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을 탈출하라-55화 (55/850)

55화

정성국이 북미에 새로운 나라를 건국했고 그 이름을 북미왕국으로 결정했다는 사실은 행정청과 개발청을 통해 순식간에 북미왕국 전역으로 알려졌다.

원주민들이야 그냥 여러 부족이 합쳐지면서 부르던 부족연맹의 새로운 이름이라고 생각했기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그리고 이런 반응은 이주민들 역시 비슷했다.

애초에 지금까지 북미에 도착한 이주민들은 원상에 소속되어 정성국을 굳게 믿고 따르던 사람들이었다.

그렇기에 고향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조선인들과는 달리 조선을 떠나 바다를 건너 이곳 북미까지 기꺼이 이주했고.

이곳의 생활에 꽤 만족해하고 있었다.

거기에 정성국이 나서서 상투를 자르고 덥다는 이유로 은근슬쩍 복식을 조금씩 바꾸는 것을 보고 정성국이 조선과는 선을 긋고 있다는 것과 이곳은 조선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건국 소식이 들려오자 이주민들은 올 것이 왔다는 반응과 함께 나라 이름이 좀 특이하다고 투덜거리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어색하다는 이유로 상투를 고집하던 소수의 인물도 하나둘 이발소를 방문해 머리를 자르기 시작했고 익숙하다는 이유로 조선의 복식을 고집하던 이주민들도 하나둘 정성국이 입고 다니는 것과 비슷한 복식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이젠 조선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주민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자 원주민들도 자신들은 이제부턴 북미왕국의 사람이라면서 따라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런 반응에 정성국은 이 기회에 땋은 머리나 얹은 머리 일색인 여성들의 머리 모양도 바꾸고 싶어했고 결국 하얀 들꽃을 꼬드겼다.

남성들에게는 정성국이라는 본보기가 존재했지만, 여성들에게는 제대로 된 본보기가 없었기에 급격히 모습이 변한 남성들과는 달리 여성들은 별반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조선보다는 더운 곳이라 복장이 살짝 간소해졌다는 것 정도랄까.

전아라가 이곳 북미에 있었다면 그녀를 본보기로 삼았겠지만, 현재 그녀는 개척촌의 연구소에 머물고 있었기에 차선으로 하얀 들꽃을 선택했다.

하얀 들꽃은 대추장의 자식이자 정성국을 돕는 뛰어난 여인으로 알려졌기에 원주민 여성 뿐만 아니라 조선 여성들에게도 나름의 영향력이 있었으니 말이다.

정성국은 이발소에서 일하는 사람 중에 손재주가 뛰어난 사람 몇을 추려서 미용실을 만들고 그곳을 하얀 들꽃과 함께 방문한 후 그녀를 설득해 결국 그녀의 머리 모양을 원주민 특유의 땋은 머리에서 그가 기억하는 단발머리로 바꾸게 되었다.

처음은 어색해하던 하얀 들꽃도 정성국의 입에 발린 칭찬에 만족스러워하며 자신감 있게 시내를 돌아다녔고 이런 색다른 머리 모양에 여러 여성이 관심을 두게 되었고 곧 그녀들은 미용실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정성국이 여성들을 위해 만들었다는 미용실에 호기심을 갖고 방문한 여성들은 결국 미용사의 조언에 따라 자신의 머리를 풀고 하얀 들꽃처럼 단발머리나 조금 긴 생머리 스타일을 하게 되었다.

* * *

건국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3일간 축제를 연다는 소식과 함께 행정청에서 풍족하게 음식과 술을 풀기 시작하니 조선인들은 물론이고 원주민들도 환호하며 축제를 즐기기 시작했다.

특히나 이번에 합류하게 된 요쿠츠 족의 경우는 새마포와 가까운 곳에 있는 부족들은 그나마 교역을 통해 여러 다양한 음식과 술을 접할 수 있었지만, 내륙 깊숙이 자리를 잡은 부족들은 상황이 달랐다.

그것을 알고 있던 행정청은 가용할 수 있는 모든 말과 소를 동원해서 축제를 즐길 수 있게 다양한 식량과 술을 운반했고 덕분에 내륙 깊숙이 자리를 잡고 있던 부족들도 이 북미왕국에 소속되는 것이 자신들에게 이득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동시에 동물을 사육해 이동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나 이런 다양한 식량을 넉넉히 제공하는 것을 보면서 북미왕국의 힘과 경제력이 강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을 따르면 이런 맛있는 음식들을 가끔은 먹을 수 있겠다는 기대감에 북미왕국에 소속감을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 * *

회의실에서 청장들이 모여 정기회의 도중에 군사청장이 한 말에 차분한 표정을 짓고 있던 정성국은 턱을 매만지며 되물었다.

"궁궐?"

"예. 제대로 된 궁궐을 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나라를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한들 최소한 구색은 갖춰야 하지 않겠습니까? 언제까지 전하께서 이곳에서 집무를 보는 것도 보기 안 좋습니다."

그런 군사청장의 발언에 다른 청장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정성국은 군사청의 건물 2층을 빌려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처음 이곳 새김포에 여러 부서가 사용할 2층짜리 목조 건물들을 지었을 때 정성국은 따로 자신이 사용할 건물을 짓는 것보다는 군사청이 사용할 건물에 세 들어 사는 것을 선택했다.

당시에는 그나마 군사청에서 사용하는 공간이 가장 적어 2층의 공간이 남았기 때문이었다.

허나 슬슬 군사청에 소속된 인원이 증가하기 시작하면서 군사청의 여러 행정 업무를 처리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기 시작했고 덕분에 1층은 비좁아지기 시작했다.

이를 알고 있던 정성국 역시 슬슬 자신이 사용할 새로운 건물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이에 자신이 사용할 건물의 건축에 대해 슬쩍 운을 떼자 군사청장은 그럴 바엔 아예 궁궐을 새로 짓자는 의견을 내비친 것이다.

하지만 정성국은 회의적이었다.

정성국 역시 수많은 보고를 듣고 최종결재를 하는 입장이었기에 현재 개발청의 여력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럴듯한 궁궐을 지으면 나쁠 것은 없겠지만 지금 진행하고 있는 밭의 개간이나 항구 도시 건설에 비하면 우선순위가 낮을 수밖에.

이에 정성국은 개발청장을 바라보며 그에게 물었다.

"글쎄? 궁궐을 지을 여력이 있긴 한가?"

정성국의 물음에 개발청장은 지금은 곤란하다는 듯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으음...당장은 어렵습니다. 물론 지금 진행하고 있는 새남포의 개발이나 새한강을 따라 개간하는 일을 미룬다면 가능하겠습니다만..."

"말도 안 되는 소리."

개발청장의 대답을 단호하게 끊어버리는 정성국을 보고 움찔한 군사청장은 옆에 있던 관리청장을 바라보고 다시 입을 열었다.

"관리청에 물자가 좀 남아있는 것으로 아는데 그 물자를 이용해서 사람들을 새로 고용하면..."

그러자 잠시 고민하던 관리청장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음...그 물자들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남겨둔 것들입니다. 거기에 요새 외무청 소속분들이 워낙 왕성하게 활동하다 보니 물자가 간당간당해요. 그냥 이 주위에 건물을 한 채 짓는 게 아니라 넓은 공간을 확보해서 제대로 터를 다지고 궁궐을 짓는 것은 어렵습니다. 거기에 제대로 궁궐을 지으려면 결국 개발청의 인력이 필요합니다."

"끙..."

관리청장의 대답에 실망하는 군사청장이었지만 정성국은 오히려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런 2층 목조 건물을 지을 여력은 있지?"

"예. 그 정도야 가능합니다."

"그럼 개발청의 도움을 받아서 2층 목조 건물을 하나 이 근처에 짓도록 하지. 그 건물을 내가 사용하는 것으로 하고."

그러자 듣고 있던 개발청장의 정성국을 보고 새로 지을 건물에 관해 묻기 시작했다.

"허면 어떤 구조로 만들까요?"

"1층은 조금 커다란 회의실과 호위대원들이 머무는 공간으로 하고 2층은 내 집무실과 침실을 만들도록 하게."

새로 지을 2층 목조 건물을 자신의 궁궐로 삼겠다는 의도가 보이는 정성국의 답변에 개발청장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사치하지 않겠다는 정성국의 의도는 좋지만 한 국가의 왕이 지내는 건물이 너무 초라하면 면이 서질 않는 법이다.

행정청장 역시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정성국을 보고 살짝 불만 섞인 어조로 대답했다.

"아주 소박한 궁이 되겠군요."

이에 정성국은 어깨를 으쓱하며 행정청장을 보고 대답했다.

"뭐 당장 여력이 없는데 어쩌겠어.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짓자고."

그러나 행정청장은 정성국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대답했다.

"허나 이건 생각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뭘 말인가?"

"시간이 흐른다고 여유가 생길 것 같지는 않다는 거죠. 이곳은 개발할 곳이 넘쳐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궁궐을 짓겠다고 하시면..."

"끙...그건 그렇지."

행정청장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에 정성국은 한숨을 내쉬며 수긍했다.

일단 당장은 새남포의 개발과 새한강 유역의 개발이 더 시급하니 미루겠다는 뜻은 알겠는데 과연 그 개발이 끝나면 다른 일이 생기지 않을 것 같냐는 행정청장의 말에 아무런 말을 할 수 없는 정성국이었다.

당장 새남포의 개발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이번에 합류한 요쿠츠 족의 영역 남쪽에 새로운 거점을 하나 만들 생각이기도 했고.

이 새로운 거점을 만든 이후엔 시기를 봐서 동쪽으로 탐사대를 보내 영역을 확장할 생각이니 나중이라고 여유가 생길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수많은 일거리가 생겨나겠지.

"허니 당장 전하께서 사용할 건물을 짓는 것과는 별개로 제대로 된 궁궐을 지을 준비는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당장은 다른 국가와 제대로 된 교류를 하고 있지 않으니 상관은 없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설마 외국의 사신을 이런 조그마한 건물에서 맞이할 생각은 아니시지요?"

"흐음..."

"그리고 애초에 새김포는 이주민들을 받아들이는 관문 도시로 사용할 예정 아니셨습니까? 허니 이 기회에 제대로 된 궁궐을 짓고 그 주변에 도시를 건설해야 한다고 봅니다. 즉, 수도를 건설해야 합니다."

행정청장의 말에 회의실에 있던 청장 대부분은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성국 역시 행정청장의 의견엔 동의했다.

새김포는 이주민들을 일차적으로 받아들이는 역할을 위해 건설된 도시였다.

헌데 정성국을 비롯해 여러 청의 건물이 새김포에 들어서면서 어느덧 새김포가 수도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인구가 집중될 기미가 보였다.

그나마 개척단에 소속된 사람들을 새마포 지역을 비롯한 주변으로 계속해서 내보내고 있기는 하지만 새로운 것을 찾아 이곳을 방문했다가 눌러앉는 원주민 젊은이들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였다.

예전에야 다른 부족으로 인식하고 있었기에 출입을 통제하거나 쫓아낼 수 있었지만 이젠 그것도 쉽지 않았고.

덕분에 혹시 문제라도 생길까 봐 얼마 후 도착할 이주 선단이 정박할 선착장과 그들이 잠시 머물 장소를 새김포 북쪽에 다시 새로 만들기도 했다.

동시에 새로 만든 선착장과 숙소 주변에 목책을 둘러 혹시 모를 원주민들의 출입을 막아두었다.

'확실히 계속 이곳에 머물면 새김포의 인구가 계속 늘어날 거야. 가뜩이나 대추장들이 친분이 있는 주변 부족들을 북미왕국에 하나둘 합류시키고 있는 상황에서 곧 새로운 선박이 건조되면 더 많은 조선인이 이곳에 들이닥칠 테지. 결국, 이건 미룰 문제가 아니라는 거네.'

그렇게 새로운 수도의 건설을 결정한 정성국은 고개를 돌려 개발청장을 바라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이 일을 도맡아 진행해야 할 개발청장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있었다.

가뜩이나 일이 많은 상황에서 수도에 걸맞은 도시를 건설하려면 고생을 넘어 과로사할 수도 있었으니.

이에 정성국은 그의 부담을 덜어줄 겸 입을 열었다.

"행정청장의 말이 일리가 있으니 내가 이곳에서 머물 건물을 짓는 것과는 별개로 새로운 궁궐을 지을 준비도 하도록 하지. 다만 당장은 손이 부족한 상황이니 개발청에서는 일단 새로 지을 궁궐이 들어설 위치 정도만 정하도록 하게. 그 외에는 곧 개척촌에서 새로운 이주민들이 도착하고 나면 인력을 충원하든 아니면 새로운 부서를 만들어서 진행하도록 하지."

정성국의 말에 안도한 기색이 역력한 개발청장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예.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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