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정성국은 집무실 의자에 앉아 유리창을 통과한 햇볕을 쬐면서 집무실 책상 위에 올려진 서류를 처리하지 않고 몇십 분째 뚫어지게 바라만 보고 있었다.
하얀 들꽃은 그런 정성국을 보고 조용히 한숨을 내쉰 후 자리에서 일어나 정성국의 곁으로 다가갔다.
"으으음..."
"총독 어르신."
"으으으음..."
조용히 정성국을 부른 하얀 들꽃이었지만 정성국은 듣지 못한 듯 고민이 깊은 표정으로 계속해서 서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정성국이 고민에 빠졌을 때는 그가 생각할 수 있게 조용히 자리를 피해주었던 하얀 들꽃이었지만 그러기엔 옆에 쌓여있는 정성국의 결재가 필요한 서류뭉치가 눈에 걸렸기에 조심스럽게 정성국을 건드렸다.
"저기...총독 어르신!"
"어? 왜?"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눈을 깜박이며 하얀 들꽃을 보는 정성국을 보고 그녀가 조심스럽게 책상 한쪽에 쌓인 보고서를 가리키며 조심스럽게 재촉했다.
"이 보고서들은 빨리 결재를 해 주셔야 합니다만..."
"아. 그랬지. 알았어."
그러면서 몇십 분째 바라만 보았던 서류에 도장을 쾅 찍고 옆으로 치우는 정성국이었다.
그런 그를 잠시 바라보던 하얀 들꽃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총독 어르신.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십니까? 요즈음 업무에 통 집중하지 못하시는 듯 합니다만..."
제대로 서류를 읽지도 않고 무작정 도장을 찍을 기세이던 정성국은 하얀 들꽃의 말에 잠시 도장을 내려놓고 턱을 매만지면서 수긍했다.
"근심이라...하나 있긴 하지."
"어떤 근심이신지...?"
"대충 짐작하고 있지 않나?"
정성국의 근처에서 근무하면서 여러 이야기를 들어왔던 하얀 들꽃이었기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정성국은 저번 정기회의 이후에 평소와는 다르게 일에 집중하지 못하기 시작했다.
이에 저번 정기회의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대충 들었던 하얀 들꽃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음...혹시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문제로 근심하고 계신 겁니까?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게 그렇게 힘든 문제인가요? 나라라는 것이 대부족과는 다른 개념이라고 하더니...총독 어르신이 이렇게 고민하실 줄은 몰랐는데요."
하얀 들꽃의 말을 들은 정성국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음? 아니야. 그건. 나라를 세우는 것이 뭐 어렵겠어. 영토도 있고 나라를 구성할 구성원도 있는데 그냥 세우면 그만이지. 어차피 당장은 구색만 갖출 생각이고."
나라는 마음만 먹는다면 누구나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정성국이었다.
그리고 이 시대에는 그것이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물론 그렇게 나라를 세운다고 해서 다른 국가가 인정하느냐는 별개의 문제였지만.
어차피 당장 국가 간의 교류를 할 생각이 별로 없었던 정성국이었기에 가능한 발상이었다.
'뭐 주변에 제대로 된 국가가 없으니 건국한다고 시비 걸 나라도 없고. 이건 편하군.'
이에 하얀 들꽃이 잠시 인상을 찡그리면서 고민하다가 이주민들의 고향을 떠올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음...그러면 혹시 새로운 나라를 세움으로 인해서 그...조선과의 인연이 끊어질까봐 걱정이신 건가요?"
그러자 정성국은 오히려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전혀. 난 딱히 그곳에 미련은 없는걸. 내가 조선에 미련이 있다면 상투를 자르지도 않았겠지."
"어? 그러면?"
계속해서 잘못 짚는 하얀 들꽃을 보고 정성국은 피식 웃으면서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았다.
"이름 때문이지. 이름. 뭐 어차피 형식상으로나마 국가를 세울 생각이었는데 그렇다고 아무 이름이나 붙일 수는 없잖아?"
"아..."
정성국의 말을 듣고 하얀 들꽃은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며칠을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한 것이 고작 이름이라니.
물론 나라라는 것을 대부족보다도 더 큰 상위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하얀 들꽃이었기에 나라의 이름을 짓는 것이 생각보다 중요하다고는 여겼지만 그렇다고 정성국이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며칠 동안 고민할 필요가 있나 싶은 그녀였다.
그러다 그녀는 문득 정성국이 도시 이름을 붙이는 것에 대해 다른 조선인들이 너무 무성의하게 짓는 것이 아니냐는 소리를 가끔 듣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작명 실력이 별로였기에 이렇게 고민을 하는가보다 싶어 정성국을 보고 안타까운 미소를 짓는 하얀 들꽃이었다.
정성국은 그런 하얀 들꽃의 표정 변화를 보면서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뭐지? 그 표정은."
"아닙니다. 그럼 지금껏 새로운 나라의 이름을 고민하셨던 겁니까?"
왜 자신을 보고 그런 표정을 지은 것인지 묻고 싶었던 정성국이었지만 답해줄 마음이 없어 보이는 하얀 들꽃을 보고 대답했다.
"응. 뭐 내심 결정하기는 했어. 일단 둘 중 하나로 생각하고 있긴 한데..."
"어떤 이름인데요?"
"한, 혹은 미."
"한 족이나 미 족인건가요? 아. 대부족이 아닌 나라 이름이니까..."
"한국이나 미국이 되겠지. 물론 약칭이고."
둘 다 정성국에겐 무척이나 익숙한 이름의 국가로 처음에 정성국은 오히려 이 두 글자는 배제할 생각이었다.
한국의 경우는 정성국이 기억하고 있는 옛 대한민국이 떠오르기도 했을뿐더러 그 이름에서 한민족의 정통성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는데 정성국이 이곳에서 만들려는 국가의 구성원은 한민족만으로 구성할 수가 없기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미국의 경우는 전생을 기억하고 있는 정성국에겐 앞으로 100년 후에 탄생할 국가의 이름을 빼앗는 느낌이었다.
거기에 정성국이 이곳에서 건국할 나라는 훗날 그 주권을 결국 국민에게 되돌려 준다 할지라도 당장은 왕정을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헌데 미국은 공화국 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국가 아닌가.
그러다 보니 미국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처음엔 두 이름은 배제하고 순우리말이나 지명에서 국가 이름을 따올 생각이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정성국이 가장 마음에 드는 순우리말로 지어진 이름이나 지명에서 따서 국가 이름을 만들고 나서 약자를 생각해보니 결국 저 두 이름이 나왔던 것이다.
전생을 기억하고 있던 정성국은 다른 이름을 선택하려고 한참 고민했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이름이 없어서 결국 포기하고 내심 결정을 내렸다.
하얀 들꽃은 정성국의 말을 듣고 살짝 어두운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정성국의 눈치를 살펴보며 물어보았다.
"음...조선 민족의 다른 이름이 한민족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혹시 그래서 한이라는 이름을?"
정성국은 하얀 들꽃의 표정을 보고 화들짝 놀라 손을 저으며 이름의 유래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 그건 아니야. 우리가 말하는 그 한민족의 한은 삼한에서 유래한 건데...뭐 이 역사까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는 것 같고. 아무튼, 거기서 유래한 단어는 아니고. 순우리말 중에 크다를 뜻하는 말이 바로 한 이거든? 그래서 커다란 나라가 되었으면 하는 의미에서 한을 따온 거야. 그래서 한국."
혹시 자신을 비롯한 원주민들이 오해라도 할까 봐 기겁해서 자세히 설명해주는 정성국을 보면서 살포시 미소지은 하얀 들꽃은 남은 이름의 뜻도 물어보았다.
"그럼 미 라는 이름은요?"
"조선인들이 이곳을 뭐라고 부르는지 알지?"
"미주나 북미 대륙이라고 부르던데요. 아. 거기에서?"
"응. 거기에서 따온 단어야."
그러면서 쓴웃음을 지은 정성국이었다.
이건 어떻게 보면 정성국의 편의적인 발상 때문에 생겨난 상황이었다.
정성국이 세계 지도를 만들고 그것을 보여주며 가르칠 때만 해도 정성국은 별생각 없이 이곳을 미주(美洲)라고 이름 붙였다.
정확하게는 아메리카 라고 부르는 것이 맞겠지만 조선사람들에겐 오히려 익숙지 않은 이름이었기에 한자로 음차해서 비슷하게 붙일까 하다가 정성국의 편의에 맞게 그냥 미주 로 이름을 붙여버린 것이다.
원래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훗날 미주, 혹은 미대륙으로 불리게 되는 전생과는 달리 이번엔 정성국이 먼저 이름을 붙여서 미주가 된 셈이다.
그러다 보니 지명에서 나라 이름을 따게 되면 자연스럽게 미국이 되어 버리는 셈이다.
"아. 그렇군요."
정성국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하얀 들꽃이었고 그런 그녀에게 정성국은 넌지시 원주민인 그녀의 의견을 물어보았다.
"하얀 들꽃은 어떤 이름이 마음에 들어?"
그러자 하얀 들꽃은 살짝 정성국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음...말해도 되나요?"
"말해. 내 눈치 보지 말고."
"제가 알기로 이곳을 미주라고 부르는 이유는 아름다운 대자연이 존재하는 땅이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이름 붙였다면서요?"
하얀 들꽃의 말에 정성국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정성국이 지도를 보여주면서 지명을 가르칠 때 그 뜻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대충 둘러댄 말이 바로 저것이었기 때문이다.
헌데 이 둘러댄 말이 원주민에게 퍼지면서 자연을 경외하던 원주민들이 그 이름을 몹시 마음에 들어 하며 자연스럽게 이 땅을 미주라고 부르게 되었으니.
정성국이 지명을 가르칠 때는 아직 미주에는 쌀의 재배는 없을 테니 대충 둘러댄 말이었는데 저렇게 원주민들이 그 이름에 자부심을 품는 것을 볼 때마다 정성국은 묘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그리고 정성국이 이번에 나라 이름을 정하면서 대륙의 이름도 바꾸려다 포기한 이유이기도 했다.
워낙 원주민들이 미주란 이름을 워낙 좋아해서.
'처음부터 크다는 의미에 순우리말인 하나 대륙으로 붙였어야 했는데...누굴 탓하겠어. 내 탓이니 원.'
"전 그런 의미에서 따온 미국이라는 이름이 참 마음에 들어요. 아름다운 대자연이 존재하는 나라라는 의미가 되잖아요? 아! 그렇다고 한국이 싫다거나 그 뜻을 오해하는 것은 절대 아니에요! 오해하지 마세요!"
"알았어. 오해 안 해. 의견 잘 들었어."
혹시 정성국이 오해라도 할까 봐 노심초사하는 하얀 들꽃이었고 그런 그녀를 보고 걱정 말라는 정성국이었다.
'역시나 이곳 원주민들에게는 미국이라는 이름이 더 좋긴 하겠지. 미주라는 이름도 그 뜻을 알고 나선 자부심을 품고 굉장히 좋아하는 만큼. 그리고 뭐 지명에서 본뜬 이름이라 조선인들도 딱히 불만은 없을 테고. 문제는 나인가?'
전생을 기억하고 있는 정성국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차라리 미국이라는 이름이 나쁘지 않았다.
한국의 경우는 예전 중국에 존재했던 국가의 이름이기도 했고 이곳에 이주한 조선 민족의 또 다른 이름이 한민족이라고 알려진 만큼 한국이라는 이름은 아무리 설명을 한다고 한들 오해하기 쉬웠다.
그런 만큼 자신들이 살아가는 대륙의 이름인 미주에서 따온 미국이 낫긴 했다.
'뭐 생각해보면 훗날 건국되는 미국이라는 이름은 그냥 아시아에서 붙인 이름이긴 하지. 엄밀히 100년 후에 영국의 식민지에서 독립할 국가의 정식 명칭은 United States of America인 만큼. 거기에 이미 역사는 바뀌고 있으니 영국 식민지가 과연 독립할지도 모르겠고...뭐 독립하면 걔들은 그냥 합중국으로 부르면 되니 상관은 없나.'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정성국은 결정을 내렸다.
'미국으로 하자. 정식 명칭은 북미 왕국 정도가 되겠네. 그리고 나라 이름대로 북미 땅을 우리의 영역으로 만들어야지. 아예 영문 이름을 Kingdom of North America로 지어서 이 땅의 기득권을 주장해봐?'
그런 생각을 하며 속으로 피식 웃은 정성국이었다.
'어차피 북미 땅을 모두 차지하려면 결국 유럽 애들과의 마찰은 감수해야 하긴 하지만...뭐 교섭을 통해 땅을 사들일 수도 있는 만큼 굳이 영문 이름까지 저렇게 지어서 시비를 걸 필요는 없겠지. 그럼 이 영문 이름은 그냥 나 혼자만 아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