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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42화 (42/850)

42화

"이...이걸 타고 가야 하나요?"

하얀 들꽃은 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생물을 보고 얼어붙었다.

그런 하얀 들꽃의 반응을 본 정성국이 그제야 깨달았다.

하얀 들꽃은 말을 타본 적이 없다는 것을.

"음? 아...말을 타본 적이 없겠구나. 어쩐다..."

정성국은 잠시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반응을 본 하얀 들꽃은 잠시 저 거대한 생물을 탈 용기를 쥐어짜 내기 위해 노력했지만 어떻게 올라탄다 해도 정성국을 따라갈 자신이 없었다.

이에 시무룩해진 하얀 들꽃은 고개를 푹 숙이고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방해된다면 이곳에 남아 총독 어르신을 기다리겠습니다. 다녀오시지요."

그런 모습을 보고 정성국은 잠시 고민했다.

목적지를 듣고 하얀 들꽃이 몹시 기대하던 모습이 기억났기에 두고 간다는 선택지는 지웠다.

문제는 같이 걸어갈 것인가, 아니면 함께 말을 타고 갈 것인가인데 걸어갔다가는 오늘 하루를 날릴 테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진작 마차를 만들어 둘 걸 그랬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정성국은 하얀 들꽃에게 손을 내밀었다.

"쩝...할 수 없지. 같이 타자."

"예?"

"뭐해. 손잡아."

"어...예."

하얀 들꽃이 조심스럽게 정성국이 내민 손을 붙잡자 정성국은 하얀 들꽃을 자신의 등 뒤에 태웠다.

"혹시 모르니 잘 붙잡고 있어. 알았지?"

그러자 정성국의 뒤편에서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그럼 가자! 이럇!"

* * *

정성국은 오랜만에 집무실을 나와 새김포 외곽에 있는 농업연구소를 방문했다.

농업연구소는 정성국이 이곳에 도착하자 만든 여러 연구소 중의 하나로 일단은 종자의 품종 개량을 위해 만들긴 했지만 당장은 조선에서 가져온 여러 종자들을 시범 재배한 후 이주민과 원주민들에게 종자를 나눠주는 일을 주로 하고 있었다.

그런 농업연구소에서 이번에 과일의 재배에 성공했다는 보고를 올리자 하얀 들꽃이 새로운 과일을 궁금해 했고 정성국도 이곳에서 재배한 과일은 어떤 맛일지 궁금하기도 하고 오랜만에 바깥공기를 쐴 겸 잠시 방문해보기로 했다.

정성국이 하얀 들꽃과 호위대장과 함께 농업연구소에 도착하자 농업연구소의 소장이 밭을 돌아다니다가 그 소식을 듣고 과일을 따서 잽싸게 달려왔다.

"오! 이건? 여기서 수확한 건가?"

"예. 총독 어르신."

"그래? 바로 먹어보자. 맛이 어떨지."

그러면서 정성국은 과도를 들고 직접 과일의 껍질을 깎았다.

호위대장이 인상을 찡그리건 말건 순식간에 과일의 껍질을 깎은 정성국은 이내 하얀 속살의 과일을 반으로 잘라 안에 씨를 적당히 긁어낸 후 뒤에 있는 하얀 들꽃에게 맛보라고 넘겨주었다.

"자. 여기."

"이건...?"

"참외라는 거야. 한번 먹어봐."

정성국이 건네준 참외를 조심스럽게 얼굴에 가져다 댄 하얀 들꽃은 곧 달짝지근한 냄새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로 한입 베어 물었다.

"아...아...이건 정말..."

처음으로 참외를 먹어본 하얀 들꽃은 아삭하면서도 달짝지근한 그 맛에 감동했는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하얀 들꽃을 보고 피식 웃은 정성국은 이내 자신의 손에 들린 참외를 한입 베어 물고 그 당도에 감탄했다.

"오. 맛있네? 이거 조선에서 먹었을 때보다 더 단 거 같은데?"

그 말에 농업연구소의 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무래도 이곳 기온이 더 높다 보니 당도도 더 높은 것 같습니다."

"그러게. 어때? 맛있지?"

정성국은 참외를 다 먹고 손가락을 쪽쪽 빨고 있는 하얀 들꽃을 바라보았다.

"예. 어떻게 이런 맛있는 열매가 있을 수가 있죠? 이건 정말..."

참외의 맛에 놀라 눈물을 글썽이는 하얀 들꽃을 보고 정성국은 씨익 웃었다.

"참외로 놀라면 곤란한데?"

그러면서 정성국은 옆에 있는 커다란 과일에 과도를 가져다 댔다.

그러자 쩍 소리가 나며 과일에 금이 갔고 이를 보고 정성국은 감탄했다.

"우와. 잘 익었나 본데?"

정성국은 잽싸게 칼을 놀려 커다란 과일을 큼지막하게 잘라냈다.

그러다 문득 정성국은 자신의 옆을 바라보았다.

정성국의 말을 듣고 엄청나게 기대하면서 새로운 과일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하얀 들꽃을 보고 피식 웃으며 먹기 좋게 삼각형으로 자른 과일을 한 조각 건넸다.

"자. 여기."

정성국이 건네준 과일을 조심스럽게 받아 든 하얀 들꽃은 참외와는 전혀 다른 과일의 속살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색깔이 참 이쁘네요."

"빨간 게 먹음직스러워 보이지? 먹어봐. 아. 이건 참외하곤 다르게 그 빨간 속살만 먹는 거야. 그리고 속살 안에 있는 검은 씨는 먹지 말고 뱉어. 자. 자네들도 하나씩 가져가고."

참외야 주먹만 했으니 못 먹어본 하얀 들꽃만 먼저 챙겨주었지만, 수박이야 워낙 커서 그럴 필요가 없었기에 호위대장과 농업연구소의 소장에게도 수박을 권했다.

""예.""

그들은 오히려 수박의 맛을 알기에 잽싸게 수박을 가져갔고 정성국 역시 기대하며 수박을 한입 크게 베어 물었을 때 먼저 수박을 맛본 하얀 들꽃이 다시 탄성을 토했다.

"아...이것도 정말 달군요. 거기에 물도 많고. 거기에 이건 커다래서 양도 많네요. 생긴건 호박처럼 생겼는데 맛은 전혀 다르네요. 이건 이름이 뭔가요?"

"아. 이건 수박이라는 과일이야. 음. 맛있네. 역시 여름엔 수박이 제일이지. 뭐 미리 시원한 물에 담가놓았다가 먹으면 더 맛있겠지만..."

다만 미지근한 수박이라 불만이 생긴 정성국이 시원한 수박이 생각나 저도 모르게 말을 덧붙이자 농업연구소의 소장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방문하실 거라고 미리 말씀하셨다면 준비했겠습니다만..."

그 말에 딱히 할 말이 없었던 정성국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손에 든 수박을 다 먹어 치우고 입가를 닦고 나서 말했다.

"뭐 겸사겸사 들른 거라. 그럼 이제 참외와 수박은 내년부턴 원주민들도 맛볼 수 있겠지?"

그 말에 옆에서 벌써 3번째 수박 조각을 해치우고 있던 하얀 들꽃이 고개를 들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농업연구소의 소장을 바라보았다.

"그게 정말인가요!"

그런 하얀 들꽃의 반응에 농업연구소의 소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장담했다.

"예. 아마 내년 여름엔 원주민들 모두가 참외와 수박을 맛볼 수 있을 겁니다."

"아아..."

그 말에 기뻐 어찌할 줄을 모르는 하얀 들꽃이었다.

아무래도 이 맛있는 과일을 다른 원주민들도 맛볼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쁜 모양새다.

세상 다 가진 듯한 하얀 들꽃을 보고 정성국은 피식 웃은 후 농업연구소의 소장을 바라보았다.

"다른 과일들은 아직 수확하지 못했지?"

"예. 아직은 묘목이니까요. 제대로 자라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립니다."

"에휴. 언제 늘려나간담."

아무래도 한해살이 식물인 참외, 수박과는 달리 다른 과일의 경우는 열매를 맺기까지 성장하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꽤 많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정성국의 투덜거림에 농업연구소의 소장은 허허롭게 웃었다.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겠지요. 다만 꾸준히 과실수 묘목을 가져오는 만큼 10년 내로 충분히 조선에서 즐겼던 과일들을 다 맛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기야 하지..."

그러면서도 정성국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어차피 다른 과일들이야 맛도 별로 없어서 감을 빼면 크게 기대는 안 되는데. 아. 조선과는 기후가 다르니 맛도 다르려나. 생각해보면 캘리포니아는 포도하고 오렌지가 유명하긴 했지. 오렌지야 뭐...당장은 구할 방법도 없고 대신 감귤 묘목을 키우는 중이니 기대해 봐야겠네. 포도는...이곳의 기후가 기후이니 당도도 더 높을테고...그러면 와인도 만들 수 있으려나? 아. 품종이 달라 힘들려나?'

고려 시대에 원나라를 통해 포도가 전파된 이후로 자연스럽게 포도주가 만들어졌다.

다만 이 포도주와 유럽의 와인은 뜻만 포도주로 같을 뿐 만드는 방식이 조금 달랐다.

유럽의 와인의 경우 당도가 충분해 포도만을 이용해 술을 담갔지만 조선의 포도주는 한반도의 기후 때문에 포도의 당도가 떨어져 쌀과 누룩을 사용해 당을 보충해서 발효시켰기 때문이다.

허나 방금 먹어본 참외나 수박도 기후가 달라서 그런지 조선에서 먹던 맛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달고 맛있었기에 정성국은 포도도 당도가 높아져 쌀의 소모 없이 술을 만들 수 있기를 기대했다.

* * *

집무실에서 서류를 살피고 있던 정성국과 그 옆에서 그를 도와 서류를 정리하고 있던 하얀 들꽃이 막 서류더미를 들고 집무실을 나가려 했을 때 갑자기 집무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호위대장이 급히 집무실로 들어왔다.

"총독 어르신!"

"무슨 일인가?"

"지급 함선이 보인다는 보고입니다!"

그 말에 정성국은 들고 있는 서류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급히 일어났다.

그러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생각보다 늦은 도착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은 아닌가 걱정해 관측병까지 배치했던 정성국이었기에 이주민들이 탄 함선이 도착했다는 사실이 더욱 반갑게 느껴졌다.

"후우. 드디어 도착한 건가?"

"예.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정성국은 급히 집무실을 나가면서 자신을 따라오려는 하얀 들꽃을 보고 부탁했다.

"그래. 그럼 나가 보자고. 아. 하얀 들꽃은 주변 부족에 사람을 보내서 다시 한번 알려. 딱 일주일간은 방문을 자제해 달라고."

미리 말해두었지만, 다시 한번 확인하라는 정성국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하얀 들꽃이었다.

"예. 총독 어르신."

"좋아. 그럼 나가 볼까?"

* * *

"이야...이건 좀 장관인데?"

"그...그러게 말입니다. 총독 어르신."

재빠르게 선착장으로 달려간 정성국의 시야에 1천 톤급 함선인 지급 함선 7척이 동시에 다가오는 모습이 보이자 정성국은 그 웅장함에 감탄사를 토했다.

'고작 범선을 보고 이렇게 감탄할 줄은 몰랐는데...이건 또 묘한 감흥이 있네.'

아무래도 정성국은 예전 기억이 있었고 전생에는 수많은 거대한 배들이 존재했기에 지급 함선이고 천급 함선이고 배 한 척으로는 정성국의 눈에 찰리가 없었다.

조선인들 입장에서는 거대한 함선이 어떻게 저렇게 떠다니는지 의아해할 정도였지만 정성국은 거대한 항공모함이나 유조선 등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하지만 그런 정성국도 두 눈으로 직접 지급 함선 7척이 선착장에 가까이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 감탄할 정도였으니 새김포에 머무는 조선인들과 근처의 원주민들의 심정은 어떻겠는가.

단적으로 뒤에서 따라오던 걸음을 멈추고 호위대장과 호위대원들도 입을 벌리고 바라보고 있었고 선착장 주변으로 이러한 장관을 구경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몰리기 시작했다.

이를 보고 정성국은 급히 호위대원들을 보내 방위대원들을 불러왔다.

혹시 모를 사고를 막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선착장에 어느 정도 혼란이 가라앉았을 때 선두에서 다가오던 지급 함선이 석회로 만든 커다란 선착장에 정박했고 정성국은 지급 함선에서 가장 먼저 내리는 사람을 보고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오랜만이군. 선장.“

지급 함선에서 처음으로 내린 김봉길은 정성국의 모습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동시에 아직 지급 함선에서 내리지 않은 선원들과 이주민들도 정성국의 모습을 보고 경악하는 모습이 보였다.

”헉...상...상투를...자르신 겁니까? 거기에 수염까지?“

정성국은 지급 함선에서 터진 경악성을 듣고 분위기를 짐작했기에 조금은 큰 소리로 말했다.

”아아. 워낙 더운 동네다 보니. 불편해서 잘랐네. 어차피 이곳이 조선도 아니고. 그리고 내가 전에 한 번 이야기 하지 않았나. 위생을 생각하면 머리를 짧게 잘라야 한다고. 수염도 그렇고.“

정성국이 큰 소리로 대답한 이유를 눈치챘는지 김봉길은 그의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화제를 돌렸다.

”그렇기야 하지요. 아무튼, 그동안 건강하셨습니까. 대방 어르신.“

정성국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아아. 별일 없었네. 아. 그리고 이젠 대방이 아니라 총독이라고 부르게. 이제 원상의 대방은 평국이 녀석의 자리 아닌가.“

”하하하. 그건 또 그렇군요,“

”헌데 의외로 좀 늦은 것 같은데...혹시 오는 길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원래 정성국의 예상대로였다면 5일 전에 도착했어야 하는 선단이었기에 혹시 도중에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묻자 김봉길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딱히 큰일은 없었습니다. 다만 하나 상의드릴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 그럼 이주민들이 내리면서 이곳은 복잡해질테니 일단 자리를 옮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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