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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45화 (45/850)

45화

투로시노는 기범선의 선장실에서 박헌수 선장의 설명을 듣고 한참을 고민하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원상은 아무런 지원을 하지 않는 겁니까?"

그 말에 박헌수 선장은 두 손을 내저으며 부정했다.

"그럴 리가요. 가지고 온 곡식과 창 촉은 지원할 겁니다. 다만 신식소총은 지원하기 어렵습니다."

"끙..."

소총이 제외된다는 말에 혹시나 해서 박헌수 선장을 바라보던 투로시노는 표정을 살짝 찡그렸다.

투로시노는 원상과 함께 태평양을 횡단하면서 많은 것들을 보았고 그런 만큼 누구보다 저들이 가진 소총이 얼마나 위력적인지를 알았다.

다만 세상을 알게 되면서 저들이 가진 소총이 굉장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이번 무기를 지원해달라고 요청하면서도 소총은 기대하지 않았던 투로시노였다.

헌데 원상에서 대뜸 소총을 제공한다고 하자 이게 웬 떡이냐 싶었던 투로시노였지만 박헌수 선장의 설명을 끝까지 듣고 나선 고민이 깊어졌다.

투로시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자신들의 방식대로 필요할 때 부족원들을 소집하는 방식이 아닌 상비군을 마련하는 방식은 아직 아이누인들에겐 무리인 만큼 원상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것을 말이다.

거기에 무려 새로 만든 소총까지 제공한다고 하니 이게 웬 떡이냐 싶었고.

단 박헌수 선장이 덧붙였던 예상대로 마쓰마에 번에서만 군사를 일으킨다면 새로운 부대의 출전은 금지하겠다는 말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정평국은 아이누인들을 속일 생각은 없었기에 대략적인 흐름을 투로시노에게 알려주라고 이야기했었고 박헌수 선장은 투로시노에게 원상의 제안과 앞으로의 흐름, 그리고 원상이 어떤 식으로 행동할 것인지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그렇기에 원상의 제안을 듣자마자 그 제안을 받아들이려던 투로시노의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투로시노를 보고 박헌수는 입을 열었다.

"투로시노. 내가 친구로서 조언을 해주자면 이 제안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아직 제대로 된 조직도 없는 상황에서 상비군 200명을 뽑고 유지하는 비용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거기에 어중이떠중이들에게 신식소총을 쥐여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으음..."

투로시노는 신음을 흘리면서도 자신도 그 의견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이곳 포로나이 항이 생기고 원상과 교류하면서 아이누인들이 조금은 부유해지긴 했지만 당장 200명을 뽑아 그들의 뒷바라지를 하긴 어려웠다.

거기에 화약 병기에 익숙하지 않은 아이누인들이었기에 상비군을 조직하지 않는다면 원상에서 소총을 지원해준다고 한들 제대로 써먹기도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당장 충돌이 예상되는데 홋카이도의 동족들을 돕지 못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원상에서 가져온 창 촉과 곡식을 제대로 풀기만 해도 당장 저 왜인들을 막는 덴 큰 어려움이 없을 겁니다. 아닙니까? 홋카이도의 동족들이 그렇게 힘이 없지는 않잖습니까."

"그렇기야 하지요."

박헌수 선장의 말에 투로시노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200년 전 홋카이도 아이누인들의 봉기가 결국 일본 본토의 지원 때문에 진압되긴 했지만 그 전에는 아무런 지원 없이도 홋카이도에 마련된 12곳의 무역거점 중 10곳을 점령하며 기세를 보였던 동족들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창 촉을 비롯해 식량까지 지원해준다면 당장 마쓰마에 번의 침략은 충분히 물리칠 수 있다고 믿는 투로시노였다.

"허나 저 왜인들이 당하고 그냥 물러설 리는 없지요. 아마 저 본토에 도움을 요청할 겁니다. 그때 나서겠다는 겁니다. 계속 못 본척할 생각은 없다는 소리입니다."

그 말에 투로시노는 내심 결정을 내리면서도 하나 걱정되는 점이 있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음...저 샤모들의 나라는 꽤 강력하다고 하던데. 신식소총으로 무장한 부대가 분명 대단하기는 하겠지만 고작 200명으로 저들을 물리칠 수 있을 거라 봅니까?"

박헌수 선장은 투로시노의 마음이 바뀌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당장은 200명분의 물자지만 상황에 따라 계속 지원할 생각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우리 원상도 이 포로나이 항은 몹시 중요한 만큼 결코 저 홋카이도를 왜놈들이 모두 장악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겁니다. 왜 중요한지는 투로시노도 잘 알 거라 믿겠습니다."

그러면서 너도 잘 알지 않느냐는 듯 웃는 박헌수 선장의 말에 투로시노는 원상의 실질적인 주인인 정성국과 함께했던 항해를 떠올리고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은 개척촌에서 새로운 대륙으로 향하는 길목에 조성된 이 포로나이 항을 위협할 수 있는 저 샤모들의 확장을 결코 두고 보진 않을 거라는 확신이 생기자 투로시노는 이들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그럼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요."

그 말에 박헌수 선장은 웃으면서 준비한 서류를 꺼내 들었다.

투로시노는 익숙하게 한글로 작성된 서류를 한번 살펴보고 끝부분에 지장을 찍었다.

그리고 박헌수 선장이 건네준 천에 손을 닦으며 문득 떠오른 궁금증에 입을 열었다.

"아. 헌데 실질적으로 부대의 지휘관이 될 부 지휘관은 누구입니까?"

그런 투로시노의 물음에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는 박헌수 선장이었다.

"잘 아는 친구일 겁니다."

"그래요? 설마?"

"들어오게!"

박헌수 선장이 크게 소리치자 선장실의 문이 열리며 한 명의 사내가 선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투로시노는 그 사내를 보고 무척 반갑게 맞이했다.

"오! 경수! 오랜만이군!"

"오랜만입니다. 투로시노."

"응? 존대? 그냥 말해라. 경수."

"공석에서 그럴 수는 없지요."

박경수는 경비대원의 조장 중 한 명으로 정성국이 처음 북미로 탐험을 떠났을 때 그를 따라 항해 길에 올랐던 사람이다.

그러다 아이누 섬에서 투로시노를 비롯한 아이누인들이 탑승하면서 그들과 함께 지내며 친분을 다져왔고.

그런 박경수였기에 아이누인들의 부대를 실질적으로 지휘하는데 가장 적합한 인사였다.

투로시노와 박경수가 오랜만에 만나 반가워하는 모습을 보고 박헌수는 투로시노를 보고 씩 웃으며 말했다.

"어떻습니까. 부 지휘관의 인선은 맘에 들지요?"

"물론입니다. 아주 마음에 들어요. 경수라면 믿을 수 있습니다."

괜히 잘 모르는 사람이 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면 투로시노가 좀 불편할 수도 있었겠지만, 자신들을 챙겨주었던 박경수라면 충분히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한 투로시노였다.

* * *

"이것으로 회의를 끝내도록 하지."

정성국의 말이 끝나자 회의실에 앉아있던 청장들이 한숨을 내쉬며 다시 일하러 나갈 준비를 하는 가운데 정성국은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 한쪽으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평소와는 달리 벽에 붙여서 여러 의자가 놓여 있었고 그 자리에 대추장들이 앉아있었다.

원주민들이 합류하고 난 이후 각 부족의 추장들이야 행정청에 배속시켜 일을 가르치고 난 후 각 마을의 촌장, 혹은 시장으로 임명하면 그만이었지만 대추장들은 달랐다.

대추장들의 하는 일은 기본적으로 각 추장의 다툼을 중재하고 그들의 의견을 취합하여 부족의 방향을 정하는 일을 했던지라 정성국은 이들의 자리를 두고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고민 끝에 이들의 자리를 결정했다.

"잘 보셨습니까? 어떠십니까?"

"으음...조금은 인상적이로군. 우리와는 조금 다른 방식이지만 어찌 보면 효율적일 수는 있겠다 싶군. 다만 지도자의 역량이 무엇보다 중요하겠어."

"그렇습니까?"

조용한 곰의 말에 다른 대추장들도 고개를 끄덕였고 정성국은 정확히 사정을 꿰뚫어 본 조용한 곰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애당초 이곳에서 정성국만큼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인사는 없었기에 말이 회의였지 실제로는 정성국의 의사대로 결정이 될 수밖에 없긴 했다.

즉, 이곳에서 한 회의는 이들의 보고를 듣고 정성국이 명령을 내리는 구조였다.

이는 만장일치가 될 때까지 계속해서 상대를 설득하며 회의를 하는 이곳의 원주민들이 보기엔 꽤 인상적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다만 이러한 체제의 위험성을 슬쩍 이야기하는 대추장들이었지만 애초에 정성국이 그것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나중이라면 몰라도 당장은 의사결정이 빠른 이런 방식이 어울리니 어쩌겠어.'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정성국은 대추장들에게 물었다.

"그건 그렇고 결정은 하셨습니까?"

정성국은 대추장들에게 두 가지의 길을 제시했다.

하나는 회의에 참관하고 조언하는 길.

또 하나는 직접 행정 관료로 일하는 길.

매달 열리는 이 회의는 청장들만이 참석하는 회의였으나 그렇게 되면 원주민들의 의사가 배제될 염려가 있었기에 회의에 참관하고 추후에 보고서를 통해 총독에게 조언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대추장들을 앉힐 생각이었다.

다만 잘못하면 뒷방늙은이로 남을 수 있었기에 그것이 싫다면 직접 행정 관료로 일을 하던가.

정성국이 대추장들을 불러 회의를 참관하게 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대추장들의 흥미에 맞는 일을 하라고.

"지금 정해야 하나?"

조용한 곰의 말에 정성국은 어깨를 으쓱하며 회의실을 빠져나가는 청장들의 뒷모습을 보고 입을 열었다.

"뭐 굳이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만...행정 관료가 될 생각이라면 빨리 결정해서 일을 배우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흐음..."

정성국에 말에 고민하는 조용한 곰을 제치고 지혜로운 나무가 말문을 열었다.

"난 연구청? 그곳에 소속되고 싶네."

정성국은 지혜로운 나무의 말에 잠시 고민했다.

연구청의 경우는 기본 지식이 있어야 하는 만큼 과연 지혜로운 나무를 그곳에 배속시켜도 될까 싶었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나무를 한낱 잡부로 쓸 수는 없지 않은가.

"연구청이라...정확히 어떤일에 흥미가 있으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이번에 이곳에서 새로 건조한 배를 멀리서 본 적이 있네. 꽤 신기하더군. 꽤 커다란 배인데 노도, 돛도 없이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다니.“

"흠..."

지혜로운 나무의 답변에 오히려 정성국은 더 곤란해졌다.

그의 답변으로 추측하건대 아무래도 지혜로운 나무가 관심을 두게 된 부분은 증기기관인듯한데 기본적인 원리야 가르쳐줄 수 있다 한들 제대로 가르치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테니까.

이에 정성국은 타협안을 제시했다.

"연구청의 경우 그곳에 배속되려면 기본적인 지식이나 기술을 필요로 하는 만큼 당신이 당장 그곳에서 일하긴 어려울 겁니다. 일단 당신이 흥미를 느낀 기선의 원리가 설명된 책을 빌려드리지요. 그리고서도 연구청에서 일하고 싶으시다면 저에게 이야기하세요. 가르쳐 드릴 테니. 다만 다른 곳과는 달리 꽤 많은 공부를 해야 할 겁니다."

정성국의 말에 지혜로운 나무는 무슨 의미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음...무슨 뜻인지 알겠네. 배려해줘서 고맙군."

"아닙니다."

그때 웅크린 늑대가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입을 열었다.

”다른 곳에서 일하는 것도 마찬가지 아닌가?“

이에 정성국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행정 관료로 일을 하려면 배울 것이 꽤 많지요. 다만 연구청의 경우는 다른 곳보다도 배울 지식이 훨씬 많기에 그런 겁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군.”

정성국의 말에 다른 대추장들은 잠시 고민하다가 결정을 미루었다.

“시간이 좀 필요할 듯싶네. 우리끼리 의논도 좀 해야 할 테고.”

“편한 대로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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