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김봉길은 정성국을 따라 이동하면서 새김포를 둘러보고 감탄했다.
김봉길이 기억하는 새김포는 이곳에서 가정을 이룬 선원 몇몇이 거주하는 건물 외에는 야영지에 천막만이 빼곡했던 장소였기 때문이다.
"여기도 많이 발전했군요. 기껏해야 야영지만 있던 곳이었는데요."
그 말에 정성국은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이주민들의 노력과 원주민들의 도움 때문이지."
"이 정도면 아이누 섬의 포로나이보다 더 규모가 큰 것 같습니다."
"포로나이?"
정성국이 의아한 듯 되묻자 김봉길은 주위를 둘러보던 것을 멈추고 정성국을 바라보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 아이누인들은 아이누 섬의 항구이자 마을을 포로나이라고 부르더군요. 투로시노 말로는 항구 옆에 있는 큰 강의 이름을 따 지었다고 합니다."
오랜만에 투로시노의 이름을 듣자 정성국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의 안부를 물었다.
"그래? 참. 그들은 잘 지내나?"
"그럼요. 다만 포로나이의 이름이 알려지고 수많은 아이누들이 그곳으로 교역하러 오면서 슬슬 문제가 생길 것 같더군요. 그걸 투로시노도 걱정하고 있고."
김봉길의 대답에 정성국은 어떤 문제가 생길지 짐작했기에 인상을 찡그렸다.
애초에 아이누 섬에 커다란 시장을 조성하고 다른 섬에 사는 아이누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짐작했었기에.
"역시 마쓰마에 번 때문이겠지?"
그러자 김봉길은 안색을 굳히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예. 홋카이도의 아이누들이 굳이 엄청난 손해를 보면서 그들과 교역을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홋카이도의 아이누들이 모두 포로나이로 와서 교역을 하다 보니 마쓰마에 번 근처에는 아이누들이 얼씬도 안한다더군요."
"그래서?"
"일단 마쓰마에 번도 포로나이의 존재는 알게 된 것 같습니다만...당장 포로나이를 공격할 마음은 없는것 같습니다."
의외의 대답에 정성국은 조금 놀랐다.
'걔들이 그럴 리가 없는데? 뭐지?'
마쓰마에 번은 16세기 후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신종하며 에조치에 대한 지배권을 공인받았다.
이 에조치는 홋카이도 남쪽 오사마 반도를 제외한 홋카이도 전역과 사할린섬, 쿠릴 열도까지 포함되는 광활한 지역이다.
실제로는 고작 홋카이도 남쪽 오사마 반도만을 장악하고 있는 마쓰마에 번이었지만 명목상으로는 에조치 전역이 그들의 영역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마치 북미의 모든 영토는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하는 스페인과 닮아있었달까.
다만 북미의 경우 워낙 멀리 떨어져 있어 본토에서 함부로 병력을 동원하기 어려웠지만 막부는 마음만 먹는다면 병력을 동원하는 일이 가능했다.
그렇기에 정성국이 직접 이 지역에 이주민들을 정착시켜 발전시키기보다는 이 지역의 원주민들인 아이누인들을 돕는 형태로 일을 진행하는 것이다.
마쓰마에 번이라면 몰라도 막부는 아직 부담스러웠으니까.
"그래?"
"예. 포로나이를 공격할 마음이 있었다면 어떻게든 배를 끌어모았을 텐데 전혀 그런 행동을 보이지 않는답니다."
"흐음...그럼 우리가 개입한 것을 알아챈 거 아니야? 그래서 포로나이를 아이누인들이 직접 세운 마을이라고 보지 않는거고? 그렇지 않으면 아이누인들을 무시하는 왜인들이 포로나이를 그냥 두고 볼 리는 없을 텐데?"
그 말에 김봉길은 고개를 흔들며 투로시노가 전해주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렇다기보다는 아마 간혹 드나드는 지급 함선이나 기범선을 보고 자중하는 듯 합니다. 서양의 배로 오해하고 있을 수도 있구요. 저들도 지급 함선 규모의 배에 얼마나 많은 대포가 실려있는지 모르진 않으니까요. 괜히 그런 배들이 드나드는 항구를 점령하겠다고 공격했다 공격이라도 받으면 골치 아프지 않겠습니까?"
김봉길의 말이 일리는 있었지만 그래서 그들의 행동이 더 이해가 가지 않는 정성국이었다.
'걔들이 그리 상식적인 애들이 아닐 텐데? 아...마쓰마에 번은 막 나갈 정도로 힘이 없어서 그런가?'
"그래? 허나 계속해 두고 보지는 않을 텐데? 이대로 가다간..."
"예. 마쓰마에 번은 파산할 테니 말입니다."
이 시기 홋카이도에서는 쌀 재배가 불가능했기에 마쓰마에 번은 엄밀히 따지자면 고쿠다카(石高)가 없어 다이묘가 될 수 없었다.
다이묘는 1만 석 이상의 쌀을 생산하는 영지의 주인을 일컫는 말이니까.
다만 아이누인들과의 교역을 통해 얻는 상업적 이익이 곡물 산출량으로 추산해 보면 1만석 정도는 된다고 알려져 1만석 격(格)으로 지정되었을 뿐.
비슷한 예로는 대마도주가 그런 식이었고.
그런 만큼 아이누인들과의 교역이 사라지면 마쓰마에 번은 파산할 수밖에 없었다.
"허면 저들은..."
그러자 김봉길은 안색을 굳히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아마 군사를 일으키지 않을까 싶답니다."
그 말에 정성국은 혀를 찼다.
"쯧. 역시 그런가? 그럼 배를 준비하고 있지는 않다고 하니까..."
"예. 투로시노의 예상으로는 포로나이를 공격하는 것은 아무래도 부담이 되는 만큼..."
"일단은 홋카이도의 아이누들을 공격하겠군. 그들을 노예로 삼겠지. 쯧. 그래서 투로시노는 뭐라던가."
그 말에 김봉길은 이번 항해 도중에 만난 투로시노를 떠올리고 그의 요청을 정성국에게 전했다.
"저희의 사정을 잘 안다면서 직접적인 개입을 요청하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마쓰마에 번에서 군사를 일으켜 남쪽에 있는 동족을 공격한다면 포로나이의 아이누인들도 도우러 갈 거라면서 무기를 요청했습니다."
그 말에 정성국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별말 하지 않았다.
애초에 예상되었던 문제이니만큼 미리 동생인 정평국과 다 이야기를 해 둔 상황이었기에.
"설마 투로시노가 자네에게만 그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겠지?"
"물론입니다. 지금쯤이면 기범선을 통해 개척촌에도 알려졌을 겁니다."
"그럼 됐군."
그 말에 오히려 김봉길이 호기심 어린 눈길로 정성국을 바라보았다.
"어? 그럼 됐다는 말씀은?"
"이미 그런 상황이 올 줄 알고 평국이와 다 이야기해 두었네."
정성국의 대답에 김봉길은 놀라 감탄을 토했다.
"허어. 그러십니까? 역시 총독 어르신의 혜안은..."
김봉길이 정성국의 혜안을 찬양하려는 낌새를 눈치챈 정성국은 잽싸게 말을 막았다.
뻔히 예상되었던 일이었기에 미리 계획을 세웠을 뿐인데 저런 찬양을 듣는 건 오히려 곤욕이었기 때문이다.
"됐고. 나와 상의할 일은 뭔가."
정성국의 재촉에 생각난 듯 김봉길이 입을 열었다.
"아. 봉길 섬에 대한 문제입니다."
정성국은 봉길 섬에 대해 상의할 것이 있다는 소리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봉길 섬? 거긴 왜?"
"이번 항해도 순조로웠습니다. 그런데 봉길 섬에서 꽤 많은 시일을 지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음? 뭣 때문에?"
"식량 때문이지요. 포로나이에서는 미리 준비되어 있던 식량을 배에 옮겨 싣기만 하면 되는데 봉길 섬에서는 직접 사냥을 하고 물고기를 잡아서 장기간 보관할 수 있게 처리를 해야 하니 말입니다."
김봉길의 답변을 듣고 정성국은 잠시 작년의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흠...물론 사람이 많아서 더 많은 식량이 필요한 것은 알지만...작년에만 하더라도 큰 문제는 없지 않았나? 그만큼 일손도 늘어나서 크게 상관없었던 것 같은데? 식량이야 봉길 해의 풍부한 어장을 생각하면..."
그러자 김봉길이 고개를 흔들며 식량 채집의 어려움을 이야기했다.
"그렇긴 한데 제대로 된 어선이 없다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려서..."
김봉길의 말에 정성국은 그제야 깨달았다.
"아. 무슨 소린지 알겠네. 오히려 일손이 남아돌았겠군."
"예. 그렇습니다. 다음 항해에는 더 많은 이주민이 이동할 텐데 계속해서 시간이 지체될 겁니다."
그러자 정성국은 매끈한 자신의 턱을 매만지면서 잠시 고민하다 결국 김봉길이 원하던 말을 해줬다.
"흠. 결국, 계획을 좀 앞당겨야겠군."
"예."
"그럼 이렇게 하지. 기범선은 아이누 섬을 오가는데 바쁠 테니 다음 이주민들 가운데 일부를 봉길 섬에 정착시키는 방향으로 가지. 내년은 불편을 감수해야겠지. 아니면 몇 척 선행해도 될 테고."
추후에 기범선이나 기선이 늘어나면 봉길 섬을 오가는 배를 배정하고 봉길섬에 정착할 이주민을 선발할 생각이었으나 이렇게 된 이상 이곳 새김포로 오는 이주민 중에 일부를 봉길 섬에 남기기로 했다.
이곳은 원주민들의 합류로 당장 인력이 부족하진 않으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총독 어르신. 개척촌에서 상의해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거기에 정성국은 내친김에 항로 중간에 들를 항구를 더 만들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렇게 된 거 중간중간에 항구를 더 만들긴 해야겠군."
"허면?"
"일단 아이누 섬과 봉길 섬 사이에, 그리고 봉길 섬과 이곳 새김포 사이에 정박할 항구를 하나씩 더 만들면 되겠지. 위치는 카무이 반도에 하나, 그리고 이곳 북쪽에 적당한 자리를 알아봐야겠군."
그러면서 정성국은 머릿속에서 북미 지도를 떠올렸다.
'봉길 섬과 이곳 사이에 들를만한 곳은 한 군데뿐이지. 결국, 밴쿠버 지역으로 탐사대를 보내긴 해야겠네. 이번에 기선이 만들어지면 한 척은 빼서 북쪽을 탐사해야겠구나.'
이런 정성국의 말에 반색하는 김봉길이었다.
"그럼 한결 빠르고 편하게 이주가 가능할 겁니다. 아무래도 지금은 아이들이 있는 가정은 이주를 못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당장 항구가 세워지고 편하게 이주가 가능할 거로 생각하는 모습이라 정성국은 애써 그의 기대를 꺾기 위해 현실을 말해줬다.
"음...그렇겠지. 다만 당장은 힘들 걸세. 카무이 반도는 몰라도 다른 항구는 이쪽에서 만들어야 할 텐데 아직은 여력이 없으니까. 그리고 개척촌도 당분간은 아이누인들을 지원하는데 바쁠 테니."
그런 정성국의 말에 김봉길은 시무룩해지며 투덜댔다.
"그렇기야 합니다. 에잉. 왜놈들은 참 도움이 안 되네요."
"그러게나 말일세."
그렇게 대꾸한 정성국은 자신이 없는 동안 개척촌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묻기 시작했다.
"개척촌에 별일은 없지?"
"그럼요. 뭐 꾸준히 유민들이 유입되는 상황이라 그들을 적당히 교육해 포로시르 항으로 보내는 상황인걸요."
갑자기 튀어나온 단어에 정성국은 의아하다는 듯 김봉길을 바라보았다.
"포로시르 항은 또 어딘가? 이름을 보니 아이누 섬에 있는 항구인 것 같은데."
그러자 김봉길은 아차 한 듯 자신의 이마를 치면서 바로 대답했다.
"아. 그러고 보니 총독 어르신의 얼굴을 보겠다고 바로 내려서 개척촌에서 보낸 수많은 서류와 편지를 아직 못 드렸군요. 포로시르 항은 아이누 섬 중앙에 있는 탄광 근처에 만들고 있는 새로운 항구의 이름입니다. 항구 근처에 커다란 산이 있어 그렇게 부른다더군요."
그 대답에 정성국은 포로시르 항의 위치를 짐작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포로나이 항이 기다란 아이누 섬의 남쪽에 있다면 포로시르 항은 아이누 섬의 서쪽 해안의 중앙 부근에 자리잡고 있었다.
"아. 기억나네. 탄광이 포로나이 항과는 거리가 멀어서 운반하기 힘들다고 차라리 새로운 항구를 건설한다더니 그곳인가 보군."
"예. 그렇습니다."
그러자 정성국은 개척촌의 업무를 짐작해보고는 혀를 찼다.
"쯧쯧. 개척촌에 있는 친구들은 죽어나겠는데? 이래서야 그쪽에서 행정인력을 빼 오긴 힘들겠군."
그 말에 김봉길은 행정청에 근무하는 자신의 친구를 떠올리곤 말을 흐렸다.
"어...지금도 일이 많아 반쪽이 된 친구들이 꽤 많습니다만..."
그런 김봉길의 반응으로 개척촌의 사정을 짐작한 정성국은 안색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결국, 개척촌에서 행정인력을 빼낼 수 없다면 이곳에서 알아서 해결해야 하니 말이다.
"끙. 결국, 알아서 해결해야 하나."
"하하하. 아마 그러셔야 할 겁니다."
크게 웃던 김봉길은 이내 몸을 돌렸고 그런 김봉길을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는 정성국이었다.
"자네 어디 가려고?"
"배에서 총독 어르신께 전해야 하는 보고서와 편지를 가져오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면서 김봉길은 정성국을 보고 히죽거렸다.
"제가 볼 때 총독 어르신이 가장 기다리는 게 바로 그분의 편지 같은데.“
”크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