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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46화 (46/850)

46화

"허어. 이건 장관이군."

정성국은 배 위에서 강을 따라 이어지는 황금 물결을 보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강에 가까운 곳에서 심어진 벼가 어느새 누렇게 익어 고개를 숙였다고, 곧 수확해야 한다는 보고에 정성국은 문득 그 풍경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연구청에서 두 번째 기선을 건조했다는 말과 함께 시범 운항을 한다는 소리에 정성국은 오랜만에 집무실을 나와 선착장으로 향했다.

연구청에서 건조한 기선은 100톤급 선체에 50마력 증기기관을 탑재한 자그마한 녀석으로 첫 번째 기선은 이미 새김포와 새마포를 오가며 열심히 물자와 인력을 실어나르고 있었다.

이번에 새로 건조된 두 번째 기선 역시 시범 운항을 통해 문제가 없다면 첫 번째 기선처럼 물자 운송에 투입될 예정이었으나 개척촌의 기술 발달이 정성국의 예상보다 빨랐고 덕분에 이 기선의 역할은 바뀔 수밖에 없었다.

이번 시범 운항을 통해 별문제가 없다는 것이 확인되면 이 기선은 바로 탐사대에 배정되어 일차적으로는 새김포 북쪽에 위치한 시애틀 지역을 탐사하고 해도를 작성하며 원주민과 교류할 생각이었다.

그 후에는 알래스카 지역을 탐사할 생각이었고.

그러면서 원주민들과 교류해 영역을 넓혀가며 알래스카 곳곳에 영토를 나타내는 비석을 세우거나 동판이라도 박을 생각이었다.

당장 알래스카의 개발엔 관심이 없는 정성국이었다.

그러나 알래스카 지역을 내버려 둘 수도 없는 것이 바로 러시아 때문이었다.

러시아 역시 현재는 시베리아에만 관심을 두고 있지만 50년 이내에 시베리아에 사는 수많은 동물의 씨를 말리고 결국 모피를 찾아 북미에 관심을 돌릴 수밖에 없었으니까.

이를 알고 있는 정성국은 그 전에 미리 침이라도 발라둬야 하는 만큼 아예 이번에 건조된 기선을 탐사대 소속으로 배정해버린 것이다.

정성국은 시범 운항이 예정되어 있던 새로운 기선에 일행들과 탑승해서 선장에게 부탁해 시범 운항의 경로를 살짝 틀었다.

원래는 만 안쪽을 크게 한 바퀴 돌 예정이었으나 정성국의 부탁을 가장한 명령에 따라 새마포를 지나 조선인들이 새한강으로 부르는 새크라맨토 강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길 잠시.

양옆의 커다란 산맥을 지나 평야가 나타나며 푸른 강을 따라 양옆에 황금 물결이 일렁이는 풍경은 아주 아름다웠다.

그동안 집무실에서만 처박혀 일하던 정성국이나 그 일행들은 이 풍경에 압도되어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고.

"저게...다 식량인 거죠? 그 쌀이라는 식량?"

정성국을 따라온 하얀 들꽃이 멍한 얼굴로 강을 따라 조성된 황금 들판을 보다가 더듬거리면서 물어보았다.

하얀 들꽃은 저 누렇게 익은 작물이 모두 벼라는 사실을 이미 정성국의 곁에서 일을 도우면서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라 말문이 막힌 듯했다.

"그렇지. 그리고 저 벼를 수확해서 도정하면 쌀이 되는 거지. 어때? 장관이지?"

"하하하. 그러네요."

정성국의 말이 끝나자 하얀 들꽃은 힘없이 웃었고 이에 정성국은 시선을 돌려 뒤편에 서 있던 하얀 들꽃을 바라보았다.

"왜?"

약간은 슬픈 표정으로 황금 들판을 바라보던 하얀 들꽃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식량이 끝도 없이 들판에 널려있다고 생각하니...조선 민족이 이곳에 정착한 것은 역시 대정령의 축복이라고 밖엔 보이지 않네요."

그 말 안에 느껴지는 자괴감을 깨닫고 정성국은 쓴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뭐 대정령의 축복씩이나...그냥 작물 빨이지.'

이곳의 원주민들은 운이 없었고 딱히 그들이 재배할 만한 작물이 없었을 뿐이다.

이들의 활동 범위가 넓었다면 또 상황이 달랐겠지만.

말이 존재하기에 사람들의 활동 범위가 넓고 덕분에 광범위하게 작물이 전파될 수 있었던 구대륙과는 달리 이곳 신대륙은 탈 만한 동물이 없었기에, 그리고 지형적인 요인에 의해 활동반경이 생각보다 적었고 그렇기에 식량으로 재배할 만한 작물이 대륙 전체로 퍼지지 못해 이들은 이 땅의 풍요를 제대로 누리지 못했을 뿐이다.

애초에 3대 주식 작물 중 하나인 옥수수도, 수많은 사람을 먹여 살린 구황 작물인 감자도 모두 신대륙의 작물이니 말이다.

허나 지금 하얀 들꽃에게 할 말은 아니었기에 정성국은 별말 없이 고개를 돌려 뒤쪽에 정성국을 따라나선 관리청장을 보고 입을 열었다.

"예상 수확량은 어느 정도인가?"

"대략 10만석 정도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관리청장의 답변에 정성국은 감탄하며 현재 식량 상황을 물었다.

"허어. 그럼 식량은 충분하겠군?"

이에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오히려 식량이 넘칠까 봐 걱정이라는 관리청장이었다.

"물론입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벼뿐만 아니라 뒤쪽에 개척단이 직접 조성한 밭에서 재배한 밀과 보리, 고구마 등을 생각해보면 솔직히 저희가 가지고 있는 식량만으로도 이주민들뿐만 아니라 저희에게 합류한 원주민들 모두를 먹여 살리고도 남습니다. 헌데 원주민들도 자신들 마을 근처에 저희가 제공한 여러 작물을 심은 상황이라..."

"하하하. 진짜 식량은 넘쳐나겠네."

관리청장의 대답에 정성국이 크게 웃자 오히려 관리청장은 정색하면서 엄살이 아니라며 보관의 문제를 거론했다.

"예. 오히려 작물들을 보관할 창고를 짓는 게 더 걱정입니다. 거기에 내년에는 올해보다 더 많은 농지가 생길 것 아닙니까?"

"그렇지. 꾸준히 개척할 생각이니. 뭐 식량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 상관없네."

정성국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듯해서 관리청장은 그저 골치가 아프다는 듯 신음을 흘렸다.

"끄응..."

허나 정성국은 시선을 황금 들판으로 돌리며 관리청장에게 자신은 절대 계획을 바꿀 의향이 없다는 것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정성국은 이곳에선 계속해서 농지를 늘리고 상품작물보다는 식량 작물 위주로 재배할 생각이었다.

'식량이 있어야 주변 부족들을 끌어들이기가 쉬워. 우리에게 합류하면 모든 부족민이 배불리 생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주변 부족들이 다들 깨닫는 순간 이번에 합류한 4개 부족처럼 자연스럽게 합류할 거야. 힘으로 뺏고 싶어도 현재 4개 부족이 연합한 상황으로 알려져 있으니 이 주변에서는 감히 덤빌만한 부족도 없고.'

그렇게 생각을 끝낸 정성국은 잠시 시선을 돌려 한숨을 푹푹 쉬는 관리청장을 보고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정 남으면 술로 만들어 버리면 그만 아닌가."

"허허허. 쌀이 넘쳐서 술로 만든다니...참 이곳은 축복받은 땅이 아닐 수 없군요. 아."

관리청장은 정성국의 말에 허탈한 듯 웃으며 이야기하다가 움찔하고 하얀 들꽃의 눈치를 살폈다.

하얀 들꽃은 자신의 말로 인해 더는 분위기가 처지는 것을 원치 않았는지 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지요. 이곳은 대정령의 축복이 함께하는 땅인걸요.“

”그럼요. 저 풍경을 본다면 다들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하하하.“

관리청장이 곧바로 하얀 들꽃의 말에 수긍하며 덧붙였고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돌려 황금빛으로 가득한 들판을 바라보았다.

* * *

"자! 빨리빨리 배에 타라고!"

""예.""

탐사대원들이 무장하고 하나둘 기선에 올라타는 모습을 멀리서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던 정성국을 향해 웅크린 늑대가 다가왔다.

"여기 있었군."

그러자 정성국은 선착장을 바라보던 고개를 돌려 자신에게 다가온 웅크린 늑대를 보고 웃으면서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이번에 50여 명의 탐사대원과 함께 기선을 타고 북쪽을 탐사할 웅크린 늑대가 의외라는 듯 정성국을 바라보았다.

"총독이 여기까지 나와 배웅할 줄은 몰랐는데?"

이에 정성국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만큼 중요한 일이니까요."

물론 이번 탐사와 항구를 건설할 지역의 원주민과의 교류가 중요하긴 했지만, 굳이 정성국이 선착장까지 나올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도 정성국이 굳이 선착장에 나온 이유는 아쉬움과 불안감 때문이다.

그동안은 정성국이 직접 원주민과의 교류를 뒤에서 컨트롤 해왔었으니까.

물론 이곳에 도착하고 나서 작은 부족들과의 교류는 주로 탐사대에 맡겨왔고 이번 탐사도 잔뼈가 굵은 탐사대원들을 모두 차출해 보내는 만큼 믿음직스러웠지만, 이들은 주로 젊은 친구들이다 보니 혹시 충돌이라도 생길까 불안했다.

거기에 정성국 자신이 직접 근처에서 명령을 내릴 수도 없었고.

헌데 생각해보니 부족 간의 교섭에 익숙한 사람은 따로 있지 않던가.

해서 대추장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결국 웅크린 늑대가 탐사대에 합류해서 부족 간의 교섭을 맡게 되었다.

굳이 따지자면 외교관의 포지션이랄까.

"흐음...그래? 고작 그들과 교류하며 주변 지역을 탐사하고 적당히 땅만 확보하면 되는 일이잖나."

그러면서도 웅크린 늑대는 묘한 표정으로 정성국을 바라보았고 정성국은 알면서 뭐하러 묻느냐는 듯 대답했다.

"짐작하실 텐데요."

"역시 그들도 흡수하고 싶어 하는군."

이에 정성국은 쓴웃음을 지으며 실제 부족들과 교섭해야 하는 웅크린 늑대에게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뭐 그러면야 좋겠지만...일단은 내년에 이곳 새김포처럼 새로운 항구를 만들 지역을 확보하고 주변 원주민들의 이해를 구하는 것이 우선이겠지요. 정 힘들면 차선으로 제가 일러준 곳을 확보하시구요."

정성국이 최우선으로 확보하길 원하는 곳은 전생의 시애틀 지역이었다.

차선이 밴쿠버 지역이었고.

두 곳 모두 항구가 들어서기 좋은 입지를 갖추고 있었기에 원주민들과의 교섭을 통해 큰 문제 없이 이곳의 확보를 원하는 정성국이었다.

이에 웅크린 늑대는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원주민들과의 성공적인 교섭을 자신했다.

"잘 알겠네. 최대한 우호적으로 접근할 테니 너무 걱정 말게."

"부탁드립니다."

대화가 끝나자 웅크린 늑대는 선착장으로 이동해 기선에 올라탔다.

웅크린 늑대가 승선하자마자 이미 예열되어 있던 보일러가 스크루를 회전시키면서 기선이 선착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정성국은 물끄러미 이를 지켜보았다.

'뭐 원주민들의 성향을 생각해보면 항구를 만들 영역의 확보는 쉬울 거야. 백인들도 손쉽게 개척촌을 만들었으니까. 그렇게 물꼬만 틀 수 있다면 그다음이야 쉽지. 어차피 식량도 넘쳐나는데 적당히 퍼주면서 끌어들이면 되겠지. 다만 혹시 오판할 수도 있으니 결국 그곳에 주둔할 병사가 필요하긴 한데...'

현재 군사청에 소속된 병사는 모두 200명.

원래는 100명이었지만 원주민들이 합류하면서 지켜야 할 영역이 넓어짐에 따라 일단 추가로 100명의 원주민을 모집해 훈련시키고 있었다.

‘현재 우리 인구가 6만 명에 못 미치지. 보통 인구대비 병력의 수는 1프로가 적당하긴 한데 그럼 600명인데...북쪽에 새로 항구를 만들고 그곳을 경비할 병력까지 생각하면 너무 적은 것 같단 말이지. 최소 저곳에도 200명은 배치해야 만약의 사태에 대응할 수 있을 테니 일단 최소 800명? 거기에 이번에 포대까지 만들고 포대에 병력을 배치하려면...어휴. 최소 1천명은 필요하겠네.’

개척촌에서 육상용으로 개조해 사거리를 늘린 60mm 후장식 화포 4문이 지급 함선에 실려 왔었기에 정성국은 만약을 대비해 적당히 위장된 포대를 만들 계획이었다.

그것까지 생각해 필요한 병사 수를 머릿속으로 계산해보고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는 정성국이었다.

‘가뜩이나 일손도 부족한데. 그래도 별수 없지. 아무리 무기가 좋다 한들 숫자도 중요하니. 일단 천천히 병사 수를 늘려나가는 수밖에. 거기에 조선인과 원주민의 비율도 생각해야 하고. 일단 내년까지는 딱 600명의 병사만 모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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