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정성국은 집무실에 들어온 하얀 들꽃이 들고 온 바구니 안에 가득한 고구마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건 웬 고구마야? 간식거리?"
하얀 들꽃은 바구니 안에 가득한 고구마를 보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예. 헤헤. 주방에서 받아왔어요."
"그래? 근데 뭘 그리 많이 가져왔어? 간식거리라기엔 너무 많은 거 아닌가?"
바구니 한가득한 고구마를 보고 질린 표정을 짓는 정성국을 향해 하얀 들꽃은 오히려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게 많아요? 총독 어르신하고 호위대원들도 나눠주면 얼마 되지도 않을 거 같은데요?"
'아니. 그래 봐야 서너 명인데? 저거 다 먹으면 배부를 것 같은데...'
정성국이야 원래 조선사람들이 보기엔 이상할 정도로 입이 짧은 편이니 넘어간다 쳐도 호위대원들도 저걸 다 먹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 정성국이었다.
조선의 양민들이라면 지금 시간은 한창 출출할 시간이었겠지만 이곳은 사정이 다르지 않은가.
매일 세끼를 꼬박꼬박 제공할뿐더러 균형 잡힌 식단과 더불어 육류와 생선 등 단백질 섭취에도 무척이나 신경을 쓰는 정성국이었기에 이곳 사람들은 더는 예전처럼 많이 먹지 않는다.
조선사람들이야 하루에 두 끼밖에 먹지 못했고 육류 섭취가 힘들어 단백질을 오로지 쌀, 콩, 보리 등 통곡물로 섭취해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먹는 양이 증가해 대식하게 되었지만, 개척촌에서는 아침 점심 저녁으로 식사를 제공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식습관이 변화했고 이곳에 와서는 더욱 풍족했기에 다들 식사량이 정성국보다 조금 많은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그걸 잘 아는 정성국이었기에 너무 많이 가져온 것 아니냐고 타박하려다 고구마가 담긴 바구니를 보면서 행복한 미소를 짓는 하얀 들꽃을 보고 피식 웃었다.
원주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물이 바로 고구마라고 듣긴 했었기에.
"그렇게 고구마가 좋아?"
그러자 하얀 들꽃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고구마 예찬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물론이죠. 이렇게 달짝지근한 작물이라니. 거기에 재배하는 것도 어렵지 않고. 줄기만 잘라서 심으면 자라고. 정말 대정령의 축복이 내려진 작물 같다니까요? 정말 조선인들이 살던 한반도라는 곳에는 이런 대정령의 축복과도 같은 작물이 참 많은 거 같아요."
그 말을 듣고 정성국은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어...애당초 고구마는 중미나 남미가 원산지인데 말이지. 그러고 보면 저 고구마들은 거의 지구 한 바퀴를 돌아온 셈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정성국은 속으로 키득거렸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로 아메리카 대륙의 수많은 작물이 대서양을 건너 유럽으로, 아시아로 퍼져 다시 정성국에 의해 북미로 전파되었으니 말이다.
그때 하얀 들꽃이 바구니를 들고 정성국이 앉아있던 곳으로 가까이 다가왔고 그제야 정성국은 바구니에 들어있는 고구마의 상태를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어? 뭐야. 그냥 생고구마네?"
주방에서 받아왔다길래 찐 고구마를 간식거리로 받아온 줄 알았던 정성국이었기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하얀 들꽃이 웃으며 대답했다.
"예. 주방에 찐 고구마도 있긴 했는데요. 주방 아주머니가 그러는데 찐 고구마보다는 군고구마가 더 맛있대요! 그래서...헤헤헤."
그러면서 정성국이 앉아있는 의자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화로에 다가가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비록 새김포의 겨울이 조선처럼 눈이 펑펑 내릴 정도로 춥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편이었다.
해서 2층에 위치한 집무실에서 대부분 시간을 보내는 정성국은 난방을 위해 화로를 가져다 놨었고.
그런 화로에 고구마를 구워 먹자는 하얀 들꽃의 말에 정성국은 피식 웃고 입을 열었다.
"그래? 하얀 들꽃은 군고구마는 먹어본 적 없어? 그동안 찐 고구마만 먹은 거야?"
"네!"
"그래서 냉큼 생고구마로 가져온 거구만. 뭐 고구마는 군고구마가 더 맛있긴 하지. 그래. 굽자."
정성국은 서류를 내려놓고 의자에서 일어나 부지깽이로 화로 안에 숯을 잘 정리하고 화로 바깥쪽 둘레에 고구마를 올려 두었다.
"그냥 이렇게 놔두면 되나요?"
"응. 그러면 열기에 천천히 익거든. 뭐 타지 않게 가끔 굴려주긴 해야지. 다만 시간은 좀 걸릴 거야."
"아."
기대 섞인 눈초리로 화로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하얀 들꽃을 보면서 피식 웃은 정성국은 부지깽이를 내려놓고 하얀 들꽃이 앉을만한 의자를 화로 근처에 가져다주었다.
"감사합니다."
"뭘. 네가 잘 보고 있다가 탈 것 같으면 이걸로 돌려주렴. 난 남은 보고서를 볼 테니."
"예!"
냉큼 대답하고 의자에 앉아 화로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하얀 들꽃의 시선에 정성국도 화로 주변에 놓인 고구마를 보면서 생각했다.
'군고구마도 맛있지만, 화로에 구워 먹는 군밤도 참 별미인데...뭐 몇 년 후에는 이곳에서 수확한 밤을 구워 먹을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한 정성국은 시선을 돌려 남은 보고서를 살피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화로의 온기와 함께 고구마가 서서히 구워지면서 나는 맛있는 냄새가 집무실을 채워 하얀 들꽃이 고구마를 보고 군침을 삼키기 시작할 무렵.
집무실 밖에서 누군가가 다급히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바로 집무실의 문이 열리고 호위대장이 종이를 들고 들어왔다.
"총독 어르신!"
갑작스러운 호위대장의 방문에 서류를 살피던 정성국도, 화로에 집중하고 있던 하얀 들꽃도 시선을 돌려 호위대장을 바라보았다.
"음? 무슨 일인가?"
집무실에 들어온 호위대장은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정성국에게 넘기면서 입을 열었다.
"관측소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관측소는 혹시 모를 범선의 접근을 관측하고 보고하기 위해 만든 곳으로 샌프란시스코 맞은편에 있는 포모 족 영역의 산기슭에 적당히 위장해 있었다.
정성국이 기억하기로는 스페인의 마닐라 갤리온이 매년 이곳을 지난다고 알고 있었는데 의외로 원주민들도 그렇고 이곳에 남아있었던 종삼이도 스페인의 선박을 본 적이 없다길래 의아한 마음에 없는 인원을 쪼개 관측소를 설치했다.
다만 이 관측소 때문에 발각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적당히 나무로 위장해두어 혹시 모를 발각에 대비했다.
또한, 관측소가 산기슭에 있었기에 새김포와의 연락이 힘들어 혹시 스페인의 범선이 만 입구로 진입할 때만 봉화로 위급을 알리고 그 외에는 교대시간에 보고만 올리도록 체계가 잡혀 있었다.
"호오? 그래? 설마?"
정성국이 호위대장에게 건네받은 보고서를 읽고 있을 때 호위대장이 입을 열어 그 내용을 보고했다.
"예. 드디어 범선을 발견했답니다."
이에 정성국은 보고서를 살피던 시선을 들어 이곳에 오면서 먼저 보고서를 살펴본 호위대장에게 묻기 시작했다.
"허. 드디어 마닐라 갤리온이 보였다 이거지? 그래. 상황은? 보고서로 올라온 것을 보면 그냥 지나친 건가?"
"예. 그냥 지나쳤답니다."
"그리고? 다른 보고 사항은?"
"선박들의 거리가 꽤 멀었답니다. 이번에 지급한 망원경이 아니었다면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거리를 두고 남하했다더군요."
그 말에 이해가 간다는 듯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알기로 스페인의 마닐라 갤리온이 필리핀에서 북진해 일본 근해까지 올라와 항로를 변경해 동쪽으로 쭉 이동하면 이곳 새김포보다 위쪽인 멘도시노 곶 근처에 도달한다고 알고 있었다.
그곳의 위치는 포모 족의 영역에 가깝긴 하나 커다란 산맥이 가로막혀 있는 관계로 포모 족이 스페인의 범선을 본 적 없다는 사실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성국이 이곳에 이주민을 이끌고 정착한 이후에도 스페인의 범선이 보이지 않는 건 이상해서 관측소까지 세웠던 만큼 드디어 스페인의 범선이 발견되었다는 것에 안도했다.
'혹시 모를 암초 때문에 꽤 떨어져서 항해하는 건가? 아. 마닐라 갤리온은 서양인들에겐 보물선에 가까운 만큼 오히려 해적들이 더 문제였다고 하지. 그러니 해적선들 때문에 해안선 가까이에 접근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다. 뭐 어떤 이유든지 간에 나쁠 것은 없네. 내가 역사를 바꾼 셈이라 혹시 이곳 샌프란시스코만의 발견이나 스페인의 캘리포니아 개척이 빨라질까 봐 걱정했는데 재수 없게 이주 선단과 마주치지 않는 한 당분간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네.'
마닐라 갤리온에 실린 중국의 값비싼 교역 물품들은 서양인들에겐 이야기에 나오는 보물선 그 자체였다.
그렇기에 눈이 뒤집혀서 마닐라 갤리온을 약탈하려고 노력했고.
덕분에 항해하면서 난파하는 선박보다 해적에게 약탈당하는 배가 더 많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특히 태평양을 횡단해 북미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던 마닐라 갤리온이 바하칼리포르니아 반도 인근에서 영국의 사략 선에 의해 간혹 약탈당하기도 했던 만큼 혹시 나타날 해적들을 피하고자 해안가에서 최대한 멀찍이 떨어져 항해하는 스페인의 선박이 충분히 이해되었다.
그렇게 생각을 끝낸 정성국은 관측소에서 올린 보고서를 쭉 읽어보다가 어느 한 부분을 보고 의외라는 듯 이야기했다.
"음. 한 척이 아니었네?"
"예. 3척이라고 하더군요. 최소 지급 함선 수준은 되어 보였다고 합니다."
"뭐...그거야 그렇겠지. 헌데 3척이라..."
정성국이 기억하기로는 무역을 독점하고 물량을 조절해 더 큰 이익을 보기 위해 세비야의 상인들이 필리페 2세에게 청원해서 결국 교역은 마닐라 갤리온 한 척으로 한다고 알고 있었기에 잠시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허나 생각해보면 마닐라 갤리온을 노리는 해적들이 워낙 많은 만큼 교역품을 가득 실은 마닐라 갤리온의 호위함은 필수였다.
'호위함이라...나중에 적당히 자리를 잡고 나면 스페인에 선빵을 날리기 위해서라도 직접 마닐라 갤리온을 나포할 생각이었는데 선단을 구성해서 이동하는 상황이면 결국 제대로 된 군함을 만들고 해군을 육성해야겠네.'
스페인은 아메리카에 사는 원주민들을 자신들과 같은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이교도였고 그들이 보기엔 미개했으니까.
그리고 정성국은 그런 원주민들을 구성원으로 받아들였고 조선인들 역시 외향은 비슷했다.
그런 만큼 당장 스페인과 우호적으로 교류하긴 어려웠다.
정성국이 누에바 에스파냐의 부왕에게 사절이라도 보내 우호적으로 교류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한다 한들 곧바로 군대를 보내올 것이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정성국이었기에 적당히 자리를 잡을 때까지 스페인이 이곳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먼저 선제공격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대상은 아무래도 마닐라 갤리온이 될 수밖에 없긴 했다.
그 외엔 영국의 사략 선단처럼 누에바 에스파냐의 서해안 지역을 약탈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테고.
그러자면 결국 제대로 된 전투용 함선이 필요했다.
지급 함선도 그렇고 이번에 건조될 천급 함선도 전투용 함선이라고 하기엔 어려웠으니까.
특히 정성국의 생각과는 달리 후장식 화포의 사거리나 연사속도는 마음에 들었지만 실제로 바다 위에서 명중탄을 맞추려면 생각보다 근접해야 했고 그러다 보면 상대의 포탄이 위협적일 수밖에 없었다.
사람 한명 한명이 소중한 정성국으로서는 지급 함선을 전투에 써먹다가 혹시 모를 상대의 포탄에 선원을 잃을 바에는 거북선이나 철갑선 같은 제대로 된 전투용 함선을 건조하는 게 더 나아 보였다.
'역시 이럴 땐 철선이 최상이긴 한데 당장 이곳에서 철선을 건조할 정도로 강철의 생산량이 많지도 않고 아직 기술도 부족하지. 결국, 기동이가 이번에 만든다는 기선을 기반으로 적당히 개조하는 방향으로 가야겠네.‘
이 시대의 해전은 적당히 근접해서 무거운 쇳덩이를 날리는 방식인 만큼 기존의 배라면 갑판 위에서 활동하는 선원들이 다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만큼 선원을 보호하려면 거북선처럼 적당히 두꺼운 목재를 갑판 위에 둘러 어느 정도 방어력을 갖춘 배가 필요했고 그러자면 기선을 기반으로 개조하는게 바람직 했다.
’배 밑판에만 덧씌웠던 강철을 배 전체로 확장 시키면 방어력은 충분할 거야.‘
정성국이 보고서를 살피면서 앞으로 건조할 전투용 함선을 생각하고 있을 때 문득 탄내가 나는 느낌에 정신을 차리고 하얀 들꽃을 바라보았다.
정성국이 심각한 표정으로 보고서를 보며 고민을 하고 있었기에 긴장해서 정성국을 바라보던 하얀 들꽃과 호위대장은 정성국이 하얀 들꽃을 쳐다보자 고개를 갸웃했다.
“야. 탄다.”
“네? 아? 앗! 고구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