 않는 왜인들을 어떻게 하진 않겠지.‘
당장 걱정해봐야 바뀔 것은 없었기에 정성국은 이야기의 주제를 바꾸었다.
“아이누인들의 이야기는 다 한 것 같으니 일단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세. 천급 함선을 몰아보니 어떤가?”
“정말 좋은 배입니다. 속도도 빠르고. 천급 함선이 더 많아지면 좋겠군요.”
“다음엔 천급 함선끼리 선단을 구성해 항해할 거라고 했었지? 자네가 생각하기에 천급 함선으로 구성된 선단이라면 개척촌에서 이곳까지 오는 데는 얼마나 걸리겠는가?”
정성국의 물음에 김봉길은 머릿속으로 잠시 계산하는 듯 보이다가 확실하지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마 25일 정도로 잡으면 될 것 같습니다. 다만 무리한다면야 20일까지도 가능할 겁니다. 항구에서 휴식을 최대한 배제한다면 말입니다.”
김봉길의 답변에 정성국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기존의 지급 함선을 이용해서 개척촌에서 이곳 새김포까지 걸리는 항해일수가 45일 내외.
헌데 천급 함선을 이용하면 거의 절반으로 줄어든다는 셈이니.
그러다 정성국은 자신이 잊고 있었던 사실을 깨닫고 급히 김봉길에게 물어보았다.
“혹시 기동이 녀석이 만든 기선은 어찌 되었는가?”
그러자 김봉길이 손뼉을 치며 감탄스럽다는 어조로 대답하기 시작했다.
“그 돛대 하나 없는 기선 말씀이시죠? 현재 시험운항 중이긴 한데...제가 보기엔 쓸만해 보이더군요.”
정성국은 김봉길의 답변에 반색하며 되물었다.
“그래? 시험운항 중이라고?”
“예. 증기기관을 2개를 달아서 그런지 확실히 빠르더군요. 물론 배의 모양도 지급 함선이라기보단 천급 함선의 축소형에 가까워 속도가 더 나오는 것 같긴 합니다만...아무튼. 최고 12노트까지도 나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들 놀랐지요. 돛도 없이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배가 그렇게 빨라서 말입니다. 다만 기동이가 이야기하기를 그건 보일러에 무리가 가는지라 평상시엔 10노트를 꾸준히 유지하는 것이 한계라고 하더군요.”
정성국은 박기동이 새로 건조한 배의 성능이 만족스러운지 미소를 지었다.
“허어. 그것만 해도 어딘가. 지금 지급 함선의 속도를 생각해보면...”
“예. 그렇긴 합니다. 해서 기동이 녀석은 아예 지급 함선을 기범선으로 몽땅 개조하자고 주장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문제는 중간에 연료를 보급할 항구가 문제겠군?”
“예. 그 부분 때문에 일단 기선의 시험운항을 겸해서 아이누 섬과 카무이 반도를 계속 오가면서 그곳에 새로운 항구를 만들고 연료를 적재해두기로 했습니다만...문제는 봉길섬의 연료 보급과 더불어 봉길섬과 새김포 사이에 머물 항구겠지요.”
“그건 걱정말게. 일단 새남포라고 위쪽에 새로운 항구를 건설하고 있으니.”
이미 중간에 정박할 항구를 건설하고 있다는 사실에 김봉길이 반색했다.
“오! 그렇습니까?”
“문제는 봉길섬이군. 이곳에서 연료를 보급하기엔 남는 배가 별로 없어. 허니 봉길섬의 연료 보급은 그쪽에서 해결해야 할 것 같아.”
“알겠습니다. 그리 전하겠습니다.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