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정성국은 아직 차가운 기운이 맴도는 공기를 들이마시면서 선착장으로 이동했다.
선착장에는 탐사대에 배속된 100톤급 기선이 정박하여 있었고 그곳에서 탐사대원들과 선원들이 짐을 내리고 있었다.
정성국은 잠시 서서 그들의 표정과 옷차림을 살펴보았다.
그들의 얼굴엔 좀 피곤한 기색은 있었지만, 집으로 돌아왔기 때문인지 밝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기에 정성국은 안심했다.
예상보다 이들의 귀환이 많이 늦었기에 혹시 원주민들과 충돌이 있지 않을까 살짝 걱정했기 때문이다.
헌데 이들의 표정을 보아하니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았다.
정성국은 시선을 돌려 그들이 내려둔 짐 옆에서 선원들에게 무어라 이야기하는 한 중년 사내를 확인한 후 그에게 다가갔다.
정성국이 다가가자 선원들이 정성국을 향해 인사했다.
그러자 그들에게 이야기하던 중년 사내는 고개를 돌려 정성국을 확인하고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음? 총독이 여긴 웬일인가."
"웅크린 늑대. 오랜만입니다."
정성국이 반갑게 웃으며 인사하자 탐사대를 따라 함께 이동했던 웅크린 늑대도 미소지으며 인사했다.
"그래. 오랜만이네. 헌데 이곳엔 무슨 일로 온 건가?"
"무슨 일이긴요. 웅크린 늑대가 도착했다길래 마중 나온 겁니다."
정성국의 대답에 웅크린 늑대는 떨떠름한 표정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집무실에서 기다리지 뭐하러 나온 건가."
이에 정성국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뭐 궁금한 게 좀 많으니까요. 웅크린 늑대가 이곳에서 할 일은 별로 없을 것 같은데 저와 함께 가시지요."
"흠. 알겠네. 어차피 보고서를 제출해야 하니."
웅크린 늑대는 내려놓은 짐 중에 가방 하나를 짊어 메고 정성국을 따라 선착장을 빠져나왔다.
그들 앞에 기다리고 있었던 이동수단을 보고 웅크린 늑대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음? 저건..."
"타시죠. 마차랍니다."
선착장 앞에는 2마리의 말이 끄는 4륜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마부석에는 호위대원과 호위대장이 타고 있었고.
말의 숫자가 적어 아직 말에 익숙하지 않은 원주민들이 많았기에 이동수단으로 생각한 것이 바로 마차였다.
이에 정성국은 연구청 소속의 장인들에게 마차의 연구와 제작을 부탁했고.
연구청에서는 먼저 정성국을 위해 마차를 제작했다.
그 마차가 바로 그들의 눈앞에 보이는 2두 마차였다.
정성국이 마차로 다가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웅크린 늑대도 정성국을 따라 마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문을 닫자 곧 마차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마차 안의 모습보다는 마차 문에 달린 투명한 유리창을 신기한 듯 바라보던 웅크린 늑대는 이내 눈앞에 정성국을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이 투명한 녀석은 뭔가?"
"유리라는 겁니다. 웅크린 늑대가 떠나고 난 후 연구청에서 만들기 시작한 물품이죠."
작년에 두 번째로 이주했던 이주민들 가운데는 개척촌에서 유리를 제작하던 기술자들도 몇몇 있었다.
그렇기에 바로 그들을 연구청에 배속시키고 유리 공방을 만들고 유리 제작을 시도했던 정성국이었다.
"신기한 물품이군. 유리구슬 같은 건가?"
"예. 그런 것들을 녹여서 가공했다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허어. 대단하군. 이걸로 나무 창문을 교체하면 집 안이 참 밝아지겠군."
"그렇죠."
조선과는 달리 이곳에서 종이는 꽤 귀한 편이었기에 나무로 된 창문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대낮이라도 창문을 열어놓지 않으면 무척이나 어두웠고 건물 안에서는 조명이 필수였다.
특히 겨울에는 창문을 열어놓고 지낼 수도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제 유리가 양산되기 시작한 이상 최소한 낮에는 더는 호롱불을 켤 필요가 없어지게 될 것이다.
정성국 역시 유리창이 만들어지고 난 후로 집무실을 비롯한 관공서의 건물의 창문부터 싹 교체하기 시작했고.
잠시 유리창을 통해 바깥의 거리를 살펴보던 웅크린 늑대는 흔들리는 몸을 느끼며 정성국에게 물었다.
"헌데 말에 여유가 좀 있나 보군? 이런 식으로 사용하는 것을 보니?"
"아직 그 정도는 아닙니다만...밑에서 사용하라고 만들어 놨는데 그냥 처박아 두기도 애매해서 가끔 타고 다닙니다."
정성국의 대답에 웅크린 늑대는 처음 말을 타본 경험을 떠올리면서 대답했다.
"그냥 타는 것보단 편하군. 여인이나 아이들이 타고 다니면 좋겠어."
"그럼요. 당장은 말의 숫자가 부족한 상황이라 어쩔 수 없습니다만...추후에 말의 숫자가 늘어나면 먼 곳을 이동할 때는 마차를 타고 이동하게 될 겁니다."
아직까지는 말의 숫자가 적어 주로 군사청에서 사용하고 있었지만, 슬슬 새끼를 밴 암말의 숫자도 늘어나고 있고 계속해서 개척촌을 통해 말을 들여올 생각이었기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새마포 지역은 꽤 넓게 밭이 펼쳐져 있어서 이동수단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니까.
그러자 웅크린 늑대는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탄성을 내뱉었다.
"호. 그거 괜찮겠군. 아! 그래서 이곳의 도로가 이리 넓은 건가?"
이곳 새김포도 그렇고 새마포 역시 도로의 폭이 굉장히 넓었다.
도로의 필요성을 잘 알고 있는 정성국이었기에 처음 마을을 건설할 때부터 도로의 폭을 굉장히 넓게 잡았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이주민들도 원주민들도 말이 많았지만, 정성국은 주장을 꺾지 않았다.
덕분에 새김포도 그렇고 새마포도 그렇고 건물들이 넓은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어 꽤 한적해 보이긴 했다.
"하하하. 뭐 비슷합니다. 나중에 말이 많아지면 이 도로를 따라 수많은 마차가 오갈 테니까요."
"그것참 기대되는군."
정성국의 말에 웅크린 늑대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고 정성국은 그제야 자신이 궁금하던 질문을 던졌다.
"헌데 원주민들과의 협상은 어땠습니까?"
"협상은 성공적으로 끝냈다네."
웅크린 늑대의 답변에 정성국은 환하게 웃었다.
"그렇습니까? 별다른 충돌도 없었구요?"
"그렇다네. 우리가 항구를 만들려는 위치에 인접한 두와미시 족과 스노호미시 족, 그리고 수쿼미시 족 모두 흔쾌히 그 땅을 이용하라고 허락해줬네. 자네가 준비한 선물을 다들 만족스러워하더군."
"다행이네요."
정성국은 원주민들과 교섭해야 하는 웅크린 늑대를 위해 그들에게 전해줄 선물을 준비했었다.
주로 철제물품과 식량이었는데 아무래도 웅크린 늑대가 교섭한 원주민들에게는 무엇보다 값어치있는 선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철제물품을 한정적으로 제공한 만큼 오히려 원주민들은 지속해서 철제물품들을 얻기 위해서라도 자신들에게 호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헌데 왜 이리 늦어진 겁니까? 별다른 충돌도 없었다면서?"
웅크린 늑대의 답변에 정성국은 한 가지 의아한 점이 생겼다.
별다른 충돌도 없었는데 귀환이 너무 늦은 것에 대해 질문하자 웅크린 늑대는 자신이 겪었던 고생이 떠올랐는지 슬쩍 인상을 찡그렸다.
"그곳 지형이 생각보다 복잡하더군. 제대로 된 해도를 작성하는 것이 임무였다면서? 덕분에 탐사대원들의 고생이 아주 심했네. 거기에 이곳과는 달리 기후도 더 추운 편이었고. 그나마 그곳 원주민들과의 협상이 성공적으로 끝났고 호의적이었기에 모피를 구해 추위를 견딜 수 있어서 다행이었지, 아니었다면 그냥 적당한 해도만 작성하고 돌아올까도 고민할 정도였네."
"아...하긴 그렇겠군요."
정성국은 무의식중에 시애틀 근처의 지형을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 샌프란시스코만과는 달리 시애틀 근처의 퓨젓사운드 만은 해안선이 무척이나 복잡했고 수많은 반도와 섬들이 혼재해 있는 지형이었다.
이런 지형을 겨울바람을 맞아가며 탐사해야 했으니 탐사대원들이 얼마나 고생이 심했을지 짐작한 정성국이 괜히 정확한 해도를 작성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며 혀를 찼다.
'그냥 적당히 시애틀로 향하는 항로만 탐사하라고 할 걸 그랬네. 제대로 된 해도는 나중에 그곳에 머물게 될 사람들에게 작성하라고 해도 될 텐데.'
당장 필요하지도 않은 해도 때문에 찬바람을 맞아가며 고생했을 탐사대원들이 떠올라 정성국은 미안한 마음에 포상이라도 두둑이 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때 웅크린 늑대가 정성국의 반응에 이상하다는 듯 물어보았다.
"음? 총독도 그곳의 지형을 아는가?"
"아. 그것보다는 아무래도 이곳보단 북쪽일 테니 더 춥겠지요. 이럴 줄 알았으면 일단 항구가 들어설 위치까지의 해역 탐사만 진행하라고 할 것을 그랬군요."
정성국이 적당히 둘러대자 웅크린 늑대는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어떻게 겨울에 그런 명령을 내릴 수 있느냐며 짜게 식은 눈초리로 정성국을 바라보았다.
"아아. 그랬다면 탐사대원들의 고생이 좀 덜했을 거야."
"크흠. 탐사대원들에게는 제대로 포상을 내릴 생각이니 너무 그러지 마시죠."
이에 웅크린 늑대는 피식 웃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
* * *
정성국은 집무실에서 푸른 안개의 말에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요쿠츠 족이 말입니까?"
"그렇다네."
요쿠츠 족은 새마포의 남쪽에 자리 잡은 부족으로 푸른 안개의 부족인 우티 족에 인접한 부족이었다.
이들 역시 이주민들의 존재를 일찌감치 알고 있었고 새마포의 건설 후엔 적당히 교류했던 부족이었다.
하지만 이주민들과 교류하던 인접한 다른 부족들이 이주민들에게 합류한 후론 그들은 오히려 한 발짝 물러나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었다.
헌데 이런 요쿠츠 족이 갑자기 스탠스를 바꾸어 푸른 안개를 통해 합류 의사를 넌지시 밝혀왔으니 의아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이런 시기에 합류 의사라니...설마 식량이 부족한 겁니까? 헌데 그들의 식량 사정은 나쁘지 않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이에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는 푸른 안개였다.
"그렇긴 하지. 아마 그들도 다른 때와는 다르게 꽤 괜찮은 겨울을 보냈을 거야. 그리고 당장 식량이 부족한 편도 아니고."
"헌데 왜?"
푸른 안개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정성국을 바라보고 대답했다.
"간단하네. 우리 부족들은 더욱 풍족한 겨울을 보냈으니까."
"아..."
"이해했나 보군."
"예. 뭐..."
원래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법이다.
마찬가지로 요쿠츠 족과 인접한 우티 족이나 마이두 족 모두 비슷한 수준이었는데 순간의 선택으로 우티 족이나 마이두 족은 더는 굶을 일 없이 풍족한 겨울을 보낸 반면 요쿠츠 족은 비록 굶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주민들에게 합류한 부족처럼 배불리 지낸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 나날이 새김포와 새마포가 발전하고 있었고 특히 요쿠츠 족이 주로 방문하는 새마포 주변은 수많은 밭들이 조성되어 있었으니 이 차이가 계속해서 벌어지리라는 것은 명백했다.
결국, 요쿠츠 족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뿐이었다.
이들과 합류하거나 저항하거나.
허나 뻔히 먼저 합류한 원주민들이 풍요롭게 사는 것을 보면서 굳이 저항할 이유가 있겠는가.
"이건 시작일 걸세. 이번엔 요쿠츠 족이겠지만 다른 부족들도 하나둘 합류하게 될걸세."
이들 아메리카 원주민의 경우 부족의 추장이라는 자리는 부족의 지배자가 아닌 대표자에 불과했다.
그런 만큼 이주민들과 합류하면 풍요롭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부족원들이 알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합류를 요청할 테고 추장들 역시 별다른 권리가 없는 자리를 지키겠다고 뻗댈 이유는 없었다.
그런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정성국은 씩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미리 준비를 잘 해두어야겠네요.”
동시에 정성국은 속으로 생각했다.
‘분명 예상한 대로 일이 진행되어서 좋긴 한데...좀 천천히 합류했으면 좋겠다. 이러다 일에 치여 과로사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