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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44화 (44/850)

44화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어둑어둑한 새벽.

개척촌의 한 선착장에 정박해 있는 기범선을 배경으로 두 남자가 조용히 이야기하고 있었다.

"흐음...물건은 다 실었나?"

"예. 일단 창 촉 5천여 개와 신식소총 2백 정 모두 실었습니다."

투로시노의 요청에 따라 정평국은 형과 미리 의논했던 대로 직접 왜인들과 싸워야 하는 홋카이도 아이누인들을 무장시킬 창촉 5천개와 아이누섬의 아아누인들을 무장시킬 신식소총 2백 정과 당분간 사용할 탄환 2만 발을 기범선에 실었다.

신식소총은 말 그대로 새로 만든 소총으로 갑오 소총을 베이스로 한 새로운 모델이다.

다만 실제로는 갑오 소총의 다운그레이드 형으로 강평화가 정성국의 명령으로 이를 개발한 후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꾸준히 만들어 연구소의 지하에 잘 보관하고 있다가 이번에 꺼냈다.

정성국은 당장 막부와의 다툼을 꺼렸기에 일단은 아이누인들이 자체적으로 무장할 수 있게 뒤에서 돕고 그들의 힘으로 마쓰마에 번을 물리치기를 원했다.

마쓰마에 번은 그렇게 대단한 세력을 갖춘 번이 아니라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보았고.

물론 마쓰마에 번이 아이누인들에게 계속 깨진다면 결국은 막부에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테니까.

그러한 시간을 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선장. 투로시노를 잘 설득해주게."

그 말에 박헌수 선장은 정평국을 보고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자신했다.

"알겠습니다. 투로시노도 결코 바보가 아닙니다. 저희의 제안을 받아들일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지요."

원상의 제안은 간단했다.

신식소총과 물자를 제공할 테니 신식소총을 사용할 부대를 만들고 명목상의 지휘관은 투로시노로 하되 부 지휘관을 따로 두고 실제로 부대를 지휘하는 부 지휘관은 이쪽에서 사람을 보내 임명하겠다고.

그리고 부대의 출전은 전적으로 부 지휘관의 결정에 달렸다고.

결국, 명목상으로는 아이누인들의 부대가 되겠지만 실제로는 원상의 무력단체에 가까운 형태가 될 것이다.

부대의 운영비도, 지휘권도 모두 원상이 갖게 되니까.

정평국이 생각하기에는 과연 이 조건을 투로시노가 받아들일까 싶었지만 아이누인들의 사정을 잘 아는 박헌수는 투로시노가 이 제안을 충분히 받아들일것이라고 보았다.

아이누인들이 원상과 교류하며 조금씩 부유해지고는 있었지만 당장 200명의 병사로 구성된 부대를 창설하고 그를 유지하기는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에 마쓰마에 번과 한번 싸워서 이긴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투로시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만큼 원상의 제안을 거절하기는 쉽지 않다고 본 박헌수 선장이었다.

그런 박헌수 선장의 생각과는 달리 정평국은 다른 것은 몰라도 부대의 출전을 투로시노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과연 이 제안을 받아들일까 싶긴 했다.

그런데도 저 조건을 붙인 이유는 하나였다.

당장 마쓰마에 번과 싸울 때는 새로운 부대의 출전을 막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마쓰마에 번의 규모는 크지 않고 번의 경제력을 나타내는 석고는 1만 석 정도.

즉 마쓰마에 번에서 동원할 수 있는 병사는 많아야 500 내외였다.

형 정성국은 대략 100석당 2, 3명 정도의 병사를 동원할 수 있다고 말했었으니.

그런 만큼 이번에 홋카이도 아이누들에게 보내주는 창 촉으로 아이누인들이 무장하고 제대로만 싸운다면 첫 전투는 충분히 승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렇기에 신식소총으로 무장한 부대를 아낄 생각이었다.

비장의 패를 함부로 보여줄 수는 없었으니까.

물론 그것을 투로시노가 탐탁지 않아 할 것은 분명했지만 그 이후를 생각해야 했다.

마쓰마에 번이 인간으로도 취급 안 하던 아이누인들에게 패하고 그냥 물러날 리가 없지 않은가.

주변에 도움을 요청해서 병사를 끌어모아 다시 한번 토벌하려 들 테고 그때쯤 부대를 출동시킬 생각이었다.

'그리고 무조건 승리해야지.'

정성국은 막부가 직접 나서지 않는 한은 이 정도로 충분하리라고 봤지만 정평국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할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원래 정성국이 세웠던 계획과는 달리 새로운 부대의 지휘관들로 개척촌의 경비대원들을 뽑아 보낼 생각이었고.

거기에 새로운 부대를 도울 갑오 소총으로 무장한 개척촌의 경비대원들을 추가로 보낼 생각이었다.

원상이 직접 개입한 만큼 무조건 승리해야 했으니까.

그래야만 아이누인들이 원상을 믿고 왜놈들에 대항해 자신들의 영역을 지킬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 계획을 짜고 있는 정평국이었기에 부디 투로시노가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였으면 했다.

"그렇다면 다행인데...그럼 문제는 언제 왜인들이 군사를 일으키느냐 하는 거군."

그러자 박헌수는 턱수염을 매만지면서 입을 열었다.

"음...제가 포로나이에서 출항할 때만 해도 당장 왜놈들이 병사를 일으킬 것 같지는 않았으니 아직 시간은 좀 남아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어쨌든 투로시노가 최대한 빨리 우리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해주게. 화약 무기에 익숙하지 않은 아이누인들인 만큼 부대를 조직하고 훈련하는데는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릴걸세."

"알겠습니다. 대방 어르신."

* * *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씨였기에 오히려 정성국은 쨍쨍한 햇살이 부담스러운지 손을 들어 눈 위로 가져다 대었다.

'이거 선글라스부터 만들어야 하나...'

정성국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김봉길이 선착장에서 정성국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총독 어르신."

그 말에 정성국은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움직여 눈두덩이를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단기간에 그 많은 보고서를 다 읽어보고 일일이 답장을 해줘야 하니 잠을 좀 줄일 수밖에."

"어...출발 시기를 좀 늦추면 되는 것을요."

"그럴 수야 있나. 내가 잠을 좀 덜 자면 그만인 것을. 아무튼, 예상외였어. 그렇게 기술 발전이 빠를 줄은. 천급 함선의 건조도 순조롭고."

그러자 김봉길은 정성국을 바라보고 히죽 웃었다.

"그게 다 그분께서 나서서 그런 겁니다. 특히 기동이나 주명이는 그분을 볼 때마다 안색이 창백해지던데요?"

정성국 역시 박기동과 최주명이 보낸 보고서 말미에 전아라부터 빨리 데려가면 안 되겠느냐고, 이대로 가다가는 말라 죽겠다고 적혀있는 것을 보고 상황을 대충은 짐작했었기에 헛기침하며 잽싸게 말을 이어나갔다.

"크흠. 어쨌든 다행이야. 증기기관의 발전이 생각보다 빨라서 곧 제대로 된 기선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니 말일세."

"예. 특히 제가 떠나기 전에 개척촌에서 건조 중이던 새로운 기선이 제대로만 굴러간다면 지급 함선을 몽땅 개조한다고 기동이가 벼르더군요."

김봉길의 말에 정성국은 박기동이 보낸 보고서를 떠올렸다.

박기동의 보고서엔 이번에 새롭게 200마력의 증기기관을 성공적으로 제작했다는 보고와 함께 이 증기기관 2개를 한 배에 장착하는 새로운 방식의 기선을 건조 중이라고 했다.

박기동은 정성국이 개척촌을 떠나기 전에 가이드라인으로 제시한 톤 당 1마력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2천 마력의 증기기관을 목표로 하고 증기기관 개량에 매진하고 있었는데 그게 어디 쉽겠는가.

이제 막 200마력의 증기기관을 개발하고 한숨을 돌린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다른 방법은 없나 고민했고 그 결과가 바로 한 배에 증기기관 여러 개를 설치하는 방법이다.

다만 배의 특성상 공간은 한정되어 있었기에 2개의 증기기관 장착이 한계였지만 그것만 해도 어딘가.

이 방식이 성공한다면 당장 목표가 2천 마력의 증기기관의 개발에서 1천 마력으로 확 줄어드는 판에.

그러다 보니 일단 시험 삼아 인급 함선을 베이스로 한 새로운 기선을 건조 중이라고 알려왔다.

500톤급의 선체에 200마력 증기기관 2개를 장착한 2 스크루 프로펠러의 기선.

정성국이 제시한 톤당 1마력에는 살짝 미치지 못하지만 한번 실제로 건조해 시험 운용해볼 만은 하다고 판단해서 새롭게 건조를 하고 있다고.

그리고 이 새로운 기선이 성공한다면 일단 지급 함선에 이 200마력 증기기관 2개를 장착해서 기범선으로 개조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도 있었다.

정성국이 보기엔 썩 괜찮은 방식이었다.

그래서 여러 조언을 편지에 덧붙여 써두었고.

"아아. 그 새로운 기선 말이군. 보고서를 살펴보니 정말 기대되더군. 정말 자네 말마따나 그 새로운 기선이 제대로 굴러간다면 거기에 장착된 증기기관을 양산해서 지급 함선에 장착하는 것도 괜찮아 보이더군. 어차피 곧 있으면 천급 함선의 건조도 완료될 테고 그러면 속도 차이가 너무 심할 텐데 잘 되었어."

천급 함선의 건조 역시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최주명의 보고서를 보고 고민이 컸던 정성국이었다.

설계를 뜯어고쳐 적재량을 희생하더라도 속도를 택한 클리퍼처럼 선형을 바꾸고 마스트도 늘린 만큼 천급 함선의 속도는 지급 함선보다는 훨씬 빠를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주 선단을 둘로 나누어 운용한다 해도 서로 간에 속도가 너무 차이가 나면 이주민들이 지급 함선을 타길 꺼릴까 봐 고민했는데 지급 함선이 기범선으로 개조되고 속도가 증가한다면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한 정성국이었다.

‘물론 실제로는 신형 기선을 운용하고 괜찮으면 지급 함선 한 척을 개조해 시험 운용을 해 보고 나서 결정해야 하니 시일이 꽤 걸릴 테지만 천급 함선이 양산되면 지급 함선은 물자만 운용하려고 생각했었으니 차라리 잘 되었지.’

"헌데 생각보다 증기기관이 차지하는 공간이 너무 커서 의외로 적재량은 적을 것 같던데 말입니다."

그에 정성국은 어깨를 으쓱했다.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 없다면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상황이니 말이다.

"그건 어쩔 수 없지. 이번에 기동이 녀석이 만드는 기선은 적재량을 희생한 대신 속도를 택한 녀석이니까. 다만 기선이 기대만큼 빠르다면 충분히 감수할 만하네. 배를 띄울 수 있는 시기는 한정되어 있으니 오히려 속도가 빠른 게 나아."

"그거야 그렇죠. 정말 기동이의 장담처럼 지급 함선을 기범선으로 개조해서 2배 가까이 빨라진다면 항해하는데 넉넉잡고 25일이면 된다는 소리 아닙니까."

현재 개척촌에서 이곳 새김포까지 도착하는데 대략 45일이 걸리는 상황에서 이 시일을 반으로 단축할 수 있다면 적재량이 확 줄어드는 건 감수할 만하다.

"그렇지. 그러면 자네가 더 바빠질걸세. 바다에서 머무는 시간이 더 길어질 테고."

김봉길을 보고 안쓰러운 표정을 지은 정성국이었고 김봉길은 그런 정성국을 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뭐 뱃사람이 바다에 머무는 건 당연한 거죠."

그러면서 김봉길은 선착장에 서서 정박해 있는 지급 함선들을 바라보았다.

그를 통해 출항 준비가 대략 끝났다는 사실을 파악한 김봉길이 정성국과 인사를 나누었다.

"이제 슬슬 가보겠습니다. 총독 어르신."

"조심히 가게. 선장."

"예. 내년에 뵙겠습니다."

"그래. 내년에 보자고."

그 말을 끝으로 김봉길이 선착장을 걸어가다가 문득 생각난 듯 몸을 돌리고 정성국을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헌데 총독 어르신."

"음? 무슨 일인가."

무슨 일인가 싶어 어리둥절한 정성국이 김봉길을 바라보자 김봉길이 실실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혹시 그 하얀 들꽃이라는 처자에 관한 이야기를 그분께 해도 됩니까?"

"응? 이 사람아! 그 아이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아라에게 괜한 소리 하지 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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