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저 멀리 바다가 어렴풋이 보이는 해안가 근처 평지에서 양측이 대치하고 있었다.
아이누인의 진형은 샤쿠샤인이 지휘하는 방패로 무장한 아이누인들이 앞열에서 죽 늘어서 있었고 바로 그 뒤에 신식소총으로 무장한 아이누인들이 일렬로 죽 늘어서 있었다.
화력의 집중도를 생각하면 2열이나 3열로 서서 차례대로 사격을 하는 게 맞겠지만 그들의 앞을 촘촘히 막고 있는 방패병들 때문에 일단 일렬로 서고 대신 부대원들에게 숫자를 지정하고 홀수와 짝수로 나누어 교대로 사격하는 방식을 채택한 박경수였다.
그 뒤로 활을 든 아이누인들이 죽 늘어서 있었고.
양옆으로는 창으로 무장한 수많은 아이누인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왜인들은 가운데에는 철포로 무장한 병력이 죽 늘어서 있었고 양옆으로는 기마병들이 보였다.
그 뒤쪽에는 일반 병사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
포진을 볼 때 이런 평원에서의 전투는 아이누인들에게 결코 패배할리 없다는 적 지휘관의 생각이 여실히 느껴졌다.
철포병으로 아이누인이 밀집한 본대를 타격하다가 아이누인들이 도망치기 시작하면 기마병들로 추격하겠다는 의도가 명확하게 보이는 포진이랄까.
그것을 깨닫고 저들의 자신감에 혀를 차는 박경수와는 달리 왜인들을 상세하게 살핀 샤쿠샤인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허. 듣던 것보다 저들의 수가 좀 적은 듯한데?"
이에 박경수는 혹시 저들이 우회한 것이 아닐까 싶어 저들의 수를 헤아려보았지만, 저들의 핵심인 철포병이나 기마병의 수는 예상했던 수와 비슷했기에 안도하며 입을 열었다.
"저기 철포병이나 기마병은 그대로 있는 것을 봐서는 아마 본거지인 마쓰마에 성을 방어하기 위해 병력을 좀 남겨둔 듯하군요."
이에 오니비시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것 참...그래도 1만에 가까운 아이누인들이 뭉쳤는데 고작 4천명으로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이건가?"
"뭐 저들이야 언제나 우리를 무시했으니."
"허...저번의 패배는 개의치 않는다는 건가?"
샤쿠샤인의 말에도 오니비시가 점점 분개하기 시작하자 박경수가 입을 열어 그들을 진정시켰다.
"뭘 그리 열을 내십니까. 덕분에 우리에게 유리해진 셈인데요. 이곳에서 저들을 꺾고 그대로 남하해서 이 섬에서 왜인들을 몰아내면 그만입니다."
"흐으. 그거 기대되는군."
그때 왜인 중에 화려한 갑옷을 입고 말에 올라탄 사람이 보였기에 박경수는 그를 가리키며 혹시 정체를 아느냐고 물었다.
"저자는?"
이에 샤쿠샤인이 입을 열었다.
"아마 마쓰마에 야스히로일 걸세. 현 마쓰마에 번주인 마쓰마에 다카히로의 인척으로 저자가 저들의 총대장이라고 들었네."
"그렇군요. 그럼 지금 말을 타고 나오는 자는?"
박경수의 말처럼 갑옷을 입은 한 노인이 말을 타고 아이누인들이 자리 잡은 곳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를 유심히 살펴본 오니비시가 대답했다.
"가키자키 도모히로라는 자로 현 번주를 대신해 주로 번의 정무를 처리하는 자일세."
"흠.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니 일단 협상이라도 하자는 의미일까요?"
투로시노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열자 샤쿠샤인과 오니비시 둘 다 냉소를 지었다.
"흥. 이제 와서? 그리고 저놈들과 협상한다 해도 저들이 그 협상을 지킬 거라 믿을 수가 없네. 그러니 협상은 무의미해. 안 그런가?"
"그렇지. 뭐 이제 와서 저 샤모들과 굳이 교역할 이유도 없고. 그냥 저들을 이 땅에서 다 내쫓는 게 맞아."
가키자키 도모히로는 아이누인들이 자리잡은 근처까지 와서 큰소리로 외치기 시작했고 일본말을 모르는 박경수는 샤쿠샤인을 바라보았다.
"뭐라고 하는 겁니까?"
"이야기 좀 하자는군. 어쩌지?"
이에 오니비시는 뒤쪽에서 활을 받아와 들어 보이며 말했다.
"뭘 어째. 굳이 할 이야기가 있나? 그냥 화살을 날려서 내쫓아 버리지?"
"그럴까?"
과격한 오니비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려는 샤쿠샤인을 보고 박경수는 그들을 달랬다.
"그래도 일단 이야기는 나눠보시죠. 저들이 뭐라고 이야기하는지 한번 들어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뭐 순순히 물러날 것 같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일단 우리의 요구도 전달해야 하니까요."
"요구?"
"예. 이 섬은 우리의 땅이니 물러난다면 살려는 주겠다고요."
"하하하! 그거 마음에 드는군. 내가 나가서 이야기하도록 하지. 저놈에게 받았던 굴욕도 되돌려 줄 겸!"
박경수의 말에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들고 있던 활을 다시 뒤쪽의 아이누인에게 넘긴 오니비시가 앞으로 걸어나갔다.
말을 타고 있는 가키자키 도모히로와는 달리 오니비시는 말이 없었기에 상대를 올려다 보며 대화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박경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곳에도 말과 소를 좀 데려와야겠네. 그나마 조선과 가까우니 다행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협상이 결렬된 것인지 화를 내고 말머리를 돌리는 가키자키 도모히로의 모습이 보였고 곧 오니비시가 터덜터덜 걸어서 돌아오자 그에게 질문하는 샤쿠샤인이었다.
"뭐라고 하던가?"
"죽기 싫으면 자신들에게 세금을 바치라고 하더군. 그래서 개소리 말고 이 섬은 우리의 땅이니 꺼지지 않으면 대가를 치를 거라고 했지. 그러니까 두고 보라면서 화를 내고 돌아가더군."
"흐흐흐. 말 한번 잘했네. 그럼 슬슬 저들이 공격해 들어오려나?"
"그렇겠지. 자신 있소?"
샤쿠샤인과 오니비시는 박경수를 쳐다보았고 박경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감을 나타냈다.
"그럼요. 걱정 마시죠."
"믿겠소."
가키자키 도모히로가 왜인들의 진형에 도착하고 나서 왜인들의 진형이 부산해지기 시작했다.
곧 왜인들이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고 이를 보고 아이누인들이 동요하기 시작했을 때 샤쿠샤인이 큰소리로 외쳤다.
"그동안 우리의 동족을 학살하고 우리를 착취한 저 샤모들이 두려운가!"
""아니다!""
"그동안 저들은 불공정한 교역을 통해 우리의 것을 빼앗은 것도 모자라 이젠 직접 우리를 지배하려 하고 있다! 저들에게 순순히 굴복할 텐가!"
""아니다!""
"그동안 우리는 제대로 된 무기가 없었기에 저 샤모들에게 밀렸을 뿐이다! 이번의 싸움을 통해 저 샤모들을 물리치고 이 땅에서 샤모들을 몰아내자!"
""와아아아!""
샤쿠샤인의 외침으로 아이누인들의 사기가 오르고 동요하던 기색이 사라지자 내심 감탄하면서도 박경수는 왜인들의 거리를 파악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곧 왜인들이 70m 정도까지 다가서자 박경수는 뒤쪽에서 활시위를 당길 준비를 하던 아이누인들에게 외쳤다.
"준비한 대로 화살을 쏴라!"
그러자 아이누인들은 활을 45도로 올리고 하늘로 화살을 날려 보내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내리꽂히는 화살을 막기 위해 방패를 들어 위를 막는 왜놈들을 보면서 박경수는 큰 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부대 조준!"
박경수의 말에 신식소총으로 무장한 부대원들은 일제히 신식소총을 들어 방패 사이로 신식소총을 올려두었다.
"홀수 번호 쏴!"
탕탕탕탕탕
박경수의 명령에 따라 발사된 총알은 그대로 이곳으로 접근하던 철포를 들고 있던 왜인들의 몸속을 파고들었다.
동시에 철포병들 중 일부가 쓰러지며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한 적 진영을 보고 박경수는 아랫배에 힘을 주고 다시 큰소리로 외쳤다.
"홀수 번호 재장전!"
겨우내 조교들의 갈굼을 받아가며 익숙해진 대로 재빠르게 재장전을 시작하는 일부 병사들이었다.
그런 병사들을 바라보며 잠시 왜인들의 진영을 바라보던 박경수는 다시 큰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짝수 번호 쏴!"
탕탕탕탕탕
"짝수 번호 재장전!"
박경수의 명령에 따라 발사된 총알이 왜놈들을 다시 한번 쓰러뜨리자 처음 자신만만한 기색이 역력하던 철포병들은 심각하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일방적으로 자신들이 아이누인들을 공격할 거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현실은 정반대였으니까.
이에 뒤쪽에 자리를 잡고 있던 총대장인 마쓰마에 야스히로가 명령을 내렸고 곧 양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마무사들이 철포병이 재장전하는 시간을 틈타 달려들기 시작했다.
지축을 울리며 달려드는 기마무사들의 위용에 아이누인들은 살짝 동요했고 이를 파악한 샤쿠샤인은 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허나 박경수는 오히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명령을 내렸다.
"홀수 번호 쏴!"
탕탕탕탕탕
"홀수 번호 재장전! 짝수 번호 쏴!"
탕탕탕탕탕
"짝수 번호 재장전!"
박경수의 명령에 따라 훈련받은 대로 별다른 동요 없이 기계적으로 소총을 장전하고 쏴대는 부대원들이었다.
덕분에 총대장인 마쓰마에 야스히로의 명령에 따라 거침없이 달려들던 기마무사들이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고 이를 눈앞에서 지켜본 다른 아이누인들의 사기가 급격하게 올라갔다.
더불어 기마무사들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총탄이 날아들고 있었으니까.
오히려 철포에 익숙한 왜인들이었기에 거의 10초 간격으로 날아드는 수많은 총탄으로 적의 군세를 짐작할 수 있었고 지금 이 돌격은 무리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자연스럽게 기세가 꺾였다.
기세가 꺾인 기마병은 소총부대의 훈련 표적에 가까웠고 결국 그나마 목숨이나마 보전하기 위해 말머리를 돌리는 몇몇을 제외한 기마병 태반이 소총부대에 의해 몰살당했다.
그나마 기마무사가 나서서 아이누인들이 날리는 총알을 감당해주었기에 정신을 차렸던 철포병들도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진행된 사격전에서 결국 패퇴했다.
빼곡하게 방패로 전열을 방어하며 기계적으로 총탄을 쏟아내는 아이누인들과는 달리 곡사로 날아드는 화살과 직사로 날아드는 총알의 콜라보로 인해 정신이 없었던 철포병이 사격전에서 승리할리가 만무했다.
더불어 그들을 지원하러 왔던 아이누 섬의 총으로 무장한 부대가 기마병을 제압하는 모습을 보면서 오니비시는 승리를 직감했고 곧바로 양옆에 창을 들고 기세가 등등하던 아이누인들을 슬금슬금 전진시켰다.
그러다 적 철포병들 태반이 쓰러지면서 왜놈들이 혼란에 빠지자 곧장 명령을 내렸다.
"샤모들을 죽여라!"
""와아아아아!!!""
그동안은 힘이 없어서 샤모들에게 구걸하듯 교역을 해왔었던 아이누인들은 눈앞에서 쓰러지는 왜인들을 보고 눈이 뒤집혀 달려들었다.
믿었던 기마무사를 비롯해 철포병들까지 아이누인들에게 패배하자 동요하기 시작했던 왜인들은 아이누인들의 돌격에 곧장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기색이 역력해보였다.
그나마 뒤쪽에 있던 지휘관들의 강압에 마지못해 창을 들고 아이누인들을 막아서기 시작했던 왜인들이었지만 기세를 탔을뿐더러 숫자도 그들보다 월등히 많은 아이누인들을 감당할 수 없었고 곧 하나둘 도망치기 시작하면서 승부가 갈렸다.
그렇게 원 역사에서는 1669년 7월 철포로 무장한 왜인들을 결국 감당하지 못하고 패퇴해 마쓰마에 번이 에조 지역을 장악하는 단초가 되는 샤쿠샤인의 반란과는 달리 원상의 도움으로 인해 막부의 지원을 받은 마쓰마에 번이 다시 한번 패배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